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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작가의 말'에서 지은이는 이 책을 소설이라고 합니다.
소설이라니.....
여지껏 이 책을 평전이겠거니 하고 읽었는데 황당했지요.
가만 생각해보면 많은 대화들, 독백, 생각이나 상황묘사가 너무 생생하긴 했죠.
영화 <트루먼 쇼>처럼 일생을 중계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겠다 싶네요.

그래도 저는 평전이라고 생각할래요.
<칼의 노래>나 <불멸의 이순신>으로 이순신 장군을 새로 알아가는 것처럼, 장기려 선생에 대해 이렇게 알아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요. 후에 <장기려, 그 사람> 이라는 평전을 읽은 후에 사실과 크게 다르다면 소설이라고 번복할 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1. 무엇을 할 것인가


[ 할머니는 늘 그를 위해 기도했다.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서 크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할머니의 바람대로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 죄송해요. 기려는 할머니가 생각하는 그런 일꾼이 되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욕심이 많아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 저를 보고 계시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p. 43) ]


한국의 슈바이처로 존경받는 장기려 선생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네요.
당연히 있을 시기를 당연히 없다고 경시하는 이면에는 다른 블로거님의 말대로 '하늘이 내린 인재'로서의 위인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장기려 선생은 서원을 합니다.


[ 그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눈을 감았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또한 수많은 기억들이 먼지처럼 떠돌았다.
그는 포충망을 들고 곤충을 채집하는 아이처럼 그 숱한 생각과 기억들 가운데 지금까지 자신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것들만 거두어들였다. 맨 마지막에 김주필과 그의 어머니가 기려의 내부로 스며들어왔다. 그것들이 기려의 내부에 들어온 대신, 그의 내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가 의사가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때 누군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엇 때문에 의사가 되려고 하느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만약 제가 의사가 된다면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p. 80) ]



조금은 유치하기도 그래서 민망하기도한 서원의 장면들조차 감동인 이유는 장기려 선생의 실천이 있기에 그럴 겁니다.
혈액이 필요해서 스스로 무리하게 헌혈을 하고, 사비를 들여 진료비에 보태고, 무의촌 진료에 열을 쏟고, 자신의 잘못이 있으면 간호사에게 무릎 꿇을 줄 아는 선생의 삶이 서원을 보증해줍니다.

나이가 들고 상황이 변하면서 융통성 있게 바뀌게도 마련인 서원.
어린 시절의 그 서원을 바보처럼 계속해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선생의 삶이 있기에 소설이라면 유치할 수도 있는 서원의 장면도 마음을 울립니다.


2. 외식하는 자들


[ 그는 병원을 쉬는 날이면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칠성문 밖 빈민촌과 용산 면의 빈민촌을 찾아갔다. 어떤 목회자들은 그가 주일성수를 지키지 않는다고 힐난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저는 의사입니다. 만약 당신이 위급한 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저와 같은 의사가 주일성수를 이유로 당신에게 오지 않는다면, 그래도 당신은 기꺼이 받아들일 자신이 있으십니까?"     (p. 171) ]


불편한 진실이고, 통쾌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시선인지 정말 장기려 선생의 시선인지는 작가가 소설임을 시인하면서 알 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함석헌 선생과 가까이 사귀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작가의 시선만은 아닌 듯 합니다.

자신의 신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교리를 정통이라고 믿는 믿음, 의심이나 비판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남들을 가리키며 이단을 말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막히고 필요이상 분노하게 됩니다.

이제는 화내지 않으려고요.
이 좋은 책을 읽으면서도 그 '화'가 많은 생각을 가렸거든요.
그리고 저도 제 눈에 어떤 들보가 더 들어있을지 감당할 수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후퇴하는 군인처럼 사람보다 '국가'나 '주의'를 우선시하지는 않는지
김주필의 사례처럼 책임져야 함에도 책임을 미루었는지
한국전쟁 당시의 치안처럼 복수에 눈이 멀어 그걸 정의라고 하는지.
남과 북의 고관들처럼 어떻게든 자기 살 자리 마련에 열을 올리는지.
행동하지 않고 너무나 쉬운 비난을 하지는 않는지.
기도해야겠습니다.

3. 장기려 선생에게 환자란

좋은 구절이라 담아두고자 인용해 봅니다.


[ 그리고 그는 힘들 때마다 의학도였던 시절 스승이 들려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견뎠다.

"왜 아픈 사람을 일컬어 환자(患者)라고 하는지 아나? 환患은 꿰맬 관串자와 마음 심心자로 이루어져 있다네.
상처받은 마음을 꿰매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네. 다시 말해 환자란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줄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눈에 보이는 상처는 치유하기 쉽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네. 자네가 진정한 의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환자의 마음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 하네."
(p. 406) ]


써놓고 보니, 장기려 선생의 업적이나, 빛과 소금 같았던 일생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네요.
일단 '한국의 슈바이처' 이 말 한 마디로 대신할게요. 그리고 기록이 필요하다 생각되면 <장기려, 그 사람>이라는 평전을 읽고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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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유도 없는 절망에 허우적대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 절망에 허우적댑니다.
포그의 아파트 관리인이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토마스 에핑이 그랬고.
솔로몬 바버가 그랬고.
M. S 포그가 그렇습니다.

외삼촌, 아버지의 죽음이나 재정위기가 원인이라고 하기엔 좀 부족합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세 사람은 허우적댑니다.

