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책을 집어듭니다.
옆에 백지와 포스트 잇 그리고 연필을 준비합니다.

빠르게 책장을 훑으며 밑줄도 긋고, 포스트잇도 붙이고 메모도 합니다.

수험서도 아닌데...... 하며 책을 부지런히 읽다 보면,

공복 때문인지, 연거푸 마시는 커피 때문인지, 이런 책 읽기 때문인지 속이 쓰려옵니다.


책을 다 읽고, 메모하고 밑줄 그으며 난리 피웠던 흔적만 남네요.

뭔지 스스로도 모를 생각의 조각들이 있을 뿐입니다.

1권을 내내 이렇게 읽다가

2권부터는 편히 읽었습니다.

메모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한결 편해졌습니다.

이외수 작가의 책을 처음 봅니다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편함'이라고 느꼈습니다.
실실 웃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편하게 보는 것이 작가도 바라는 바가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의 말이나 머리말이 없는 것도 편하게 보라는 작가의 배려이지 싶어요.

이외수 작가의 다른 책들도 즐겁게 볼 기대를 해봅니다.

이제는 이 책 얘기 좀 해볼게요.

달이 뜨지 않습니다.

한가위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달과 관련된 일체의 용어도 사라집니다.

월요일(月曜日)은 인요일(人曜日), Monday Manday로 바뀝니다.

이렇게 달이 사라지고, 달에 관한 사람들의 기억 모두 사라짐으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책을 펴자마자, 판타지 소설인가 SF인가 상징일 뿐인가 알 수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목처럼 별의별 사람들이 다 등장합니다.

희안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네 모습들이기도 합니다.

단 무릉도원에서 오신 도인 할아버지와 소요낭자 그리고 도인들 빼고 말이죠

도인 할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나 좋아하시는 무협지의 고수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양 만화에 등장하는 각종 맨들과 비교도 안 되게 통쾌합니다. 난감한 뒤끝도 있습니다.

왜 통쾌한지와 그리고 난감한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버릇없는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있어도 어른으로 훈계하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훈계하다가 불상사라도 있게 되면 대서특필되어 인터넷에는 공분이 넘쳐납니다.

불필요하게 소통만 가로막는 윗사람의 권위 외에 필요한 권위는 무엇이 있을까요?.

 

노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어있는 오늘,

웃어른이 아랫사람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분위기,

그리고 어른이 어른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현실에서 보기 힘들어진 어른의 권위를 볼 수 있어서 통쾌했나 봅니다.

난감한 점은 제영과 찬수 커플을 마냥 욕할 수 없는 ''의 입장을 보면서, 그리고 비범한 노인이 상대하는 악한의 중심에 '막초딩'이 있으니 통쾌한 이면의 난감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저로서는 이 외에 이외수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작가의 이런 저런 생각들을 용케 억지스럽지 않게 꿰매었구나 싶은 느낌은 듭니다.

특히 2권에서 개방정신병동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 하나가 이외수 작가를 이루는 조각들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래에는 <배꼽>이라는 책 중에서
우물물 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췌했습니다.

<우행시>에 나오는 수녀님이 행악하는 상대주의자라고 비난해도 전 <장외인간>을 읽으면서 특히, 정신병동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글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
이하 [] 부분이 인용부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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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나열한 셋 모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세 작품 모두 작가의 능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이유는, 많은 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실낱같은 단서로 엄청난 작품을 썼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래에 작가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1. 베니스의 개성상인 - 작가의 말 (p 11)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3년 12월 1일자 신문들은 일제히 그림 한장을 외신으로 전하고 있었다.
플란더즈 화풍으로 잘 알려진 거장 루벤스(1577~1640)의 '한복을 입은 남자(A Man in Korean costume)' 라는 그림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400년 전의 서양 화가가 조선옷을 입고 있는 한국 사람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다니! 그 당시 유럽에 조선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나는, 피렌체에 살고 있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라는 이탈리아인이 일본 나가사키에서 노예로 사간 조선인 안토니오 꼬레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조선인이 지금도 남부 이탈리아 알비 지방에서 꼬레아라는 성을 쓰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선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그림 속의 남자는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가 노예로 팔려 이탈리아까지 가게 되었던 안토니오 꼬레아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방인인 안토니오 꼬레아는 이탈리아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살아갔을까.

시대를 뛰어넘는 안토니오 꼬레아의 머나먼 여행 이상으로 내 뇌리에 강하게 인식된 것은 한복을 입고 있는 남자의 알듯 모를듯한 잔잔한 미소였다.
그의 입가에는 비천한 신분의 사람에게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혈단신으로 그토록 먼 세계로 간 사람이 어떻게 그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 더구나 루벤스같은 명장을 초빙해서 그림을 그리게 했을 정도라면 사회적
신분이나 재력도 상당했을 게 아닌가. 그 사람이 정말 안토니오 꼬레아라면 어떻게 해서 먼 이국 땅에서 자수성가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조선에서는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은 더해가기만 했다. 생김새로 보아 경기도 서해안 지방사람 같다는 추측(조선일보 1984. 11. 23)만이 유일한 실마리였다.

