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 김훈

1. 관계, 사연 그리고 사람

문정수는 기자입니다.
많은 사건이나 사고를 경험합니다. 취재를 하며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수록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수록 그들의 사연을 알아갑니다. 사람을 닮은 사연들은 각자의 색을 갖고 명멸합니다. 간척되어 마르는 해망지역 못의 물고기처럼 살아 꿈틀거리고 모두가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그 사연들을 묻어야 합니다. 신문이 브리태니커가 되는 일은 막아야 하니까요. 기사가 되는 것은 사연을 배제한 무채색의 사실들 입니다. 이런 무채색의 사연들은 일기예보 보다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짧은 탄식이나 동정의 대상이 될 뿐이죠.

임금님 귀의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의 심정으로 문정수는 체한 듯 걸려있는 사연들을 노목희에게 이야기하면서 풀어냅니다. 묻어도 자꾸 살아나는 사연들을 노목희에게 방류합니다.
문정수에게 노목희는 대밭이기도 하고, 해망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노목희는 미대를 졸업한 교사였고 출판사 직원입니다.
대나무밭으로서의 일상도 좋아하는 노목희는 문정수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문정수가 그녀의 대밭에서 위안을 얻는 것처럼, 그녀도 문정수의 주절거림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그녀도 변화하는 세상의 빛과 색을 그림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주저함이 있어서인가 봅니다. 만물의 변화를 단정 짓지 못하는 그녀의 주저함은 어쩌면 넘치는 사연을 다 품지 못해 괴로워하는 문정수의 그 어떤 면모와 닮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장철수
그는 불만과 개혁, 운동이라는 색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색을 잃고 맙니다.
어쩌면 색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신문에서 색을 빼버린 사람들 이야기처럼 색이 빠져 보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세 사람 외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금자, 그녀의 아들, 소방관 박옥출, 제3자와 그의 어머니, '남'이나 '오'처럼 성만 나오는 사람, 존속살인범, 익명의 익사자, 방미호와 방천석, 후에, 미군 공보관, 횟집마을 사람들......
관계의 밀접함에 따라 사연과 사람은 색이 있을 겁니다.
사람에 따라, 관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색일 테고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멸하는 색일 테지요.
노목희가 창야의 저수지에서 포착하지 못해 그리지 못하는 그런 빛과 색일 테고요.
문정수가 가슴에 품기에 벅차서 방류해야만 하는 사연과 사람일겁니다.

바람에 날리며 해망의 간척지를 덮는 풀씨처럼 살아도.
다른 사람들이 흑백으로 보는 삶을 살아도.
한 줄짜리 기사거리도 못되는 삶을 살아도.
바다를 그리며 머리가 깨지도록 수조를 들이받는 바다사자처럼 지향점을 갖고 살고 싶네요.
혐오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색깔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색 자주 변하고, 금세 사라질지라도 말이죠.

2. 맑게 소외된 자리

책을 읽고 난 후 감상은 "허무"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지만 허탈합니다.
그 많은 사연들은 숫자로만 기록되는 익명의 사망자들처럼 덤덤하고요, 명멸하는 사람들의 삶은 기사처럼 감흥이 없습니다. 문정수는 데면데면하고, 장철수는 색을 빼버렸습니다. 그나마 노목희가 유학 가는 장면을 희망적이라고 봐야 하나요?

작가의 말에서 김훈 작가는 이렇게 말하네요.

[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 문제다. (p. 325) ]


작가의 심중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맑게 소외된 자리'가 뜻하는 바도 알기 힘들죠.
그러나 작가가 <공무도하>같이 허무로 가득한 책을 연이어 써 낸다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확실히 '소외된 자리'를 체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감상을 '허무'로 받아들인 저의 개인적 잡생각일 뿐입니다.

해망 바다의 풀씨에게 허무는 없습니다.
수조 안에 갇힌 바다사자에게도 없습니다.
오금자, 박옥출, 등 많은 사람들에게 허무는 사치일겁니다.
실망이나 좌절 같은 허무와 유사한 감정은 있겠지만 허무보다 앞서는 것은 배고픔 같은 생존에의 욕구일겁니다.
오금자씨처럼, 그 아이처럼, 박옥출씨처럼일지라도, <남한산성>에서 말 먼지에 피바람이 몰아쳐도 그저 살고 죽는 사람들처럼요. 일단은 살고 봐야죠.

생각해보면 저 같은 단순한 놈의 생존을 위해서 작가는 부러 허무를 내뱉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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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 이문열

이 책은 세 개의 목차를 안고 있습니다.
고교시절 즈음에 해당되는 어린 날의 방황과 외로움을 다룬 <하구河口> 대학시절의  방황과 추억담들을 다룬 <우리 기쁜 젊은 날> 마지막으로 외로움과 허무의 정체를 알아보고자 떠난 여행을 다룬 <그해 겨울>입니다.

1. 하구

고교 중퇴로 더 일그러진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초조함과 비애의 느낌으로 책은 시작해요.
 

[ 나는 그 편지에서 우선 목적 없는 내 떠돌이 생활의 쓰라림과 서글픔을 은근히 과장하고,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 나이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과는 달리 정말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p. 10) ]



그리고 형에게로 돌아가 검정고시와 대학진학이라는 목표를 정해놓은 후의 삶도
외로움과 방황을 달래주기는 힘들었나 봅니다.


[ 추억하기조차 가슴이 서늘한 강진의 풍경 중의 하나는 그런 불면의 밤 내가 늦도록 배회하던 갯가의 둑길이다. 으스름한 달빛과 안개 자욱한 포구, 끝없이 출렁이는 갈대의 바다와 그 위를 스쳐가는 바람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구성진 울음소리......나는 그러한 것들 사이를 마치 몽유병자처럼 늦도록 거닐었다. 그리고 그때 나를 지배하는 것은 어두운 방안에서의 번민과 고뇌 대신 울고 싶도록 철저한 외로움이었다. (p. 23) ]


덜 익은 첫사랑 이야기와 이념대결의 연좌제 같은 얘기들이 곁가지를 치고 있기는 하지만 주된 내용은 외로움, 허무, 갈구, 방황 이라고 생각합니다. 갖고 있어야할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안한 맘으로 찾기는 하는데, 무얼 잃은 지도 모르는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 불안과 결핍은 대학에 가서는 어찌될까요?

2. 우리 기쁜 젊은 날

다행히 '하가'와 '김형'이라는 맘 맞는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아는 바보' 가 되어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죠. 그들과 독서 술판 토론을 하면서 나름의 재미있는 생활을 합니다.그리고 김형의 추천으로 문학회에서 나름의 인정을 받게 되죠.