마땅한 원인이 없기에 절망의 해결책도 없어 보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 따위는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데,
그런 것 생각할 겨를 없이 바동거리며 살아도 바쁜 삶인데 말이죠.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욕을 먹어도 한참을 먹을 나약한 그들에게, 배부른 그들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면서 읽게 되는 이 책은 좀 우울합니다.

읽다가 접은 책이지만 왕멍은 <나는 학생이다>에서 유배생활의 고독과 절망 속에서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배움'과 '공부'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달의 궁전>의 솔로몬 바버와 M. S 포그 역시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에핑은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나 그들을 잠시나마 구원한건 '키티 우'나 '에밀리 포그'에 대한 사랑이었네요.
그리고 '빅터 포그'나 '솔로몬 바버'와 같은 혈육이었습니다.

아무튼 지금 끼적거리고 있는 저도 책을 읽습니다.
부엌에 계란을 떨어뜨리고는 공원에서 노숙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 2 글 쓰는 방법에 대한 작가의 가르침?

우스우면서도, 동질감 느껴지는 포그의 절망에 대한 대처 외에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눈 먼 토마스 에핑에게 사물을 설명해야 하는 포그의 깨우침이었어요.
서로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처음 봤을 때에는 무언가 영감을 제공해 주는
것 같아서 인용해 봅니다.

M. S 포그는 토마스 에핑이라는 눈 먼 노인의 비서직을 갖게 됩니다.
책을 읽어주고, 같이 산책을 하면서 거리의 사물을 설명해야 하죠. 그 산책의 첫 날 길 한가운데서 포그는 에핑에게 큰소리를 듣습니다.


 "빌어먹을!"
그가 호통을 쳐댔다.

"그 대가리에 박힌 눈을 쓰란 말이야.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데, 자네는 지금
<흔히 볼 수 있는 가로등>, <아주 평범한 맨홀 뚜껑>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어떤 두 가지 물건도 똑같지는 않아, 멍청이 같으니라고, 어떤 바보라도 그건 알아. 나는 지금 우리가 뭘 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야, 빌어먹을! 자네가 나한테 확실히 설명해 주길 바라는 거라고!"  (p. 176)


이래서 포그는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을 보고 그에 대해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죠.
마치 김연수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태어나서 처음인 것처럼 느껴봐." 라고 하는 말처럼 말이죠.
포그는 세 가지 생각을 전해줍니다.


첫째, 아무것도 당연시해서는 안 되었다.

둘째, 긴 설명으로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 두면 남겨 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178~180)



# 3 가끔은 성공이나 실패의 결과를 잊자

토마스 에핑은 황무지의 동굴 속에서 은신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성공과 실패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잊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충만한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해 합니다.

결과나 평가가 머리를 짓누를 때, 잠시 벗어나서 자신에게 충만해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요.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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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향연> 작년에 재미있게 읽은 책 제목입니다.
<빵굽는 타자기> 이 책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실패의 향연'을 벌입니다.
시작부터 자신의 과거가 실패의 잔치였음을 그 이유와 함께 고백합니다.


[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나는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었다.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고, 글 쓰는 일은 수렁에 빠졌으며, 특히 돈 문제에 짓눌려 허덕였다.
이따금 돈이 떨어지거나 어쩌다 한번 허리띠를 졸라맨 정도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노상 쩔쩔맸고, 거의 숨 막힐 지경이었다. 영혼까지 더럽히는 이 궁핍 때문에 나는 끝없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내 불찰이었다.
나와 돈의 관계는 늘 삐그덕거렸고, 애매모호했고, 모순된 충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문제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내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  (p. 5)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 그의 실패담으로 가득합니다.

1. 젊은 시절

이 시절의 주인공은 영화 <타이타닉>의 주인공 '잭 도슨'과 비슷합니다.
다리 밑에서 자고, 쥐와 함께 3등 객실에서 생활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꿈을 잃지 않는 '잭 도슨'.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당당한 '잭 도슨' 처럼 살아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족부양의 책임도 없이, 젊음 하나로 자신만만하던 시절에는 실패의 짐도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글 쓰는 일을 위해, 꼭 필요한 돈만 있으면 되던 시절입니다. 그만큼의 돈벌이도 버겁긴 했지만요.

시키는 대로 작성만 하면 될 '시청각자료 아르바이트'는 민주제와 공화제의 차이점이 크다는 자신의 주장을 이해 못하는 사장과의 불화로 20분 만에 때려치웁니다. 웨이터, 시설정비, 유조선 선원, 호텔직원의 일들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 없이 잘 하죠.
스스로 실패자를 위한 상을 제정하여 공모하는 치기도 부려봅니다. 이렇게 좌충우돌 살아가면서도 글 쓰는 일은 놓지 않습니다.


[ 프랑스에서 살았던 3년 반 동안 나는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프리랜서로 얻은 시간제 일자리를 몇 탕씩 뛰느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서 얼굴이 파래질 정도였다.
일감이 없을 때는 일을 찾아다녔다. 일감이 있을 때도 더 많은 일을 찾을 방법을 궁리했다. 가장 잘 나갈 때에도 마음을 놓을 만큼 돈을 번 적이 없지만, 한두 번 위기를 맞긴 했어도 파산만은 용케 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흔히 하는 하루살이였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나는 꾸준히 글을 썼고, 대부분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지만 그래도 일부는 살아남았다. 좋은 싫든, 1974년 7월에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는 글을 쓰지 않는 생활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   (p. 93, 94)



곧 이 좋은 시절은 지나가죠.
주인공은 나이가 들고, 아들의 아버지가 되고, 가장이 됩니다.