그렇다면......
나는  추리를 계속해 보았다. 외국인, 더구나 동양인으로서는 정계에서 활약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종교계에서 활약했다면 교황청의 기록에라도 남아 있을텐데 쪽의 기록도 전무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상업도시였던 베니스에서 상인으로 자수성가한 것은 아닐까. 더구나 경기도 서해안 지역의 사람 같다는 외모로 보아서 러한 추리가 무모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이 글은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400년 전의 역사가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과 결합해서 만들어진 이 작품이, 대인들에게 역사의 의미를 되새김질할 수 있는 작은 귀감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1993년 늦은 봄
오세영



2. 리진 - 신경숙의 작가노트


내가 리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 년 전이다.
R이 외국어대학교 블레스텍스 교수가 백 년 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조선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는데 특이한 이야기가 있어 번역을 했다며 보여주었다. A4용지 한 장 반 정도 되는 분량이었다.
그걸 보기 전까지 나는 내가 백년 전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조선에 처음 로 파견된 불란서 외교관이 조선의 궁중 무희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와 함께 파리로 건너갔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게 뭐? 하며 무심히 읽었다.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백년 전에 불어를 빛나게 구사했다는 그녀의 행적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중략>

너무 야윈 나머지 마치 장난삼아 여자 옷을 입혀놓은 한 마리 작은 원숭이 같아 보였다.....는 문장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다시 던져진 사슬이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어 결국 종이를 삼키고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를 읽어내리는데, 동시대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본 대가로 깨진 유리조각들을 손에 움켜쥔 채 피흘리고 있는 백 년 전 한 여인의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다른 소설을 준비중이었는데 잘 풀리질 않아 아는 이 없는 낯선 길거리에 홀로 넘어져 있는 기분에 빠져 있던 때였다.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

R에게 전화를 걸어 A4 용지 한 장 반 안에 갇혀 있는 그 여인을 소설로 되살려보겠노라고 했다. 그날로부터 나는 하던 일을 접고 리진을 찾아 헤맸다. 자료를 모으다가 R이 따로 변역해 보여준 원서가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어 있음을 뒤늦게야 알았다.

<중략>

파리에서 그녀의 자취를 찾기를 포기하고 한국을 뒤졌다.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온갖 것들이 어떤 방편을 통해서든 기록되던 시대인데도 그녀에 대한 것은 단 한 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실존인물인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크게 실망을 했으나 여러 달이 지나자 다른 근력이 생겼다. 전기를 쓰려는 게 아니라 소설을 쓰려는 것이다, 싶었던 것이다.



3. 대장금 - 김영현 작가 인터뷰 (월간조선 2004년 5월호)

기사를 보면, 이병훈PD가 장금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네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중종 대의 장금과 선조 대의 장금이 딱 두 명이 나오는데, 그 중 중종실록에 중종 28년에 '대장금'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중종 39년에 대신들이 들어와서 '남자 의관들의 치료를 받으라'고 주청을 드리는데, 중종이 '내 병은 여의가 안다. 그러니 너희들은 걱정말고 물러가라' 고 하는 대목을 보고

'아, 장금이가 주치의가 됐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존경받고 사랑받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이것 뿐이겠냐만,
이 세 작품만 보더라도, 작가들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 사랑이 샘 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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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우예슬 양과 이혜진 양의 명복을 빕니다.


연일 신문, 방송에 안양초등학생 사건 기사가 보도 되고 있습니다.

끔찍하고, 몸서리쳐지게 무서운 일입니다.

그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무서웠을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사형제 존폐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분노하고, 사형 이상의 형벌이 있으면 그것을 집행해야 할 것만 같은 선정적인 기사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에 보았던 영화들이 다시 보고 싶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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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드맨 워킹>                  <타임 투 킬>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진출처 - DAUM 영화

데드맨 워킹에 대해 정리를 잘 해 놓으신 분의 블로그를 링크함으로 대신합니다.

류다 님의 블로그 - <데드맨 워킹-죽은 자와 함께 걷는 삶의 길>
그리고 여기에서는 우..시의 몇 부분을 인용하려 합니다.

이렇게 저는 최대한 객관적인 척,

비겁하게 거리를 두고 숨어 보려 합니다.

답을 모르겠습니다. 결론을 내리기 힘이 듭니다.

그렇게 또 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행시>에 나오는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에 네모표 안은 우..시의 구절들 인용입니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 - 밥 딜런

 

 

사람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봐야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흰 비둘기가 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야 백사장에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휩쓸고 지나가야 더 이상 사용되는 일이 없을까

나의 친구,

그 해답은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높은 산이 씻겨 바다로 흘러 들어갈까

사람이 자유를 얻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나의 친구,

그 해답은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지

 

사람이 하늘을 얼마나 올려다봐야 진정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사람들의 비명을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이 있어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는 걸 알게 될까

나의 친구,

그 해답은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지

 

 

어떻게 몰라?