[ 시처럼 힘들이지 않아도 나는 곧잘 합평회의 갈채를 받았고, 때로는 동인지나 교지에까지 실려 처음으로 활자화된 내 글을 보는 감격도 맛보았다. 그때껏 과정으로서의 삶만 살아온 내게는 처음 경험하는 존재의 외부적 승인이었으며, 초라하나마 성취의 희열이었다. (p. 86) ]


이런 행복도 꼬아보는 시선과 뒤틀린 성격으로 스스로 내치게 됩니다.
결국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하면서 그것뿐이면 너무 없어 보일 것만 같은 알기 힘든 고고함이 충돌하는 셈이지 싶습니다. 알기 힘든 그 고고함을 채워주는 것이 '앵벌이 소년과의 만남'정도가 될까요?
그리고 그 연장선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생각되네요.

3. 그해 겨울

강원도로 무작정 떠나서 '광부'가 되길 했으나 무너지는 갱도를 보고는 그만 두고, 작은 고깃배의 선원이 되고자 했으나 거절당합니다. 허락받았어도 무서웠을 겁니다. 그렇게 흘러 흘러 작은 요정이자 여관인 곳에서 허드렛일을 해봅니다.
 
고교시절부터 막연히 찾고자 했던 것.
마음 속 비어있는 그 무언가를 그렇게 찾고자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면서 타협하는 걸로 보입니다.


[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었으며 구원이었다. (p. 213) ]



책의 마지막장이 찢겨있어 결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한 장이 아무리 극적이라도 <그해 겨울>의 첫 부분을 보면 주인공 영우는 그냥 그렇게 타협하고 여전히 마음속은 비어있을 거라는 제 생각이 맞을 듯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빈 부분을 복잡한 일상과 감정, 추억들로 메우고 덮으며 살아가겠죠.

첫 부분이 이렇거든요.


[ 이제 그 겨울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미 한 가정을 거느렸고, 매일 매일 점잖은 복장과 성실한 표정으로 나가야 할 직장도 있다. 또 나이는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어 감정은 많은 여과를 거쳐야 하며, 과장과 곡필로 이루어진 미문(美文)의 부끄러움도 알게 되었다. (p. 170) ]


열정, 이상, 꿈, 희망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사는 삶을 하찮게 여길 수 없습니다. 외려 존경하는 쪽입니다. 특히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는 삶은 더욱더 존경하지요. 그리고 정답을 찾지 못해도 젊은 날의 치열한 방황과 고민도 역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말에 저까지 허무한 이유는 뭘까요.
아직 그의 고교시절만큼이나 이룬 것이 없는 것도 이유겠지요.
다른 사람의 눈병을 옮아 그 사람의 눈병이 낫는다는 속설처럼. 영우를 정상인으로 낫게 하고자 그의 허무를 떠안은 것만 같아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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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이문열

1. 유다의 죄는 무엇입니까?

다니던 교회의 어느 동생이 목회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책에서 '아하스 페르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도 진실로 카인의 죄를 믿으십니까?


두 질문이 유사합니다.
모든 것이 전지전능하신 신의 계획과 예정대로라면 유다와 카인은 신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 죄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자유의지'로 선을 지키고 악을 행하지 말았어야 한다면 '자유의지'로 인해서 신의 예정은 변경될 수도 있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의문은 '그의 부정(否定)은 확신하고 긍정하기 위함(p. 75)' 입니다.
그런데 전 어지러운 논리는 질색함으로 답을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답을 알지 못함으로 아직도 어지럽기도 합니다.

2.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 '아하스 페르츠'는 종교적 교의를 이해하고자 여행을 떠납니다.
이집트의 이시스와 호루스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 고통 받으며 무력하게 죽어가는 신의 모습을. 가나안지방에서 바알신의 농경신적 요소를 흡입했음을, 바빌론에서 천지창조와 아다파왕의 생명의 식물, 지아스투라의 홍수를 봅니다. 아래에 인용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원래 야훼는 엘 사따이산에 은거하던 목양자의 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모세의 광기가 접한 호렙산의 영이 더해져  야훼는 곧 가나안의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군신으로 변질되었다. 그 뒤 엘리야와 호세아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부여했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 페르샤인들의 사탄과 종말론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야훼는 완성되었다.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을 뿐이다. (p. 169) ]


10년에 걸친 종교공부를 위한 여행과 철학의 공부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을 이기지 못한 이유로 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로 '아하스 페르츠'는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믿는 신을 만나게 됩니다.

3. 요즘 드는 의문

그가 믿는 신은 예수를 땅에 보낸 신과는 다르기에 그는 예수와 일곱 차례 논쟁을 합니다.
그 중에서 제가 요즘 가장 의문이었던 물음이 있어서 인용해 봅니다.


[ 그 다음에 당신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셨소, 보복하지 말라 하셨으며,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소.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마저 내놓고 속옷을 달라거든 겉옷까지 주며, 오 리를 가자거든 십 리를 가 주라 하셨소. 진실로 묻거니와, 도대체 당신은 그 모든 가르침의 실천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인간의 창조자 오직 당신 아버지의 선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시오? 그러나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난 자 중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따라 출발할 것이지만 결코 아무도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 나머지 -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 교훈은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오. 비록 당신으로 하여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오. (p. 202) ]


계명들이 지켜져서 지상낙원이 세워지는 것에는 반대할 사람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런 계명들은 '삼청교육대'가 범죄를 일소할 것이라고 믿는 것 만큼이나 요원해 보입니다.

4. 기독교의 변신론

그리고 해설에 보니 기독교의 변신론(辯神論-theodicy)을 얘기하네요.


[ 고통, 죄악, 죽음 등과 같은 현상들은 언제나 기존 질서의 재편성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힘이 된다. 이러한 위협들을 종교적 정당화의 견지에서 해소하여 기존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한 논리를 변신론이라고 한다.