2. 가장이 된 후의 시절

이제 '생계를 위한 시간'과 '자신을 위한 시간'의 균형은 맞추기 힘들어집니다.


[ 1977년 말쯤에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필사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돈 문제를 회피하면서 평생을 보냈는데, 이제 갑자기 돈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기적 같은 역전을 꿈꾸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위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중략>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제 나는 시간도 돈도 갖고 있지 않았다. ]   (P. 146)



그가 쓴 희곡은 '존 마이어'라는 절대적인 지지자의 성원에도 실패로 끝납니다.
스스로 개발한 '액션 베이스볼' 이라는 카드게임은 그의 기대와는 반대로 나락의 기분을 안겨준 채 끝납니다.
불면의 밤을 지내며 문득 생각난 기막힌 탐정추리소설도 구석에 쳐 박히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탐정추리소설로 900달러를 벌면서 실패의 추억은 끝이 납니다.

실패로 가득한 책임에도 꽤나 재미있습니다.
결국엔 성공한 작가가 될 테니, 실패의 쓰라림이 아닌 좋은 추억으로의 달콤함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가 담담한 필치로 실패의 암울함을 덜어내어서 일까요?
것도 아니면, 남의 실패이기 때문에 - 그것도 지나간 - 일까요?
혹은, 꼬장꼬장한 자존심 잃지 않고 꿈을 지켜내며 살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응원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이유는 알 수 없네요.

아무튼, 저는 추억으로 재구성되고 미화된 성공담보다는 쓰리지만 진솔해 보이는 실패담이 더 좋네요.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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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허삼관매혈기>, <형제> 를 꽤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에게 두 작가의 우열을 가릴 권한도, 능력도 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를 추천해준 친구에게

"하루키 얘기는 나하고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얘기를 하면서 "난 위화가 좋더라."고 얘기했죠.

속된 말로 '위화빠' 정도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작 3편을 읽었지만요.
그랬기에 '위화 산문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영혼의 식사>를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작가의 일상이나 생각들을 알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다 읽고 난 지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왜 이리 허망한지요.
당혹스럽습니다.
이 허망함과 당혹감은 전염성이 있는지, 다른 책을 읽어도 아무것도 쓰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쓰는 글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끼적임에 불과했는데도 그것도 못하겠다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이 책을 집어 들었던가?"
"무얼 기대했던가?"

무엇엔가 쫓기듯, 읽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기계적으로 집어 들었던 것이 탈인가 봅니다.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꾸역꾸역 읽어 온 것이 체했나 봅니다.
어느 블로거의 말대로 '급조한 느낌'의 이 책에 대한 실망보다는, 저 스스로가 바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읽은 이유와 체한 머릿속의 헛헛함을 느끼는 이유로 이 책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 적어도 지금의 저에게는 말이죠.
그래서 작가의 서문을 모아놓은 3편은 읽지 않았습니다.
각 소설을 읽을 때는 너무나도 좋아했던 서문임에도 모아놓으니 싫어지네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어떤 것도 끼적일 수 없을 것 같더니 주절대고 있는 새에 두 가지 생각이 남네요.

그 하나는 '아이, 두려움과 마주치다.' (p. 37)

위화의 아들 로우로우(漏漏)는 자신의 똥과의 첫 만남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웁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지막으로 비행기 안에서 두려움을 느끼죠.
비행기 안에서는 이렇게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귀엽죠? 위화는 이런 말을 하네요.

이런 형태의 두려움은 늘 혼자 극복할 수 있고, 그럴 때마다 내면의 성장을 얻을 수 있다.
세계에 대한 녀석의 이해, 그러니까 진정으로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들에 대한 이해는 부단한 공포와 극복을 통해 완성된다. 녀석이 어른이 될 때까지, 심지어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이런 두려움이 그와 동반할 것이다. 마치 어린 시절부터 나와 함께했던, 나뭇가지가 달빛에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발할 때 느꼈던 공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p. 39, 40)


지금 나와 함께하는 두려움은 무얼까 생각해 봅니다.
갑자기 떠 오르는 것은 없지만, 꽤나 많을 겁니다.
창피해서 여기에 적을 수는 없지만, 한 번 정리해 봐야겠습니다.


두 번째는,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노인의 모습 입니다.


하루는 아내 천홍과 함께 베이징의 왕푸징 거리를 걷고 있다가 갑작스런 광경에 경악하고 말았다. 왁자지껄한 인파속에서 갑자기 반듯한 복장을 한 노인이 눈물을 쏟으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뜬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불행을 그렇게 솔직하게 표출하는 그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가득했다. (p. 147)


내 마음은 눈물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김광석의 노래 <타는 목마름으로>의 첫 구절처럼 말이죠.

행복한 표정으로 가득한 거리에서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요.
신문과 기사는 불행의 표지로 가득하고, 거리는 행복한 얼굴로 가득합니다.
불행한 이들은 모두 숨어있는 건가요. 행복한 얼굴은 거리의 통행증인가요.