아까 보니까 고모는 여기 서울 구치소 종교위원이라던데…….

저 사람한테 편지하려고 했을 땐 뭐 좀 알아보고 했을 거 아냐?

 

난 저 애를 오늘 처음 만났다. 유정아, 저 애랑 난 오늘 처음 만난 거야. 그게 다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너는 누구를 처음 만나서, 이제껏 무슨 무슨 나쁜 짓을 하다가 여기서 이렇게 날 만나게 되었습니까? 하고 묻지는 않잖니. 자기 입으로 그 얘길 하면 그냥 듣는 거지. 나에게는 오늘 본 저 애가 처음인 거다

오늘의 저 아이가 내게는 저 아이의 전부야.

 

그래서, 죄인이 그렇게 금방 천사처럼 변하는 게 좋아서……

하느님의 말씀이 요술 지팡이처럼 인간을 변화시키는 거 보고 고모랑 여기 드나드는 종교위원들 신앙심이 더 강해지나보지? 이상할 것도 없잖아.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언제고 자기네들 죽는다니 무서운 모양이지. 자기네가 다른 사람 죽일 때는 안 무서웠는데 이제 자기네들 죽인다니까 무서워서 얼른 착해지나보지…….. 그렇다면 사형제는 참 좋은 거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조금은 착해지는 게 보통일 테니까. 고모가 그때 교도관에게 말했던 그대로 최고의 교화잖아?

 

 

그럼 힌트를 줄게.

자기들이 죄를 지었다는 걸, 사연이야 어떻든 적어도 인정한다는 쪽이 하나 있고, 자신들은 죄가 있기는커녕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쪽도 있어. 앞의 한쪽은, 그들은 최소한 몇 번의 잘못으로 평생 동안 벌을 받지만 다른 한쪽은 그걸 반복한다는 거지. 자신들이 꽤 괜찮은 인간들이라고 생각까지 해가면서…… 그럼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은 이 중 누구일까요?

 

 

유정아………고모는 ………. 위선자들 싫어하지 않아.

뜻밖의 말이었다.

 

목사나 신부나 수녀나 스님이나 아무튼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 참 많아. 어쩌면 내가 그 대표적 인물일지도 모르지……..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런 사람들 안 싫어해.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난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실은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난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

 

그리고 고모가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 기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들은 남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물론 그럴 때도 많지만 한 가지만은 안 돼.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거라는 걸, 그걸 놓치면 우리 모두 함께 죽어. 그리고 그게 뭐라도 죽음은 좋지 않은 거야……. 살고자 하는 건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 새겨진 어쩔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건데, 죽고 싶다는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고, 이렇게 살 고 싶지 않다는 말은 다시 거꾸로 뒤집으면 잘 살고 싶다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싶다는 말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말해야 돼.

죽음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는 건,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

 

살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존치론자가 되고,

사형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폐지론자가 된다…….

 

 

기도해 주거라. 기도해.

사형수들 위해서도 말고,

죄인들을 위해서도 말고,

자기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는 안다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위해서 언제나 기도해라.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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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원숭이 서문 중 발췌 - 무라카미 하루키

[] 안의 내용이 인용부분 입니다
.

[ 나는 실은, 이런 정도 길이의 짧은 스토리를 아주 즐겨 씁니다.
물론 긴긴 장편 소설을 쓰는 작업이, 내게는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틈틈이 이렇게 짧고 재미있고 펑키한 스토리를 쓰다 보면, 마음이 상당히 가벼워집니다.

일이라기보다는 취미에 가까운지도 모르죠. 그래서 이번 달에는 무슨 얘기를 써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술술 담숨에 써내려 가고, 이것으로 끝, 그런 식이었습니다. 조금도 고생스럽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내게 "이런 얘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아니, '의미가 없다'고 하면, 오해를 부를지도 모르겠군요.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그 의미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의미는 아마도 - 깊은 수풀 속에 들쥐가 숨어 있는 것처럼 - 어딘가에 있을 테죠.
내가 그런 스토리를 문득 떠올렸고, 거기에는 내가 그런 스토리를 떠올릴 만한 '필연성'이 반드시 있었을 테니까요.
분명히 들쥐 정도 크기의 필연성이.

그러나 나는, 그 들쥐가 수풀 속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른다, 는 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술술 써내려갔다. - 그것도 신나게 썼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우리는 우리들대로 즐기고, 들쥐는 들쥐 나름으로 재미있게 살면 되지 않을까요. ]


P.S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고 싶으시다면 이 곳을 찾아가 보세요.

        오유미님 블로그 입니다.