변신론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인간들의 매저키즘적 속성이다. 인간은 자신의 불안과 욕구를 타인에게 의탁하고자 하는 자기 부정의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자기 부정적인 의탁을 가장 확실하게 받아 주는 타자가 바로 신이다.
신은 인간에 대해서 <전체적인 타자他者-Totaliter aliter)>로 가정된다. 인간은 전체적 타자에게 자기 부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의탁을 함으로서 오히려 심리적 안정과 희열을 얻는다. <나는 하찮은 존재이고 신은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신 안에 나의 궁극적인 지복이 있다> 라는 표현 속에서 매저키즘적 태도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매저키즘적 의탁은 신의 경험 불가능성에 의해 더욱 고양된다. 신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일 때 더욱 완벽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묵시적인 비난은 오히려 그 인간에 대한 명시적 정죄로 전도되고, 신의 정의에 대한 회의는 오히려 그 인간의 죄에 대한 물음으로 전도된다. 기독교에서 강하게 내세우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함,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음 등등은 모두 인간의 매저키즘적 속성을 정교하게 이용하는 변신론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도 인간의 고통을 합리화시키는 중요한 변신론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곧 인간들의 고통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기독교에서 말하는 낙원회복의 약속, 즉 메시아주의나 천년왕국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인간의 죄악과 고통을 구원해 주시지 않는가라는 경험적 반증에 대하여 기독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미래에 그 낙원을 설정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에 찬 불만을 눌러버린다. 이러한 변신론을 통하여 종교는 현실적 위협으로부터 자체의 존립을 보호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신론은 중요한 사회적 기능도 담당한다.
즉 사회에 편재해 있는 온갖 특권과 불평등과 고통을 합리화시켜 주는 것이다. 종교적 교리는 부당한 사회 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끔 강요하는 것이다. (p. 277) ]


이 이론의 완성도는 저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네요.
왜냐하면 제가 꼭 이렇습니다.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의지하고자 하고, 은총보다는 징계를 두려워하는 수준의 믿음이거든요. 극복해야겠지요.

믿기 위해 의심한다고 하면 대부분 교인들은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열 두 사도도 직업별로 믿는 방식이 제각기였다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위에 나열한 의문들과 이론들을 이론으로서 또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믿는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덧붙임 1 : 이문열 작가는 누구나 갖는 의문들(스쳐 지나갈 뿐이더라도)을 참으로 기막히게 포착하고 풀어나가는  능력이 있는 듯 합니다.

덧붙임 2 : 해설자는 "<사람의 아들>은 신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신을 부정해야 할 만큼 악화된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라고는 하지만 책 속의 비중을 생각해 볼 때는 그 이상의 비중이 있는 듯 여겨집니다.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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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지혜 2010.04.11 0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믿음..신앙.. ^^;
    저는 천주교입니다.
    삶 속에서 하늘을 느낄때가 분명 있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그 神...
    문제는 그 존재가 아니라 내가 과연 삶에 치열한가의 진지한 물음으로 치환하여 이해하려고 했습니다만,
    결국 다림쥐 쳇바퀴 뛰는 심정입니다.
    포스트 잘 읽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이문열 작가.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 로처 2010.04.13 1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방문 감사드립니다.
      블로그 주소라도 남겨주시면 인사도 드리고 윤지혜님 글도 읽어보고 할텐데 아쉽네요.

      제가 쓴 글은 치기어린 투정에 가까워서 민망하기도 합니다. 결국엔 저는 믿음을 버리긴 어렵습니다. 조그마하고 내세울 것 없는 믿음이지만요 그래서 투정도 자주 부립니다. 다시 방문 감사드립니다.

  2. 브래드피트 2012.03.01 2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의 영역을 분석하려드는 것 자체가 신이 볼 때는 교만아닐까요?
    용서라는 것은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만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런 분들을 많이 본 것처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놀랐습니다.
졸업 후 지난 세월만큼의 기억들로 덮어 둔 학창시절의 정서를 어쩌면 그리고 정확히 짚어서 끄집어내는지요. 영화가 워낙 좋아서 책을 읽어봤습니다.


[ 벌써 30년이 다 돼 가지만, 그해 봄에서 가을까지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때처럼 막막하고 암담해진다. 어쩌면 그런 싸움이야말로 우리 살이가 흔히 빠지게 되는 어떤 상태이고, 그래서 실은 아직도 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p.11) ]


병태가 떠올리는 암담한 추억의 느낌으로 이렇게 소설은 시작합니다.

1. 불편한 질서

'자유당 정권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 해 3월' 서울에서 전학 온 깍쟁이 한병태는 시골학교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크기와 선생님들부터 시작해서 주먹으로 또는 최선생이 위임한 전권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급장 엄석대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엄석대에게 당하면서도 반항 없이 복종하는 아이들의 태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생활은 나름의 '불편한 질서' 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빼앗기거나 먹을 것을 바쳐야 함에도 반항 없이 무조건 복종합니다. 부당함이나 복종의 굴욕은 무서움으로 봉쇄되었고 그렇게 습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나름의 질서가 됩니다. 그 질서는 엄석대를 정점으로 주먹과 공납으로 정해진 서열이 있어 다툼이 없습니다. 청소나 실습에서 엄석대의 무서움으로 늘 1등 반이 됩니다. 모든 것을 엄석대에게 맡기고 그에게만 복종하면 되는 나름 편해 보이는 질서입니다.
마침내 아이들은 그 질서를 편안해하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 "급장이 부르면 다야?"  "급장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서 대령해야 하느냐구?"
그래도 나는 서울내기다운 강단으로 마지막 저항을 해 보았다.
그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말이 떨어지자마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댔다.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듯 (p. 29)]



한병태는 이 불편한 질서에 뻗대며 반항합니다.
'자유'니 '합리'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를 이해하고 지키고자 함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곧 닥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함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2. 질서에 합류

엄석대반의 완벽한 질서에 버둥거리며 반항하지만, 병태의 힘은 약하기만 하고 조력자도
찾을 수 없어 외롭기만 합니다. 결국 오기와 증오로 버티던 병태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질서에 합류한 병태는 학교성적과 주먹의 서열이 다시 올라가 제자리를 찾습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 동무들과도 어울리게 됐고요. 적극적으로 엄석대를 찬양하거나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전학 왔을 때만 해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아이들과 똑같아 졌습니다.

3. 질서의 붕괴

6학년이 되어 새로운 젊은 김선생은 결국 답안지 바꿔치기를 비롯한 엄석대의 비리를 알게 되고, 엄석대의 질서는 끝이 납니다. 회의의 원활한 진행이 이뤄지지 않을 때와 협동 작업에서 내빼는 아이들을 볼 때 석대시대의 질서가 주는 편의와 효용성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작은 석대의 질서는 무너졌지만, 세상의 질서에 무력한 개인의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 나는 급했다. 그때 이미 내 관심은 그런 성공의 마뜩치 못한 과정이나 그걸 가능하게 한 사회구조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과일 쪽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나도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p. 201) ]


4. '조지 오웰'보다는 '위화'에 가까운

그저 아이들의 얘기일 뿐일 수도, 다른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조지오웰이 정치적 의사표현의 도구로 우화를 사용했던 <동물농장>처럼 볼 수도 있겠죠.
특히 6학년 담임인 김선생이 아이들을 혼내는 장면에서는 더 그렇게 보이죠. 아래처럼요.
 