짐 캐리의 <YES 맨>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나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 같은 책들이 흩뿌려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의 눈물은 겉으로 나오지 못하고, 맘속에서 고여 썩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눈물도 소통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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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다 이해하는 스릴러의 스토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이해력과 지금 마음에 여유가 없음의 이유와 그리고 중요한 단어에 밑줄 긋고 암기하는 수준인 천박한 역사공부의 습관을 이유로 이 책 역시 소화해내지 못한 채로 이렇게 글을 끼적입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 때에는 소화해낼 수 있을지, 어떤 글을 끄적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요.
두 가지 단상만 적어보려고요.

# 1 나를 위한 노래는

책 속에서 정주댁, 송노인, 여옥이는 노래를 부릅니다.
정주댁과 송노인은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면서 노래를 하기도 하죠.

책 속에서 알 수 없는 혁명에 대한 노래나, 알 수 없음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혁명가를 부르는 사람들처럼 저의 주위에는 저의 생활에 대한 노래는 찾기 어렵네요.
기성복처럼 맞지 않는 사령타령 위주의 가요들이나 찬송가 민중가요 중에서 그럭저럭 맞는 노래들을 부르는수 밖에요.
전문가나 프로가 아니면 시도조차 저어하는 금기는 저 스스로 만들어놓고도 깨기가 힘드네요.

마부도 뒷주머니에 시집을 꽂고 다닌다는 문학 선생님의 유토피아와
일용노동자도 법전을 뒤적이며 스스로 소송을 감당해 내는 은사님의 유토피아처럼
나와 친구들이 우리의 삶을 노래하고 춤추며 사는 모습이 제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일부입니다.

여옥이가 스스로를 잘 알고, 표현하고, 노래하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마냥 부럽고도 사랑스럽습니다.


# 2 마지막 장면은 아쉽네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읽고 싶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어울리지 않는 희망을 갖다 붙여놓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갑작스러운 화해나 희망보다는 미완의 마무리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네요.

희망이 있는 마무리라면 김해연과 여옥이가 바다로 떠나는 장면을 생각했는데........
이게 더 어색한가요?

아무튼 김연수 작가의 책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기대가 되네요.

뱀발 : 이 정도 밖에 끼적이지 못함에 크게 아쉬워하면서 도움을 받은 글들을 링크합니다.

Hendrix 님의 블로그
http://flyinghendrix.tistory.com/164

승주나무님의 블로그 http://jagong.sisain.co.kr/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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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의 헐린 집터를 바라본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낮은 기와집들과 슬레이트집들
담장 위에 바른 시멘트에는 깨진 병조각들을 박아둔 집.
그 집에 가기 위해서는 끝까지 올라야 하는 오르막길 즈음에'재개발' 플래카드가 시뻘건 색으로 축하인지 저주인지를 해주고 있는 동네.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살던 집이고, 부모님이 처음 내 집을 마련한 그 집을 요즘 찾아가면 이런 모습입니다.

그 집 근처에서 오래도록 서성거리고 싶어도,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까봐 담배 한 대 피울 겨를 정도 서성입니다. 뭔지 모를 아쉬움과 짠한 마음이 듭니다. 환한 웃음 짓기보다는 울듯 말 듯한 웃음이 지어집니다. 지질이 궁상맞죠?

빡빡 깎은 머리를 한 학창시절 국사교과서의 집터 유적을 보면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몇 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의 자취가 나와 무엇으로 맺어져 있는지는 관심도 없던 나이입니다.
지금도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이제는 집터를 바라보면 제가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새 건물을 올리기 위해 헐어버린 누군가의 집터를 지나칠 때에는, 내 집이 헐린 것만 같습니다.

아이의 첫걸음에 아이의 받아쓰기 성적표에 웃고, 아이가 아플 때 울고,
사랑하고, 싸우면서 아옹다옹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담겨있을 것만 같은 헐려버린 집터를 바라보면 또 다시 서글픔에 소주 한 잔의 따뜻함이 올라옵니다.

<엄마를 부탁해>에서 박소녀 어머님은 맏이의 첫 직장, 첫 집을 파란 슬리퍼가 발을 파내려가도록 걷고 또 찾아다닙니다. 자신을 아껴주었던 사랑하던 시동생 균이에 대한 한과 풀어낼 곳 없는 고단한 삶이 머리에 고여 어머님을 갉아 먹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도 그렇게 당신에게 소중했던 추억들을 찾아다닙니다. 남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일 테지만요.
아마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다니지 않았을까요.


2.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책 속에서 착한 두 딸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지헌이는 엄마처럼 살지 않고 있고, 작은 딸은 꼭 엄마처럼 사는 듯 보입니다.
작은 딸과 박소녀어머님의 차이점이라면, 작은 딸은 충분한 교육을 받았고 양식이 떨어져 아이를 굶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과 후의 자기 인생까지 계획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을 테고, 엄마도 바라는 바이겠지만, 그런 엄마에게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파란 슬리퍼를 신고 찾아다닐 만큼 행복한 시간들이 있었음에 위안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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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DAUM 영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전 기억이 가물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이 책만큼 사랑받았던 드라마였습니다.
후남이와 종말이의 인기는 최고였죠.

점점 평균결혼연령도 높아지고 있고, 어머니의 지위도, 가족상도 바뀌고 있습니다.
조금씩이지만 말이죠. 지금 전근대사회의 조혼제도와 어머니상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제가 살던 집터가 흔적도 없이 아파트로 바뀌고도 오래 지나면, <엄마를 부탁해> 같은 책이나 <아들과 딸>같은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 또한 사진으로 역사 책 속의 한 줄로 남아있겠죠?