        가셔서 Haruki 탭을 찾아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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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유미 2008.03.05 0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것을..
    저는 하루키를 만날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곤 하지요.
    하루키를 만난 초기에는 저도 여러 평론가들처럼
    그의 기호를 분석하고 했지요.
    그냥 즐기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어쩌나 이곳에 왔네요.. 님의 하루키에 대한 애정을
    읽고 갑니다..^^

    • 로처 2008.03.05 1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루키를 좋아하는 건 제 친구예요.
      좀 독특하긴 한 친구입니다.
      그 친구의 추천으로 읽어 봤습니다.
      저에게는 '나쁘지 않다' 입니다 ^^;
      방문 감사합니다. 정말 하루키를 좋아하시나 봐요.



# 하루키의 작품후기 중

* [] 안의 부분이 인용 부분 입니다.

[ 이
소설은 내게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일단 발을 들여놓게 되면 좀처럼 그곳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가 없었다. 역시 가게를 운영하면서는 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때, 소설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폭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소설이라는 것을 두들겨 패서 타고 넘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발목을 잡혀 짓밟히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그곳에는 융화와 협조의 정신은 없다. 하양 아니면 검정, 승리 아니면 패배뿐인 것이다.

어쩌면 이런 식의 표현이 다소 과장되게 들릴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용서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진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눈이 떠지는 듯한 생각이었다.

이전의 두 작품은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나는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소설을 썼다. 물론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게임 같은 것이기도 했다. 마음에 든 조각을 바꿔 붙여서 머릿속에서 차츰차츰 선호하는 이미지를 부풀려가고, 그것을 문장으로 바꿔서 옮겼다.

하지만 이 <양을 둘러싼 모험>은 완전히 달랐다.
이 작품은 물론 내가 탄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작품은 나라는 존재와 격렬하게 대치하는 칼끝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내게 어떤 종류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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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를 읽고 쓴 글 중에서
'하루키가 생각하는 이름'에 대해 끄적였었죠.

이 책 <양을 둘러싼 모험>에서 '이름' 에 대한 하루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인 듯한 대화에서, '이름'에 대한 하루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제 가정은 하루키의 웃음 하나로 바보가 되고 말겠지만 말입니다.

아래에 [ ] 안에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대화를 인용해 봅니다.
다소 길다 싶어서 중간 부분은 접어 놓았습니다.


[ 뿐만 아니라 놈에게는 이름조차 없었다.
나로서는, 고양이의 이름이 없는 게 놈의 비극성을 덜어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채질하고 있는 것인지는 쉽사리 깨달을 수 없었다.

"나비야." 하고 운전기사는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지만, 예상대로 손은 내밀지 않았다.

"어떤 이름이죠?"

"이름은 없습니다."

"그럼 평상시 어떻게 부르고 있죠?"

"부르지 않습니다. 다만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도 꼼짝 않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의지를 갖고 움직이지 않습니까?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데 이름이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정어리 역시 의지를 갖고 움직이고 있지만, 아무도 이름 따위는 붙여주지 않죠."

"그건 정어리와 인간 사이에는 거의 감정의 교류가 없고, 무엇보다도 자기 이름을 누가 부른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하긴 붙이는 건 자유이지만."

"그럼 의지를 갖고 움직이며, 인간과 감정의 교류가 가능하고, 뿐만 아니라 청각을 지니고 있는 동물은 이름을 갖고 있을 자격이 있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하고 운전기사는 스스로 납득했다는 듯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떨까요, 내가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도 좋을까요?" ]





[ "왜 지금까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틀림없이 이름이라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때문이겠지.
나는 나, 그대는 그대, 우리는 우리, 그들은 그들, 그것으로 좋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거야."  ]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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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양을 둘러싼 모험>을 읽으면서 밑줄 친 것을 옮겨 적어 봅니다.

# 다음은 제 생각을 짧게 적어 본 것일뿐, 제목은 아닙니다.
[] 안의 부분이 인용부분 입니다.

#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 "열
두살 때부터 귀를 내놓은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래도 모델 일을 할 때는 귀를 드러내잖소?"
"네에, 하지만 그건 진짜 귀가 아녜요." 하고 그 여자는 말했따.
"진짜 귀가 아니라고?"
"그건 폐쇄된 귀예요."
나는 수프를 두 번 떠먹고 나서 고개를 들어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폐쇄된 귀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겠소?"
"폐쇄된 귀는 죽은 귀예요. 내가 직접 귀를 죽였어요. 다시 말해서 의식적으로 통로를 분단시켜 버리는 일이지만 - 이해하시겠어요?"
나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
"그대가 말하고 있는 걸 종합해보면 이런 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결론적으로 그대는 열두 살까지 귀를 드러냈었어. 그리고 어느 날 귀를 숨겼지. 그런 다음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귀를 드러내지 않았어. 꼭 귀를 드러내야 할 때는 귀와 의식 사이의 통로를 폐쇄하는 거야. 그런 거요?"
그 여자는 빙긋 웃었다. "그런 거예요."  ]



#  하루키의 학교

[ 여기
에는 자신의 사이즈라는 게 없어.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서 다른 사람의 사이즈를 칭찬하거나 헐뜯으려는 무리도 없어.
시간은 투명한 강물처럼 있는 그대로 흐르고 있지. 이곳에 있으면이따금 자신의 원형질까지 해방돼 버린 듯한 느낌마저 드는 거야. ]


이 소설 속에서 쥐의 별장이 있는 곳을 말하고 있지만,
하루키의 다른 소설 속에서는 학교를 이렇게 말하고 있었죠.
예를 들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도 학교도 이런 모습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다양성 보다는 표준화된 제품을 양산해내는 학교 말이죠.
개성 보다는 정답일 수 없는 정답을 요구하는 학교 말입니다.