[ 너희들은 당연한 너희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것도 한 학급의 우등생인 녀석들이...... 만약 너희들이 계속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맛보게 될 아픔은 오늘 내게 맞은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런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모두 교단 위에 손들고 꿇어앉아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반성하도록 (p. 160) ]



그러나 이 책이 독재정권이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아이들의 세계에도 어른들의 세계에도 있는 질서 앞에서 무력한 개인의 모습, 그리고
질서의 당부를 따지기보다는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앉고 싶어 하는 개인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난 아니라고 자신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비난하기도 쉽지 않은
그런 모습을 말이죠.

P.S 인용한 페이지는 민음사 출판의 <이문열 포토로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페이지수 입니다. 다림출판의 페이지와는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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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Q&A) - 비카스 스와루프


시크교 대표가 불참했기에 그나마 줄어든 이름 '람 모하마드 토마스' 가 등장합니다.
이런 독특한 이름을 갖게 된 그 날의 이야기부터 웃음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을 즈음에 웃음은 가라앉고 이름만큼 너울거리는 일상을 살았던 사람만
남습니다.

그는 "나 같이만 살아라." 하며 책을 낼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독백대로 '바보 같은 고야 녀석' 일 뿐이고, '학교도 못 다닌 웨이터' 일 뿐 입니다. 그는 화장실에서 냄새보다는 엉덩이 걱정을 해아 하는 지역에 주로 살고요, 배가 고프면 맥도널드의 쓰레기통을 뒤질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연고 없는 결혼식장에서 음식을 먹다가 양쪽의 가족들에게 몰매를 맞는 친구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엉터리 가이드 생활로 돈벌이하는 능글맞음도 있어요. 그리고 나라에서 제일 힘 셀 것만 같은 경찰을 무서워합니다.

이런 그도 가진 것이 있는데요.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그것은 그의 굳은 '심지' 입니다.
그 사람의 '바보 같은 고아 녀석에 불과했으니까.' 라는 독백은 자책하는 듯 하지만
전혀 움츠러들지 않습니다. 테일러 대령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이 지겨운 인도 놈들!"
이란 말을 들어도 작아지지 않습니다. 소년원에서 본 영화의 환상에 스스로 취하지도 않고,
그렇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여유마저 있지요.
그는 '살림'을 친동생처럼 보살피고, '구디야'를 불쌍히 여겨 돕습니다.
영화배우 '닐리마'를 도우려 애썼으며. '니타'를 사랑하고, '샹카르'의 죽음을 진정 슬퍼합니다.

'연꽃' 생각이 나지 않으세요?
저는 연꽃 생각이 나네요.
연꽃의 미덕은 여럿 들 수 있겠지요.
아름다움과 여러 가지의 쓰임새, 그리고 진창에서 꽃을 피운다는 점, 등이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본 연꽃의 미덕은요.
진창임에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컫는 '진창'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진창을 '용이 벗어나야만 하는 개천'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요, '더럽지만 참아준다.' 고 생각하며 고행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경험으로 체험해보자.'는 것도 물론 아니죠. 그냥 살아가는 거겠죠.
아래에 '진창'에 대한 '연꽃'의 생각이라 여겨지는 부분은 인용함으로 글을 마칩니다.


[ 우리는 짐승처럼 살다가 벌레처럼 죽어갔다.
전국에서 몰려든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빈민가에서 한 줌의 하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끊임 없이 다투었다. 한 뼘의 땅, 한 양동이의 물을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싸움이 때로는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비하르, 우타르프라데시, 타밀나두, 구자라트의 낙후지역 사람들이 다라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부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중산층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황금의 도시 뭄바이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 황금은 납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가슴이 멍들고 병들대로 병든 낙오자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나처럼! (p. 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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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reenbea 2009.10.07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읽으시면서 연꽃을 생각하셨군요.

    음..저는 연휴 때 추리소설을 읽었는데..
    정작 읽고 싶은 건 못 읽었네요.

    +) 저도 트랙백 걸고 갑니다 ! ^_^

    • 로처 2009.10.07 19: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고보니 전 추리소설이라고는 홈즈 시리즈 몇 권 읽은 게 전부네요. 구경가야겠습니다. ^______________^

      트랙백도 감사합니다.



 1984 - 조지 오웰

1.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담배나 초콜릿뿐만 아니라 식량의 배급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 '오세아니아'의 런던에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쌍방향 화상 장치가 곳곳에 - 심지어는 집안 까지- 설치되어 있고, 어린이들을 '스파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의 고발자가 되도록 교육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 조심해야 하고, 성을 내건 웃음을 짓건 주위와 같이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의심받으면 어김없이 사람이 '증발'하기에 끝이 올 때까지는 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적국과 '골드스타인'에 대한 타협 없고 대책 없는 증오를 키워가는 나라이고, 당의 완전무결함을 위해 통계와 역사를 수시로 조작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전체주의사회의 모습이기도, 독재정권아래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도 관제시위를 조장하고, 권력자 비판은 쉬쉬해야 했고, 인혁당사건처럼 사람이 '증발'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 인권상황 운운하기엔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들죠.

아무튼 이 초국가 '오세아니아'에 구호가 있습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 중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구호의 내용을 요약하고 인용해 볼게요.

2. 전쟁은 평화

초국가 세 나라(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고, 자족하기에 충분하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경제적 요인은 노동력에 국한되는 상황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전쟁인 셈이죠. 그리고 전쟁은 국지전 양상으로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합니다.

이런 전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삼국 모두가 전쟁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물질적 이유로 전쟁은 잉여생산물을 소비함으로 '부'가 하급계층에게 돌아감으로 그들에게 생활의 여유가 생기고 그것이 교육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함 입니다. 즉, 계층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전쟁으로 궁핍을 필연화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신적 이유로 긴장과 공포, 증오로 내부결속을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계속되는 전쟁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현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평화는 그들만의 '평안'을 말함이죠.