어쩌면 우리의 소중한 하루하루는 21세기 초의 생활상을 공부하는 우리 후손들이 지루해하며 암기해야 할 역사의 한 줄로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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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안 보여요."
사람이 하얗게 눈이 먼다.
그렇게 하이얀 채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백색질병'이 전염까지 된다.
발병이유도, 감염경로도, 치료방법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이 질병으로 눈 먼 자들은 격리수용 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의 눈이 먼다.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만 제외하고.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줬더니, 친구는 시큰둥하게 "공포영화야?"라고 묻습니다.
폭력과 기아에 노출되어 생존을 두려워하며 걱정해야 하니 공포도 있고, 공포 외의 것도 있으니 아니기도 한 것 같다는 말은 미처 해주지 못했습니다.

1. 공포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몸서리 칠만큼 두려운 일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부모님은 어쩌지?', 등 고민이 많겠죠.
그런데 이 책의 공포는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첫째 이유는 모든 이가 눈이 멀기에 같은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장애인들과 소수자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사회가 공포를 가중시키긴 합니다.
지하철역의 높은 계단과, 고장이 잦은 리프트는 무엇보다 큰 위협이 될 겁니다.
그러나 모두가 눈이 머는 상황에서 이 점은 개선되겠죠. 아주 많이.

굶주림과 무질서에 대한 공포가 눈앞의 문제인데, 사람들은 나름의 규칙을 세우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폭력은 눈멀기 전의 사회에서도 있었다는 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책 속에서도 눈 먼 사람들은 조직, 정부, 사회를 얘기하면서 살아갑니다.

결국, 갑작스러운 변화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기기 전까지 혼란기 동안의 생존만이 문제될 뿐입니다.
생존을 가벼이 여겨서가 아닙니다.
눈멀기 전의 소설 속의 세상 뿐 아니라, 지금 제가 사는 세상도 여전히 '사람답게 사는 생존'이 문제이기 때문에 소설 속의 공포가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별, 이혼, 실직, 취업, 물가, 교육, .........
어떠세요? 책 속의 공포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것 외에 눈 뜨고 있는 우리들은 서로 다른 것을 보면서 편 가르는 공포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칭 보수논객 이라는 지만원의 문근영 양에 대한 궤변이 그랬죠.
그리고 사람들의 자유와 대화를 두려워하는 대통령의 '미디어관련법 법률안' 과 '일제고사 파문에 대처하는 그들의 태도'는 현실을 하얗게 가려버립니다. 눈 먼 것과 다를 바가 있나요.


2. 같은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말한다

의사는 약국 직원을 향해 말을 이었다, 사실 눈은 렌즈에 지나지 않죠.
실제로 보는 일을 하는 것은 뇌입니다, 어떤 상이 필름에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죠.
 (p. 95,96)


일제고사에 대해 교육수요자에게 선택권을 주었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중징계를 가하는 사태를 보면서 참 많이 슬프면서도 화가 납니다.
아래에 기사의 일부를 발췌해 보았습니다.

김인봉 교장이 일제고사 반대하는 이유인즉 -views&news 김혜영 기자 <출처>

그는 서울지역의 교사 7명 해임-파면에 대해선 "나는 그걸 보고 우리나라가 3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그때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나 비방을 못했잖나. 100%찬성을 강요했던 유신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며 "일제고사의 경우도 100%찬성하라는 것 아니냐. 우리 학교 61명 중에서 53명이 봤으니까 87%가 응시한 거다. 8명은 13%다. 이 13%의 반대마저 포용하지 못하고 징계한다는 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천박한가. 야만스러운가를 드러낸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서울교육청을 꾸짖었다.


그리고 오늘 언론노조가 총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자율과 창의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다들 입을 모으는데 통제와 획일을 향해 달리는 법률안들을 보면서 할 말을 잃습니다.

미디어관련법안들도 경제 논리로 바라봐야한다는 이명박대통령의 얼굴 위로 '갱제를 외치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그나라당들의 97년 외환위기가 겹쳐지는 것에 이 책의 설정보다 훨씬 큰 공포를 느낍니다.

요즘 <눈먼 자들의 도시> 이 책보다 현실은 더 큰 공포이고 분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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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듯 한 표지그림과 같은 책입니다.

이 책은 저로서는 좀체 정리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첫째는, 마음에 와 닿는 기사들이 있고, 기억해두고 싶은 구절들이 많아서 좋기도 하고요,
소설이 아니라 도덕책처럼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 노골적으로 얘기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감도 들고 그러네요.

둘째는, '자아의 신화'를 이루려는 삶을 응원하는 것도 좋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표지를 잘 살피라는 얘기들이 좋았습니다. 반면에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팝콘장수의 삶이나 크리스털 상인의 익숙함에 대한 안락을 너무도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에는 동감하기 힘들더군요. 아마도 저 자신과 너무도 닮아있는 그들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책이든지 두 번 읽기를 싫어하는 저로서는 두 번 읽은 후에 좋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좋은 이유는 저도 꿈을 자주 꾸게 되어서이지요.
비록 '꿈은 이루어진다'는 그 꿈도 아니고 '비전'도 아닌 유치찬란한 꿈들이지만 기분 좋은 꿈을 자주 꾸게 되더군요.