# 혼자 해낼 수 없는 친구 - 사람은 혼자 살지 않아요!

[ "소용없어
. 틀림없이 잘 안 될 거야."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았다.
찾고 있는 사이에 여종업원이 성냥을 그어서 불을 붙여주었다.
"걱정 없을 거야. 죽 함께 해온 내가 말하는 것이니까 틀림없어."

"너와 둘이니까 해낼 수 있었지. 지금까지 혼자서 뭔가를 해보려고 했어도 잘된 적이 없었어."하고 그가 말했다.

"야, 들어봐. 일을 벌이라고 말하는게 아니라니까. 축소하라고 말하고 있잖아. 예전에 해왔던 산업혁명 이전의 번역일 말이야. 너 한 사람과 여직원 하나, 바깥에서 일감을 맡아줄 아르바이트 대여섯 명과 프로페셔널 두 명. 못 해낼 게 없잖아."

"넌 날 잘 몰라."
10엔짜리가 잘깍하는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나는 나머지 세 닢의 동전을 넣었다.

"난 너완 달라. 넌 혼자서 해낼 수 있어. 하지만 난 그러질 못해. 누군가에게 불평을 늘어놓거나 자문을 구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거야." 하고 그가 말했다.  ]

누구에게나 속상한 일 털어놓고, 화풀이 받아줄 친구는 있잖아요.
말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무덤 속으로는 혼자 들어가겠지만 말입니다.
걱장 마세요.
하루키 씨! 그리고 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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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영식 2010.02.15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영화화한 '진주귀걸이 소녀'에서도 귀를 보여주지 않죠. 그 영화나 그림 보면 이 소설 생각나요.


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이 책은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단편소설이 장편소설보다 좋으냐고 물으시면, 답을 하긴 쉽지 않겠습니다만,

 

저는 이 책에 관한 한, 좋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듯한, 그래서 잡힐 듯 말 듯 한 이야기가 좋습니다.

다른 말로는, 명확한 메시지가 없어서 좋구요.(물론 제가 놓친 것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말로는, 여백이 많아서 좋습니다.

 

아래에는 이 책의 단편 중에서 저의 생각의 단편과 인용구들 입니다.

네모 안의 글이 책의 인용입니다.
 

1. 렉싱턴의 유령 잠과 상실감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하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셨어.

아마 아들인 나보다 어머니를 훨씬 더 사랑하셨을 거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지. 자기 손으로 획득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그에게 나란 존재는, 결과적으로 얻어진 것이었어. 그는 물론 나도 사랑해주셨어. 딱 하나뿐인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은 아니었지. 그렇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으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도 하지 않으셨으니까.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3주일 동안, 아버지는 내내 잠만 자셨어. 과장이 아니라네. 말 그대로 내내 주무셨지.

…………..

 

그렇게 깊고, 그렇게 긴 잠을 나는 그때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네. 그는 마치 다른 세계로 가버린 사람처럼 보였어. 정말 무섭고 두려웠다네. 나는 그 넓은 저택 안에서, 그야말로 외톨이였지. 세상에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었다네.

………..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네.

 

뒤에 김난주씨가 옮긴이의 말에서 적은 것에서, 저는 위안을 삼을 수 있었습니다.

유령을 무서워 하는 옮긴이의 딸만큼, 혼자되는 것이 두려운 모양입니다.

 

2. 침묵

 

학생들도 3학년이 되면 온통 입시밖에 염두에 없어, 교실 분위기도 팽팽하게 긴장되었습니다. 나는 그 학교의 그런 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들어갈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고 6년을 다녔는데도 끝내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학교 친구는 끝내 한 명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나마 사귀었다고 하는 상대는 체육관에서 만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고 또 이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과는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연습이 끝나면 함께 맥주를 마시기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반 남자들과는 전혀 종류가 달랐고, 하는 얘기들도 내가 보통 교실에서 하는 내용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있는 편이 훨씬 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 중요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만약 내가 복싱을 하지 않았다면, 그 숙부의 체육관에 다니지 않았다면 난 참 고독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하는 말을 혹은 당신이 하는 말을, 누구 하나 믿어주지 않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법이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죠.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일은 여섯 달 만에 그럭저럭 끝났습니다만 이 다음에 그런 일이 다시 생긴다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신이 그것에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을지,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때로 정말 두려워집니다. 밤중에 그런 꿈을 꾸고 놀라 벌떡 일어나는 일도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침묵>을 읽으면서, 학창시절 생각이 많이 납니다.