[ 옛날의 전쟁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전쟁은 한낱 협잡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서로 해칠 수 없도록 뿔이 엉뚱하게 나 있는 반추동물의 싸움과 같다. 그러나 전쟁이 비현실적이라 해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전쟁은 잉여 소비재를 소비시키고 계층적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독특한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뒤에 가서 서술하겠지만 전쟁은 이제 단순한 국내 문제일 뿐이다.

<중략>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지배자들은 서로간의 전쟁은 하지 않는다.
전쟁은 이제 지배 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도 영토의 정복이나 방어가 아니라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있다. (p. 278) ]


3. 무지는 힘


[ 상층계급은 오랜 기간 권력을 안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만간 신뢰나 효율적인 통치 능력 중 한 가지를 잃거나 두 가지를 다 잃어버리는 순간이 그들에게 닥친다. 그러면 중간계급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하층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상층계급을 전복시킨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하층계급을 다시 옛날의 노예 신분으로 전락시키고 스스로 상층계급이 된다. 이때 새로운 중간 계급은 다른 두 계급 중 하나에서 분리되거나 양쪽 계급에서 분리되어 나오는데, 이로 인해 투쟁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이 세 계급 중에서 하층계급만이 단 한 순간도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중략>

하층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변화란 그들의 주인이 바뀌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p. 282) ]



4. 사람만이 희망일까

스파이단의 일원이 된 자녀들이 부모를 고발케하여 가정을 무너뜨리고, 획일화된 증오에서
낙오되면 '증발'할 위험이 커지는 살벌한 사회, 그리고 당의 완전무결함을 위해 과거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사회에서 '윈스턴'은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저는 지금 우리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라며 말하는 '줄리아'와 사랑에 빠집니다.

전에도 사회에 대한 의문과 불만이 있던 그였지만 이제는 기계가 만든 음악을 멋지게 부르는 아주머니를 새롭게 바라보고, 당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한 너무도 인간적인 노동자들을 경멸하지 않게 되고 희망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 DAUM 영화>



영화 <아일랜드>에서 통제되고 남을 위해 죽을 운명에 있는 주인공 남녀는 버그(Bug)가 되어서 그들의 운명과 사랑을 쟁취했습니다. 이 책의 '윈스턴'과 '줄리아'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등불이 될까요?
아니면 그들만이라도 사랑과 생의 쟁취에 성공할까요?

덧 : 왜 평등을 지양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가장 중요하다고하면서 설명이 돼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윈스턴은 '방법은 알지만 이유를 모른다.'고 하는데요 구호들의 설명을 미루어볼 때 계층질서의 유지를 통한 현재체제의 유지가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봅니다.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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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Lord of the Flies) - 윌리엄 골딩


전쟁이 만연할 때에, 피난가던 비행기에 타고 있던 소년들이 무인도에 고립되면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뿔뿔이 흩어져있는 소년들은 생존을 위해, 기대려고 다시 모였습니다. 그리고 몸에 밴 규율을 정하며 어른의 사회를 흉내 냅니다. 리더의 권부인 '소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선출된 대장 '랠프'를 중심으로 구조를 위한 봉화를 준비하고, 오두막을 짓고, 화장실을
지정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안정을 찾은 듯 보입니다.

그러던 중에 꼬마들의 공상 속에서부터 '짐승'에 대한 공포가 떠돕니다.
'랠프'는 꿈일 뿐이라고 일축하지만 '공포'는 소년들의 주위를 맴 돕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툼이 발생합니다. 서로 기대고 모이는 것이 본성이라면, 다툼 역시 본능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며 안정적인 생활을 지도해왔던 '랠프'와 대장자리를 뺏으려는 '잭'과의 분열이 시작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소라'의 권위가 그렇게 오래 지속된 것이 외려 신기할 지경입니다. 잭은 소라 대신에 사냥의 오락과 고기의 맛으로 소년들을 모아 대장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랠프'와 대립하면서 대장의 힘을 바랐던 '잭'은 사냥을 통해 그 힘에 근접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색칠을 통해 '가면'을 쓴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랠프의 의장 같은 대장이 아닌 살벌한 전쟁 통의 군인 같은 대장으로 변합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괴물'의 실체를 알리려던 '사이먼'과 늘 이성적으로 말하던 '돼지'는 그들의 폭력으로 죽음에 이릅니다. 혼자가 된 '랠프'와 그를 쫓는 소년의 무리들간의 추격전의 긴박함은 '어른 해군'의 등장으로 구원의 빛을 찾으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소년들의 잔인한 폭력에 모든 감상을 뺏겼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생존의 욕구(본능)'이 규율(도덕, 종교, 제도)에 우선한다는 사실이 마음 가까이로 다가오더라고요. 저의 불완전한 이해와 감상으로 끝낼 수가 없기에 해설을 인용함으로 글을 마치렵니다.

<해설>을 보니 앙케이트에서 골딩은 <파리대왕>의 주제를 아래처럼 말했다네요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사회의 형태는 개인의 윤리적 성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외관상 아무리 논리적이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정치체제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모랄이다. 마지막의 구조되는 장면을 제외하고선 전편이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어른의  세계가 의젓하고 능력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섬에서의 어린이들의 상징적 생활과 똑같은 악으로 얽혀 있다. 장교는 사람 사냥을 멈추게 한 후 어린이들을 순양함에 태워 섬에서 데려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 순양함은 이내 똑같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그 적을 사냥질할 것이다. 어른과 어른의 순양함은 누가 구조해 줄 것인가?> (p. 320)



그리고 제가 '생존의 욕구'라고 막연하게 느낀 것을 '엡스타인'은 '이드(Id)라고 말하고 있네요.


[ 골딩의 베엘제버브는 무질서하고 도덕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사납게 휘몰아치는 <이드(Id)>에 해당하는 시쳇말이다. 이 이드의 유일한 기능은 기숙하고 있는 주인의 생명을 보증해 주는 것인데, 이 기능을 <이드>는 무서울 만큼 일편단심으로 집요하게 수행한다. 이 힘을 우리는 여러 가지로 부를 수가 있겠지만 신학자가 그렸건 정신분석학자가 그렸건 현대인이 그려낸 인간의 초상화는 이 힘이랄까 심령구조를 영락없이 <자연인>의 근본 원리로 포함시켜 놓고 있다. 문명의 교리, 도덕률, 사회적 관습, 자아(Ego), 그리고 지성 자체도 이 작렬하고 제어할 수 없는 힘, 즉 <인간성의 사나움과 수렁>을 가리고 있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이 근원적인 숨은 사나움이 나타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p.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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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이호 2009.09.28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의 생존 본능은 무섭죠.... 고전들을 보면, 특히 근대문학기의 소설들을 보면 그런 인간의 면모가 무섭도록 잘 표현되어 있는것 같아요.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더군요...