제 얘기는 여기서 접고, 등장인물 위주로 책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 1 양

'양들은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전혀 없겠지.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나와 함께 있는 걸 테고.'
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물과 먹이뿐이었다. 자신들의 양치기가 안달루시아의 맛있는 목초지들을 많이 알고 있다면 양들은 언제까지나 그의 친구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p. 25)


# 2 산티아고 - 아브라함과 같이 아비 집을 떠나다


산티아고는 열여섯 살 때까지 신학교를 다녔다. 그의 부모는 그가 신부가 되어 단지 먹을 것과 물을 얻기 위해 일하는 생활을 벗어나 보잘것없는 시골 집안의 자랑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라틴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그는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었다. 그것은 신이나 인류의 죄악에 대해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 같았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다니러 왔다가 그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신부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 저는 세상을 두루 여행하고 싶습니다."

<중략>

"그 사람들은 돈이 가득 든 주머니를 가지고 여행을 다닌단다.
하지만 우리 중에 떠돌아다니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양치기밖에 없어."

"그렇다면 전 양치기가 되겠어요."   (p. 27~28)


이렇게 양치기가 된 산티아고는 두 번 연이어 꾼 보물 꿈, 그리고 집시의 해몽과 우연히 만나게 된 왕인지 사이코인지 알 수 없는 멜기세덱의 조언을 듣고 양들을 처분하고 피라미드를 향한 여행을 떠납니다.


# 3 팝콘장수

조연이라 대사 한 마디 없습니다.
멜기세덱 왕과 산티아고의 대화 속에 그의 인생은 까발려집니다.
사실 여부를 전혀 알 수 없음에도 그는 아래처럼 멋대로 해석됩니다.
이 부분에선 좀 동감하기 힘들더라고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표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자아의 신화'를 향해 변화하고 모험하는 삶은 물론 멋집니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 나 '자아의 신화' 역시 주위의 시선이나 평판,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팝콘 장수를 '자아의 신화'로부터 도망친 사람으로 몰기에는 너무 가혹한 평이라 생각합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양을 치나?"

"세상을 여행하고 싶어서요."

그러자 노인은 광장 한 구석, 빨간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팝콘 장수를 가리켰다.

"저 사람도 어릴 때 떠돌아다니기를 소망했지. 하지만 팝콘 손수레를 하나 사서
몇 년 동안은 돈을 버는 게 좋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야. 좀 더 나이가 들면 한 달 정도
아프리카를 여행하게 되겠지. 어리석게도 사람에게는 꿈꾸는 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음을
알지 못한 거야."

"저 사람은 차라리 양치기가 되는 길을 선택해야 했어요."

산티아고가 소리 높여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 사람도 그 생각을 했었다네. 하지만 팝콘 장수가 양치기보다는 남보기 근사하다고
생각한 거지. 양치기들은 별을 보며 자야 하지만, 팝콘 장수는 자기 집 지붕아래 잠들 수 있잖아. 또 사람들도 딸을 양치기보다는 팝콘 장수와 결혼시키려 하지."

<중략>

"결국, 자아의 신화보다는 남들이 팝콘 장수와 양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 거지."  (p. 48)


# 4 도둑

멜기세덱 왕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고 했습니다만, 이 도둑은 2시간 거리를 1년으로 연장시킨 장본인입니다. 그 결과 크리스털 상인과의 1 년 동안 많은 것을 배우게 되지만요.

"마크툽" 입니다.

# 5 크리스털 상인

꿈에 대한 동경으로 삶의 원동력 삼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삶의 이유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면서 꿈을 이루지 않는 사람으로
그에게 꿈은 동경의 대상일 뿐, 성취의 대상은 아닙니다. - 나랑 똑같군 ......


"그런데 아저씨는 왜 지금이라도 메카에 가지 않는 거죠?"
산티아고가 물었다.

"왜냐하면 내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바로 메카이기 때문이지. 이 모든 똑같은 나날들. 진열대 위에 덩그러니 얹혀 있는 저 크리스털 그릇들. 그리고 초라한 식당에서 먹는 점심과 저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바로 메카에서 나온다네. 난 내 꿈을 실현하고 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 자네는 양이나 피라미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걸 실현하길 원하지. 그런 점에서 자넨 나와 달라. 나는 오직 메카만을 꿈으로 간직하고 싶어 마음속으로는 벌써 수천 번 사막을 가로질러 성스러운 반석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고 , 율법에 따라 그 바위를 만지기 전에 광장을 일곱 바퀴 돌고 있는 나 자신을 눈앞에 그려보았지. 나는 이미 내게 일어날 일이며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일, 그리고 함께 나눌 대화와 기도까지 상상해보았어. 다만 내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절망이 두려워 그냥 꿈으로 간직하고 있기로 한 거지."  (p. 94)


그리고 장사가 잘 되지 않아도, 익숙함에 길들여져 변화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이 책 속의 낙타몰이꾼이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건강, 생명, 가족, 등 가진 것을 잃는 두려움" 에 대해서 말이죠

자신이 가진 것이 점점 작아지고, 적어지고, 늙어가고, 엷어지고 있을 때가 변화해야 할 시점이라고 세상은 말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소박한 일상에서 지금 갖고 있는 행복마저 잃을 수도 있는 모험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또 다른 금언과는 모순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나 선택은 어렵습니다. 목자가 있는 양들이 아닌 다음에야 선택을 해야 하지만요.