 

표준과 규격이 지배하는 학교를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혀 옵니다.

다원화 시대, 다문화 시대, 그리고 창의와 다양성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학교는 여전히 정답표준 그리고 정상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3. 토니 다키타니

 

# 상실감 1

 

다키타니 쇼자부로가 홀쭉하게 야윈 몸 하나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1946년 봄이었다.

돌아와 보니 도쿄의 집은 한 해 전 3월 도쿄 공습 때 불타버리고 없었다. 부모님도 그때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딱 한 명뿐인 형은 버마 전선에서 행방불명 된 채였다. 결국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천애 고아의 몸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별로 슬퍼하지도 안타까워 하지도 않았고, 그다지 충격도 받지 않았다. 물론 상실감 비슷한 것은 느꼈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은 언젠가는 혼자가 되는 법이다. 그는 그때 서른 살이었다. 외톨이가 되었다고 아무나 붙들고 하소연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단번에 몇 살을 먹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감정은 그다지 일지 않았다.

 

# 상실감 2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느껴야 좋을지 자기자신도 잘 몰랐다. 그는 그런 감정에는 서툴렀던 것이다. 무슨 평평한 원반 같은 것이 가슴속에 쏙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물체이고, 어떻게 거기에 있는지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물체는 내내 거기에 있으면서 그가 그 이상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도록 저지하였다.

그 덕분에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한 일주일 정도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4. 일곱 번째 남자

 

# 두려움과 고통 1

 

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포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잠시 짬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공포는 물론 존재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고, 때로는 우리 존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 공포에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내 경우에 그것은 파도였습니다.

 

 

5.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 두려움과 고통 2

 

제일 괴로운 것은 무서움이야. 실제의 통증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통증을 상상하는 쪽이 훨씬 무섭고,  싫어. 그런 기분 알겠어?

알 것 같애.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 하루키 소설 속 가족은 거의 등장하지 않아 보입니다.
적어도 제가 그간 읽었던 소설 속에서는 그렇습니다.

이 단편이 그간 읽었던 그의 책 중에서 가족이 가장 많이 등장하지 않나 싶어요.

 

그렇지만, 도쿄로 돌아가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나는 말했다. 사촌 동생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따위, 그 어디에도 한 가지도 없다. 그렇지만 다른 데라면 몰라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루키는 가족으로부터 불쾌한 기억이 있는가?

질식할 정도로 무거운 기대를 받으며 자라왔는가?

엄부 아래 엄한 규율밑에서 숨막힐 듯 자랐는가?

왠지 모르게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고,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는 하루키가 보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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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ezhebel 2008.03.04 0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니 타키타니는 배경 때문인지, 영화 [세상밖으로(개봉제몰:클럽진주군)]을 볼 때 참 생각이 많이 나던 이야기(?)였습니다. 하루키를 예전만큼은 읽지 못하지만, 사실 언제 슬쩍 펴들고 읽어도 거부감없는, 잘 읽히는 글들 아닌가 생각해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 로처 2008.03.04 1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 제목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오늘 읽은 <양을 둘러싼 모험> 과 <밤의 원숭이>를 마지막으로 하루키랑은 일단 바이바이 하려구요.
    피곤하고 지치면 다시 찾아볼것 같기도 합니다.
    댓글 감사해요. 다음에는 트랙백도 팍팍 남겨주세요 ^^;



<렉싱턴의 유령> 책 말미에
- 옮긴이의 말 김난주

 

  

렉싱턴의 유령 가장 뒷부분에 옮긴이의 말이 있습니다.

옮긴이 김난주씨의 글이죠.

하루키 속의 따뜻함을 퍼올리는 글이라 생각할 정도로 좋아서 옮겨 봅니다.

 

옮긴이의 말 김난주

출처 렉싱턴의 유령(열림원)

 

며칠 전 늦은 밤이다. 둘째 딸아이가 잠이 안 온다면서 얘기를 해달라고 칭얼거렸다.

내가 예의 옛날에 어떤 소설가가 있었는데…….. 라고 서두를 꺼내자, 아이는 또 소설가야라며 시큰둥해 했다.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야. 들어 봐 라고 달래자, 샐쭉한 표정으로 내 가슴에 기대는 딸.

 

밤마다 얘기를 해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늘 새로운 얘기를 들려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작업하고 있는 작품의 내용을 대충 각색하여 들려주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그날은, <렉싱턴의 유령>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소설가가 미국에 살았는데 미국 친구네 집을 봐주러 갔었대. 그런데 그 소설가는 너 같지 않아서 열한 시만 되면 잠을 잤다는 거야………”


얘기가, 혼자 잠자던 소설가가 느닷없이 한밤중에 깨어나 무슨 소리를 듣는 장면에 이르자, 아이의 표정은 반짝반짝 오히려 잠이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린가 싶어서, 소설가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대. 그랬더니…….