    • 로처 2009.09.28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근대문학기의 소설에 자주 나타나는가 보네요.
      좋은 것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프카의 '변신' 읽어봐야겠어요.


동물농장 - 조지 오웰

<잉글랜드의 짐승들>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런 세상을 꿈꾸던 동물들은 '메이저'가 말한
'반란'을 예상외로 쉽게 성공합니다. 압제와 착취의 손에서 벗어나 모두가 평등한 농장이 되길 바라며 동물들은 계명을 정합니다. 정확하게는 영리한 돼지들이 정하고 다른 동물들은 동의하는 정도죠.


일곱 계명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p. 26)


그런데 우유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것을 시작으로 삐걱대기 시작합니다.
나폴레옹이 강아지를 몰래 교육시킵니다.
반대자 스노볼은 축출되고, '회의'는 폐지됩니다.
인간과 거래를 트기 시작하고, 침대에서 자는 동물이 생겨나고, 동물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해서 처음의 계명은 모르는 새 바뀝니다. 아래처럼요.


4계명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
6계명 어떤 동물도 '이유 없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반란'에 성공했고, 사람도 없는 농장에 다른 것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반대자들에게 으르렁대고, 처형하는 사나운 개들이요,
나폴레옹의 말을 반복해서 외쳐대는 양들이요,
동물들을 의심스런 통계와 몰래 바꾼 계명으로 설득하는 '스퀼러'요,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미니무스'요

결국 '복서'는 신념에 차서 기쁨으로 헌신하며 일하지만 몸뚱이 마저 팔리며 죽음을 맞이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이상하게 삶이 고달프고, 무언가 처음과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반란' 후에 또 다른 반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소설과 당시 소련의 현실과의 상관관계를 넘어서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권력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권력은 항상 부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을 읽는 것처럼 간단하면 좋을 텐데, 현실에서는 돼지는 머리가 너무 좋습니다.
어쩌면 돼지가 되고 싶은 마음 굴뚝인 저는 아는 바도, 정보의 접근성도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복서'같이 살면 모지즈에게 칭찬은 듣겠지만 억울할 테고요, 아직은 양들처럼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좋게 봐야 '벤자민' 정도의 미지근한 참여자 정도일 테지요.아래에 정리가 잘 된 <해설>의 부분을 인용해 봄으로 글을 정리합니다.


[ 우화로 읽었을 때의 <동물농장>은 특정의 풍자문맥과 연결된 <동물농장>과는 다른 의미론적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우화로서의 <동물농장>은 소비에트 체제라는, 한 시대의 권력형식만을 재현대상으로 하는 역사적 정치풍자의 수준을 넘어 '독재일반'에 대한 우의적 정치풍자로 넓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이를테면 나폴레옹은 반드시 스탈린을, 돼지들은 반드시 볼셰비키를 지시하는 것으로 파악될 필요가 없다. 부패한 독재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고 권력형 돼지들도 어느 시대에나 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은 모든 시대에 있을 수 있는 독재자의 알레고리이고 돼지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교활한 정예주의 권력집단의 알레고리이다.

<중략>


복서나 클로버 같은 우직하고 성실한 동물들도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로 제한되지 않는 광의의 피착취 대중을 포괄하는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다. 소비에트 체제의 역사적 실체가 소멸하고  없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동물농장>이 강한 적절성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정치사회의 권력 현실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항구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오웰이 그린 동물농장은 지금의 세계에도 있고 미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p.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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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밤의추억(Nightmemory) 2009.10.06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는 반복 된다고 하죠. 비슷한 역사가 반복될 때마다 아마도 이런 풍자적인 책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악기들의 도서관 - 김중혁

우리 고장의 도서관에서 김중혁 작가를 초청한다기에 읽어보았어요.
작가는 밤 새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강연 전에 읽고 싶은 맘은 굴뚝이고 시간은 모자라기에 밤 새 읽었죠.

단편 여덟 트랙으로 된 소설집입니다.
읽다보니 자꾸 이야기 속 인물을 작가와 동일시하게 되네요.
그리고 그 인물들이 제가 되기도 하고요. 그게 소설 읽는 재미겠죠.
읽으면서 표시해 두었던 부분을 강연 후에 다시 보니 영락없이 작가의 모습들이 보이고, 또
닮고 싶어 하는 제 모습도 보입니다. 이어지는 이런 저런 생각들도 있고요.


1. 뒷수습의 상상력


첫 문장을 써놓자 나머지 문장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매뉴얼을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 있던 문장들이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나타나는 거 같다. 매뉴얼을 쓴다는 것은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문장 위에 덮인 먼지를 조심스럽게 툭툭 털어내기만 하면 된다.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다.  (p. 46 <매뉴얼 제너레이션> 중에서)


강연회에서 작가가 한 말이 있어요.
'뒷수습의 상상력' 첫 문장을 써놓고, 연이어 수습을 하다보면 어느 새 소설이 완성되노
라고 하시네요. 그럼 위에 인용한 부분은 어김없이 작가의 경험이네요.


2.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악기들의 도서관>의 첫 문장입니다.
제가 요즘 느끼는 바를 콕 찌르는 문장이라 되뇌어 봐요. 처해있는 상황이나 지위 책임이 각각 달라도, 저 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돌이켜 후회하고 아쉬워하며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문장 아닌가 싶습니다.

마침 제가 즐겨듣던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에도 비슷한 의미의 가사가 있어요.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중에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악기들의 도서관>
그리고'몸속에 저장해뒀던 돌덩이를 내려놓기 위해'
'아직은 무른 내 손가락 끝'을 여물게 해야겠습니다. <나와 B>


3. 침 흘리며 공상하듯, 휘적거리며 악몽을 꾸듯

<무방향버스>에서는 끔찍한 악몽을 꾸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릴 적부터 머리가 다 커버린 지금까지 무서운 일입니다. 생각하기 싫은데 가끔 머리에 떠오를 때면 그렇게 끔찍할 수 없어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을 때처럼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긴장하고 있는데 '무방향버스'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아! 꿈이구나.' 싶습니다.


4. 5 Cm 공중부양의 SF작가

제가 강연회에서 제대로 들었다면 작가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음에도 확언하지는 못하겠지만요. 8개의 단편소설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위의 표현이 참 기막힐 정도로 어울립니다.