여기서도 "마크툽"을 외치는 수밖에요.


"난 삼십 년 동안 이 가게를 운영해왔네. 어떤 크리스털이 좋고 어떤 크리스털이 나쁜지, 어디에 쓰면 좋은지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있지. 나는 내 가게와 그 규모, 그리고 손님들에게 익숙해져있어. 자네가 그리스털잔에 차를 담아 팔면 가게 일은 더 잘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난 내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해."

"좋은 일 아닌가요?"

산티아고가 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내 삶에 무척 익숙해져 있네. 자네가 오기 전에 나는 내 친구들이 파산도 하고 가게를 키우기도 하며 변화하는 동안 그저 같은 장소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항상 우울했지. 그러나 지금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지금의 이 가게가 내가 바라던 꼭 그만큼의 가게라는 걸 알게 된 거지. 난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도 모르고, 또 달라지고 싶지도 않네. 난 지금 이대로의 내 상황이 만족스러워."   (p. 98)


# 6 영국인 연금술사 지망생 - 한 번 해보라니까!

납을 금으로 변하게 하는 연금술을 배우기 위해 사막의 연금술사를 찾아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연금술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해 왔으면서도, 정작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이죠.


"그는 첫별이 뜰 때 나타났지. 이제껏 당신을 찾아다녔노라고 말했지. 그러자 그가 납을 금으로 변하게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더군.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게 바로 그거라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직접 한번 해보라는 거야. 그게 다였어."

<중략>

"이것이 작업의 첫 번째 단계야. 불순물이 섞인 유황을 분리해내야 하지.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야말로 이제껏 '위대한 업'을 시도해 보려던 내 의지를 꺾었던 주범이지. 이미 십 년 전에 시작할 수 있었을 일을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어. 하지만 난 이 일을 위해 이십년을 기다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 (p. 161, 166)


# 7 사막의 연금술사 - 산티아고의 멘토

산티아고가 마음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산티아고가 눈 앞에 보이는 '표지'들을 더 잘 살필 수 있도록,
그래서 산티아고의 보물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멘토 입니다.

'마음의 소리'에 대해 이런 멋진 말을 합니다.


"마음은 제가 이대로 계속 가는 걸 원치 않아요."

"바로 그걸세. 그건 그대의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세. 그대가 마침내 얻어낸 모든 것들을 한낱 꿈과 맞바꾸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지."

<중략>

"아무도 자기 마음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 없어. 그러니 마음의 소리를 귀담아듣는 편이 낫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그대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대를 덮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야." (p.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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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라 무슨 내용일까?

책을 읽기 전에 잠시 짐작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결혼을 했다면 이혼한 후에 결혼을 했을 것이고, 이혼을 했다면 아내가 아닐텐데.....

어떻게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책을 읽고 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알고 난 후에는 '작가의 말'에서 박현욱 작가가 나무라는 글이 생각이 나네요.


"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벗어나야 하는 것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어 왔던 견고한 아집들이다."

이미 아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아내가 결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부일처제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폴리아모리(polyamory) 입니다.

아래에 이 책과 신문기사를 참고해서 잠깐 정리해 봅니다.


모노가미(monygamy)

일부일처제, 단혼

시리얼모노가미(serial monygamy)

사별이나 이혼 후 재혼하는 식의 연이은 모노가미

폴리가미(polygamy)

일부다처(polygyny)

일처다부(polyandry)

폴리아모리(polyamory)

비독점 다자간 사랑, 떼사랑

<인용 : 중앙일보 2008년 10월 18자 '분수대' 양성희 문화 스포츠부문 차장>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해 온 '일부일처의 결혼'에 대해 의문을 품어보라니요.

일부일처를 채택하고 있는 사회가 의외로 많지 않다는 근거 외에 생물학적, 논리적 근거를 합리적으로 나열한다고 해도, 머리 아픈 의문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냅니다.

두 명의 남편을 원하는 것 말고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내와, 두 명의 남편이라는 발칙한 소재를 그들이 좋아하는 축구로 풀어냅니다. 저 역시 축구를 좋아해서 키득거리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남의 얘기' 라서 입니다.

만약 제가 소설 속 '덕훈'의 입장이라면 절대 웃을 수 없을 겁니다.

아마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은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일부일처제도가 신이 내린 완벽한 제도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해봅니다.
'폴리아모리'가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될 날이 오기는 할까 싶기는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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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생님 쉬~ 하면서 화장실을 재촉하는 아이들부터
영악한 7살 아이들까지 잠깐이지만 가르쳐 본 적이 있습니다.
가르쳤다기보다는 같이 놀아주었고, 같이 놀아주었다기보다는 아이들이 저랑 놀아주었죠.
 
저의 정신연령이 딱 그 수준이었더랬죠.
선생이면 아이들보다 나아 먼저 살피고 북돋아주고 그래야 할텐데.
애들보고 웃고, 삐지고, 당황해하고 그랬습니다.

정말이지 영악한 아이들은 제 머리 위에 있습니다.
빤히 제 얼굴을 쳐다보며 제 속을 넘겨짚기도 하죠.
그랬던 아이들이 벌써 중학생이 되었겠네요.

이런 저에게 딱 좋은 책이었어요.