엄마, 유령이야?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무섭다고 더욱 안겨 드는 딸.

나는 순간적으로 극적인 각색을 감행하여야 했다. 한밤에 유령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으응, 그게 아니고, 그 소설가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야. 잠에서 깨어나 무슨 소리를 듣는 꿈 말이야. 그 집은 아주 오래된 집이었거든. 소설가 아저씨 혼자 자니까 아주 심심하겠지. 그래서 그 집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의 꿈 속에 나타나서 소설가가 혼자 자도 외롭고 심심하지 않게 파티를 열어 준거야.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면서 말이야.


, 그럼 그 소설가 아저씨, 아침까지 안 일어났어?


그럼, 아침까지 푹 자고 일어나서, 또 소설 썼지.


딸아이는 그제서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고 나서 잠시 생각했다.

적막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케이시.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깊은 잠을 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란 외로움과 두려움에 마음이 늙어가고 있는 그, 그를 위해 이미 죽은 많은 자들이 파티를 열어 준다면, 그는 길고 긴 잠 같은 죽음에 편안히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죽은 자들이 내미는 따스한 손길을 마주 잡을 수 있다면 말이다

 

1997년 깊어가는 가을

김난주

 

 

이 정도 따뜻함과 자기긍정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루키 소설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관찰자인 듯, 거리 두고, 외롭고, 건조하고, 때로는 괴기스럽고 차가운 하루키 소설 속의 따뜻함을 이해하고 퍼 올리려면 말이죠.

 

김난주 씨가 어떤 작품 활동을 하는지 새삼 궁금해 집니다.

소설을 써도, 아동문학을 써도, 읽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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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머리 속 얘기를 중얼거리듯 합니다.

뒤죽박죽, 한 달은 청소를 안 한 것 같은 방처럼 어질러진 그의 머리 속 얘기를 그냥 풀어 놓은 듯 하죠.

제가 하루키에게

거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요? 라고 물으면,

뭘 말이요? 하고 되물을 듯 합니다.

이 책에서도
현실적이고, 명확한 것은 언제나 나오는 노래제목 뿐 입니다.
그리고 그가 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 사이, 거리 두기, 인연 등등 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이름 ………

다음에 이름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2.
이름과 관계

하루키는 <>를 객관적 수치로 표현해 보고, 기호를 나열해 보는 등, 주관을 배제하고 철저히 객관적인 조각들로만 <>를 얘기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고 싶어합니다.

결국,  이름 마저 주관의 요소로 보는 모양 입니다.

아니면, 이름을 알게 된 후 관계의 책임이 무거워 피하는 것일까요?

그의 소설 속에는 익명이나 가명의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
댄스 댄스 댄스>키키 가 그랬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친구인지, 자신인지 모를 가 그랬고,
가 사귀는 여자 그리고 <>가 사귀는 쌍둥이 자매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사귐이 있습니다.

이름이 사람의 인생을 좌우 할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이름이 <>를 이루는 것들을 곡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름은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귐(관계)의 시작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하루키 소설 속의 <>는 시니컬 하고, 관조적이고, 인생에 달관한 듯,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속의 외로움과 관계단절의 두려움, 소외에 대한 걱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상실감이나 단절의 두려움, 허무함 같은 감정들의 시작에는 익명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첫 단추는 이름 이 아닐까 합니다.

 

<어린왕자> 도 생각나구요.......

아래에는 김춘수 님의 시 을 인용해 봅니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3. 하루키, 시간의 세례 받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이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말대로 <시간의 세례>를 받아 작가가 타계한 후에도 오래도록 사랑 받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관조적이고, 시니컬한 캐릭터의 매력을 보자면, 오래 가지 않을 것도 같구요.
이음, 매듭, 관계, 거리 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기에, 고전처럼 오래 남을 것도 같습니다.

하긴, <>에게 의미가 있고, 내가 의미를 찾으면 그만이지,
시간의 세례와 다수의 사랑을 받을지는 불필요한 호기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S. 서핑중에 소설 속의 <콜라+핫케익>을 만드신 블로그가 있어 링크 합니다
다인님 블로그 :  세계 명작 식당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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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룡.. 2008.02.26 2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루키님의 책이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읽은 책이 없는듯합니다. 저로 하루키님의 소설을 좀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 로처 2008.02.27 1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친구가 좋아하는 책이라 읽어 봤어요.
      저에게 하루키 책은 그의 소설 속 말대로 '나쁘지 않아' 정도네요. 내 생애의 아이들 포스팅 하신 것 잘 읽었어요 달룡님. 바쁘신 와중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해요.


1.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쓰기-하트필드

"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책 속의 하트필드



이제 나는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으며, 얘기를 끝낸 시점에서도 어쩌면 사태는 똑같다고 말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요양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에 대한 사소한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언어는 어둠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하루키


"
글을 쓰는 작업은, 단적으로 말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필요한 건 감성이 아니라, '잣대'" <기분이 좋아서 무엇이 나쁜가?>
-         책 속의 하트필드


2.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밑줄 긋기

 

"이따금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해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전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테마로 한 짧은 소설을 쓰려고 했던 적이 있다.