저는 8개 트랙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톡톡 튀는 소재의 소리를 들었어요<매뉴얼 제너레이션>
침울함 속에서 웃음소리를 듣고요 <유리 방패>
어긋날 수도 있는 목표를 삶에 끼워 맞추는 소리 <악기들의 도서관>
그리고 무서운 꿈을 깨우는 "밥 먹어라." 하시는 엄마의 소리도 들었습니다. <무방향버스>

이제는 <펭귄뉴스> 읽어봐야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연회 후 사인해주시는 김중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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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밤의추억(Nightmemory) 2009.10.06 2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것은 억울하다'를 읽으니 버나드 쇼의 비문에 적혀있는 '우물쭈물하다가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라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저에게는 참 마음에 와 닿는 글귀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으면 너무 억울하니까요.

    • 로처 2009.10.07 1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억울할것 같습니다.

      전 같은 맥락으로 가정을 이룬 친구들이 부럽더라고요.
      역사에 길이남을 무언가를 남기지 않아도 세상의 맥을 잇는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으니까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신경림 에세이

제목부터 구수해서 인터넷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읽고 싶었던 책이었죠.
읽기 시작해서는 재미있는 내용이었지만 한 호흡으로 읽어내기엔 쉼표가 많은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쉼표가 많다는 것은 제가 읽다가 덮어두고 스스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게 하기도 하고, 한 숨도 쉬어가며 읽었다는 것을 말함이에요.
 
이 책을 보시면 크게 두 부로 나누어져있어요.


1 부는 신경림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다니던 초등학교시절 이야기 말예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와지마' 순사가 해방 후에 정주임이라는 이름으로 경찰노릇을 했다는 추억, 제일 먼저 맞아 죽을 것 같다던 교장은 해방 후 국수주의 교장이 되었다가 문교부차관에서 국회의원 까지 지내더라는 씁쓸한 추억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기를 못해 맨날 꼴찌만 한다고 '맨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실실 웃게 만드는
추억들도 있지요.

작가의 추억담들 가운데 선생님에 대한 기억들도 제법 있는데요.
그 가운데 인상 깊었던 구절을 아래에 인용해 봅니다.


[ 이 선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 선거의 뒤치다꺼리를 우리가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거 연설은 대개 면내의 유일한 광장인 학교 운동장에서 했는데, 끝나고 나면 운동장은 버려진 유인물은 둘째로, 먹다 버린 음식물이며 배설물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것을 다 5, 6 학년 아이들이 청소해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선거 뒤에는 우리가 다니며 장터 여기저기 붙여진 벽보들을 떼고 닦았다.
이에 대해서 담임 앞에서 제일 먼저 불평을 제기한 것은 반장이었다. 담임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고만 대답했다.

우리는 의논 끝에 교장한테 직접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장터를 돌며 벽보를 떼다 말고 반장과 부반장이 앞장을 서고 교장한테로 몰려갔다.
 얼결에 얘기를 듣고 난 교장은 당황해서 뒤따라 들어온 담임을 향해 버럭 화부터 냈다.
'아니,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렇게 버릇없이 굴게 하는 거요! 면장과 지서장이 부탁해서 하는 건데 일 좀 한다고 아이들 어디 덧나요?' 담임이 내몰았기 때문에 우리
는 교실로 돌아왔지만, 이 일로 해서 담임은 지역 사회에서 싸가지 없는 교사로 평판이 돌았고, 선생들 사이에서도 저만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 왕따를 당했다는 후문이었다. (p. 124) ]



초중등학교에 다닐 적에 선생님의 전령 또는 수금원 역할에 불과했던 형식적인 반장에 비하면 아이들의 당돌함도 놀랍지만, 작가의 추억 속 선생이란 사람도 참 인상 깊었어요.
당시 사회나 교장의 지시에 대한 반발로 인해서인지, 사람이 순진하고 이상적이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적어도 아이들에게 꾸밈없이 솔직한 점이 좋아 보입니다.
물론 아이들하고 같은 수준으로 솔직하기만 한 것이 선생으로 모자란 점이 된다고 하시면
달리 반박하지는 못하겠지만요.


2 부는 작가가 만났던 작가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소설은 물론이고 시는 더더욱 읽지 않는 저로서는 모르는 이름의 작가도 많이 등장하죠.
추억 속 그들의 가난이 서글프기도 하고, 그들의 우정이 따뜻하고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가들의 생활담에 제가 느낀 감상은 '부러움'과 '혐오'의 짬뽕입니다.
고교시절만 하더라도 좋게 봤을지 모르지만 작가들의 경제적 무능에 거울을 보듯 느끼는
감정은 혐오이고요, 그럼에도 놓치지 않는 작가들의 자긍심이나 지조, 우정에 느끼는 감정은 부러움 입니다.
아래에 그 일화 중 하나를 짤막하게 인용해 봅니다.


[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는 취한 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간일도 여러 번 있다. 버스에서는 다리가 불편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그는 앉는 일이 없었다. 

<중략>

바로 집 앞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어, 집에 닿으면 그는 큰소리로 아이들을 불러내었다.
사 들고 들어온 과자 봉지를 내밀며 아이들 들으란 듯이 내게 말했다. '따로 정원이 있을
필요가 뭐 있어, 여기가 다 우리 정원인데.' 그러고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며 내게 인사를 시켰지만, 늘 술이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가 불만인 듯 아이들은 과자 봉지만 받아들고 들어가 버리고, 우리는 이웃한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오징어를 사다가 그의 정원 벤치에 앉아 마셨다. (p. 180 구자운 시인 편) ]



그리고 신경림 작가가 만난 작가들과의 일화들 중에서 이문구 작가의 일화를 특히나 기억해 두고 싶네요. 일화를 통해 본다면 이문구 작가는 말만 앞서는 얼치기가 아니기에 본 받고 싶어서 아래에 인용해 봅니다. 그리고 생소한 사투리와 단어때문에 읽기를 그만 둔 '관촌수필'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김지하 시인이 '오적'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을 때였다. 젊은 작가들 몇이 모여 데모를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처음 이문구는 극구 반대했다. 다 잡혀 가고 끌려갈 걸 뻔히 알면서 그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기로 결정이 나자 이문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피켓을 만들고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마침내 거사일이 되었다. 조태일은 막상 겁이 나서 한 삼십 분쯤 늦게 약속장소로 나갔다. 내심 데모가 끝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데 현장에는 이문구 혼자만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싸들고 나와 서 있더라는 것이다.