'전형적이다', '지나친 설정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조사가 부족하다'는 날카로운
비평이 담긴 서평들도 감사히 잘 읽어봤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책 읽는 짧은 시간동안 좋았습니다.
비교하기가 뭐하지만, 황석영 작가의 '개밥바라기별' 보다는 '완득이'를 읽는 것이 저는
더 좋았습니다. 황석영 선생의 글 속의 주인공이 공활을 하고 노가다판을 전전해도 '선비입네' 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완득이'의 표현을 빌자면

"가난한 사람이 부자인척 하는 것만큼이나 부자가 가난한 척 하는 것이 재수 없다." 는 정도일 겁니다.


# 2

한번은 중학교 선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청년을 봤나!"

이렇게 말해주었지만, 이 말과 같았을 겁니다.

"이런 아름다운 새끼를 봤나."
"세상 참 속편하게 산다."

세상물정 모르고 순진하고, 이상적인 저를 꼬집는 말이죠.
제 감정과 생각 없이, 교과서적인 말들을 주워섬기는 저를 이름입니다.

# 1과 같이 맹하고 # 2 와 같이 어리버리해서인지 전 이 책이 좋았습니다.
적어도 책을 읽는 3시간은 근래에 어떤 영화를 보는 것 보다도 좋았네요.


# 3 책 얘기

책을 읽는 시간동안 재미있고, 행복했습니다.
몇 시간 안 되는 시간동안이지만 웃고, 글썽이고 그랬죠.
어디에 털 날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완득이도 대견스럽고,
자신을 부정하면서, 자식에게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던 아버지가 스스로를 찾아가는 이야기도 행복합니다. 똥주선생은 예뻐서 안아주고 싶을 정도구요.

스스로를 부정하는 부모님을 보는 자식의 심정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작가가 이 부분을 그려주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습니다.

"넌 나처럼 살지 마라"

라고 말하는 부모님을 대하는 심정은 참담할 겁니다.
이 꽉 다물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 보다 힘빠지고 눈물 나는 그 심정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무슨 일을 하든지, 스스로부터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분위기들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 4 인용 - 친구, 가르친다는 것

"그 영감이 '네 몸땡이는 멀쩡한데, 네 정신 상태가 문제야.' 했을 때는 처음으로 대들었다.
당신이 내 몸 같았으면 그렇게 말했겠냐고. 그랬더니 내가 숙소에서도 안 나오고, 남하고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내 모습도 볼 수 없다고 혀를 차더라."

"예?"

"너도 잘 모르겠지? 그 영감이 그렇게 말을 어렵게 한다니까.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잖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고. '친구도 없는 인간이, 제 모습이 어떤지 알기나 하겠어.' 그러는데, 그때 좀 알겠더라."
(P.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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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전반적 내용

가늘고 긴 섬광과 함께 찾아온 재난.
세상의 모든 것이 불 타 버렸고, 하늘에선 눈처럼 재가 내린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당장에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을 찾기가 힘든 상황.
무엇보다 사람들이 서로를 경계하고 무서워해야 하는 절망적 상황이 닥칩니다.


열렬하게 신을 말하던 사람들이 이 길에는 이제 없다.
그들은 사라졌고 나는 남았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세계도 가져갔다.
질문 :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달의 어둠. 이제 밤은 약간 덜 검을 뿐이다.
낮이면 추방당한 태양은 등불을 들고 슬퍼하는 어머니처럼 지구 주위를 돈다.

반쯤 산 제물로 바쳐져 옷에서 연기를 피우며 새벽 보도에 앉아 있는 사람들.
자살에 실패한 종파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도우러 오겠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산마루에 불이 붙었으며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성가를 읊조렸다.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비명.
낮이면 길을 따라 말뚝에 박혀 죽은 자들. 이들이 무슨 짓을 했을까? 세상의 역사에는 죄보다 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는 거기에서 약간의 위로를 받았다.
(p. 40)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그 남자의 아내는 자살을 택합니다.
남자가 살아가는 이유는 아들인 '소년' 뿐.


남자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가 자신의 근거라는 것뿐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p. 9)


그리고 남자와 소년은 오로지 살기 위해, 남쪽으로 가는 길을 걷습니다.
약탈과 살인은 물론이고 사람을 먹기까지 하는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을 피하고, 위협하고, 때론 죽이면서 말입니다.


2. 그냥 드는 의문들

남자의 소년은 재앙의 시작 즈음에 태어납니다.
남자가 가진 사람 사는 세상의 추억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스마엘 베아가 쓴 <집으로 가는 길>의 소년들은 사람 사는 추억을 갖고 있음에도,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짐승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이 책 속의 '소년'은 사람의 추억이 없음에도 동정과 연민을 갖고 남자에게 칭얼대기 일쑤입니다.
조금은 비현실적이지 싶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남자'가 '소년'을 사람답게 키우고
있구나 하는 말로 변명이 될까요?


3. <드래곤 헤드>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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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헤드 영화> - 이미지출처 다음 영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만화가 있네요.
바로 <드래곤 헤드> 랍니다. 꽤 오래 전에 봤기에 이 책보다 먼저 나왔을 겁니다.

이 만화의 시작도 비슷합니다.
원인도 알지 못하는 재앙으로 소수의 사람들만 생존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제가 읽을 당시에는 완결이 채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10권으로 완결도 되고 영화도 나왔다니, 만화책을 한 번 봐야겠습니다.

제가 이 책 <로드>를 읽는 내내 <드래곤 헤드>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떠올랐을 뿐이니까요.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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