결국 소설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 동안 줄곧 인간의 '레종 데르트'에 대해서 생각했고 덕분에 기묘한 버릇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수치로 바꿔 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버릇이었다.

약 여덟 달 동안 나는 그런 충동에 시달렸다. 나는 전철에 타자마자 승객 수를 헤아렸고, 계단 수를 전부 헤아렸고, 시간만 나면 맥박 수를 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969년 8월 15부터 이듬해 4 3일 사이에 나는 강의에 358번 출석했고, 섹스를 54번 했고, 담배를 6,921개비 피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 나는 그런 식으로 모든 걸 수치로 바꿔 놓음으로써 타인에게 뭔가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할 뭔가가 있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피운 담배의 개비수나 올라간 계단의 수나 나의 페니스 사이즈에 대해서 누구 한 사람 흥미 같은 걸 갖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외톨이가 되었다.



"
어째서 안 하는 걸까?"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렇겠지. 바보 취급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일세."
"바보 취급은 안 한다구."
"그렇게 보이는 거라구. 전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어. 자네는 다정하지만 뭐랄까, 모든 걸 달관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 그다지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닐세."
"알아."
"다만 나는 자네보다 20년이나 연상이고 그만큼 여러 가지 일을 많이 겪었지. 그러니까 이건 뭐라고 할까......."
"노파심."
"그래."
나는 웃고 나서 맥주를 마셨다.
"쥐한테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내 보지."



3. 1973
년 핀볼 밑줄 긋기


 "
이름은?"

나는 두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숙취 탓으로 머리는 깨질 것만 같았다.


"
밝힐 수 있을 만한 이름이 아니에요."

오른쪽에 앉은 여자 아이가 말했다.


"
정말로 대단한 이름이 아니라구요, 알겠죠?"

왼쪽이 말했다.


"
알았어."

내가 대꾸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앉아서 토스트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정말 맛있는 커피였다.


"
이름이 없으면 곤란해요?"

한 아이가 물었다.


"
글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생각을 했다.


"
만약에 꼭 이름이 필요하다면 적당히 붙여 주면 되잖아요."

또 다른 아이가 제안했다.


"
당신 마음대로 부르면 된다구요."

쌍둥이는 언제나 번갈아 가며 얘기했다. 마치 FM 방송에서 스테레오를 점검하듯이. 그 때문에 머리가 한층 더 아팠다.


"
예를 들면?"

내가 물어 보았다.


"
오른쪽과 왼쪽."

한 명이 말했다.


"
세로와 가로."

또 다른 한 명이 말했다.


"
위와 아래."

"겉과 속."

"동쪽과 서쪽."


나는 지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이렇게 덧붙였다.

"입구와 출구."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우체통, 전기 청소기, 동물원, 소스 통.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쥐덫.



 
나는 우물을 좋아한다. 우물을 볼 때마다 돌멩이를 던져 넣어 본다.

싶은 우물의 수면을 때리는 돌멩이의 소리만큼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건 없다.



핀볼 기계와 히틀러의 발걸음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그들 둘은 어떤 종류의 저속함과 함께 시대의 거품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리고 그 존재 자체보다는 진화의 속도에 의해서 신화적 후광을 얻었다고 하는 점에서 말이다. 진화는 물론 세 개의 바퀴 즉 테크놀러지와 자본 투자, 그리고 사람들의 근원적 욕망에 의해서 지탱되었다.



핀볼 연구서인 <<보너스 라이트>> 서문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당신이 핀볼 기계에서 얻는 건 거의 아무것도 없다.

수치로 대치된 자존심 뿐이다. 잃는 건 정말 많다. 역대 대통령의 동상을 전부 세울 수 있을 만큼의 동전과 되찾을 길 없는 귀중한 시간이다.


당신이 핀볼 기계 앞에서 계속 고독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은 프루스트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드라이브 인 극장에서 여자 친구와 <용기 있는 추적>을 보면서 진한 애무에 열중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가 되고 혹은 행복한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핀볼 기계는 당신을 아무데도 데려가 주지 않는다.

리플레이 램프를 켤 뿐이다.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마치 핀볼 게임 그 자체가 어떤 영겁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영겁성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걸 모른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추측할 수 있다.
핀볼의 목적은 자기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혁에 있다.
에고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에 있다. 분석이 아니라 포괄에 있다.
만일 당신이 자기 표현이나 에고의 확대, 분석을 지향한다면 당신은 반칙 램프에 의해서 가차없는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좋은 게임을 하길 빈다.



"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하다니요.......다만 귀를 청소할 때 주의만 하면 되는 거예요. 주의요."

"귓구멍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구부러져 있어서 뭔가 달리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까?"

"영향을 받다니요?"

"가령 ...... 정신적으로."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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