결국 그날의 데모는 모두들 한두 시간씩 늦게 나오는 바람에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말로만 진보주의를 내세우는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조태일의 이문구 평이었다.
이런 사람이었으므로, 70년대 중엽 진보적인 문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자유실천문협회를 만들었을 때 처음에는 글쟁이가 글을 써야지 무슨 단체를 만드느냐고 탐탁해하지 않던 그였지만, 일단 만들어진 뒤에는 조태일, 박태순과 등과 더불어 내내 가장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집회며 시위를 주도했다. (p. 214) ]




 

[ 1980년대 중엽 그가 한 신문에 전국을 도는 기행문을 연재하고 있을 때다. 벽초 홍명희의 출생지인 충북 괴산을 가게 되었다. 아직 '임꺽정'이 금서에 묶여 있을 때다. 그는 사진기자와 함께 벽초의 생가를 찾았고 벽초의 선영에 성모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낫을 하나 빌려 벌초까지 했다. 이것이 말썽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조차 빨갱이네 집이요, 무덤이라고 해서 피하는 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민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형사한테 그는 눈을 부라리고 호통을 쳤다.
벽초의 부친 홍범식이 금산 군수로 계시다가 일본의 강제 합병에 항의하여 자결한 사실을 알기나 하냐고, 그런 애국자의 산소가 잡초가 무성하게 그냥 두었으니 너희들이야말로 빨갱이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그의 기에 눌려 형사들도 그냥 물러가고 말았다. 이문구를 제쳐놓고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작가가 없다고 나는 단언했다. 이러니까 그는 북한의 체제를 비판할 자격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침내는 내 이 말까지 시빗거리가 되었고, 그의 선친이나 형의 얘기까지 끄집어내졌다. 그의 부친과 형은 6.25 당시 좌익으로 몰려 희생되었던 것이다. (p. 220) ]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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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방블르스 2009.09.26 1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참전에 이 책을 읽고 몇 자 적은 것을 공개를 안하고 있습니다.
    말씀처럼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진한 감동을 준다기 보다는 나를 돌아보고 살아온(얼마되진 않지만요...) 날들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갈 날을 돌아보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신경림 시인에 대해서는 농무의 시인과 시를 찾아서(?)만으로 알고 있던 분이지요.
    첵에서 제가 좋아하는 조태일과의 일화를 보고 다시금 그를 떠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덧_
    얼마전부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모두 읽기(사실 모으기가 먼저이지만요..)에 들어갔습니다. 리뷰 올리신 것을 보니 무척 부럽습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하였습니다.

    • 로처 2009.09.26 2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앗 벌써 읽으셨다니 리뷰 기다릴게요.
      쓰시면 냉큼 가서 트랙백 달아야지.

      제가 민음사판 세계문학을 조금씩 읽기 시작한 이유는요, 좋은 문학을 보는 눈이 없기에 공부차원에서 선택했어요. 다른 사람들의 안목과 평가에 기대어 제 스스로 선택의 어려움을 떠맡기는 면이 없지 않답니다.

      이 역시, 한방블루스님의 감상 기다릴게요.

  2. 밤의추억(Nightmemory) 2009.10.06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책은 좋은 것입니다. 로처님의 블로그를 오면 이런 저에겐 생소한 책들을 소개 받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 책은 제목부터 진짜 정겹군요. 순수문학의 소양이 없지만 찜해놓고 한 번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로처 2009.10.07 1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제목과 저자이름만으로 선택한 책이에요.

      학창시절 국사선생님과 국어선생님의 야사 듣기를 좋아하셨다면 그런 얘기 듣는 기분으로 읽으시면 재미있어요.

  

쿠오 바디스(Quo Vadis) - 헨릭 시엔키에비츠


10년 전 지금은 유물이 되어가고있는 비디오대여점에서 <쿼바디스>라는 테잎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뜻이라고 하는데 이 한 마디가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계추신자였던 저는 '오래된 영화'와 '뻔 한 내용'일거라는 생각에 보는 것을 미뤄두었습니다. 이제야 민음사의 책으로 읽어보았죠.

읽어보니 좋았습니다.
여전히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말은 저에게 울림을 줍니다.
저에겐 이렇게 들리거든요

'주여 제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주여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전히 응답은 들리지 않고, 절반 이상 포기한 상태인 저에게도 이 책은 충분히 좋았습니다.

역자인 최성은 교수는 이 책의 대결구도 중에서 로마의 전통사상과 새로운 신앙인 기독교사상의 대립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품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들을 페트로니우스와 그 외 등장인물들의 말을 인용함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1.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종교인가


[ 살인을 금하고 있으니 도둑질이나 사기, 위증도 허용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교리를 지키며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군. 그 종교는 스토아학파처럼 올바르게 죽어야 한다는 걸 가르칠 뿐 아니라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도 재산을 모아 이런 저택에서 이정도 숫자의 노예들을 부리고 살 수 있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군. 부자는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으니까. 덕을 쌓고 싶으면 덕도 쌓을 수 있겠지.....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그 종교는 부자들을 위한 것인데, 그렇게도 가난뱅이들이 신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덕이라는 이름으로 두 손을 묶어 놓는 것이 가난뱅이들한테 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1권 p. 306) - 킬로 킬로니데스의 독백 ]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공공연한 진리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비교적 깨끗한 사람들의 죄는 '준법'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법치주의'의 칼날아래 찢어발겨지고 잊지 말아야 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용서와 화합'을 들먹거리며 도닥이는 세상입니다.  부자들에게 면죄부를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세를 파는 꽤나 괜찮은 비즈니스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2. 기독교는 지키지 못할 교리로 사람을 억누르는가


[ 게다가 악을 선으로 갚고, 적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권고하는 교리는 군인 비니키우스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광기 속에는 여태까지 알고 있던 모든 철학을 능가하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광기가 내포되어 있으니 이 교리를 따를 수 없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권 p. 324)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비니키우스의 생각 ]



 

[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만약에 너희들의 형제가 너희에게 죄를 범하면 타일러라. 하지만 회개하면 용서하라. 가령 하루에 일곱 번 너희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용서를 빌며 돌아온다 해도 너희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그를 용서해 주어라."
(1권 p. 384) - 킬로는 글라우쿠스를 죽이려 했고 그의 처와 아이를 팔아넘겼다. 글라우쿠스에게 베드로가 권하는 말 ]



소설 속에서 또는 성인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 앞에서 무력합니다. 과연 누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할 수 있으며, 왼 뺨을 때리는 자에게 오른 뺨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인지상정이죠.
소설 속 '크리스푸스'처럼 약한 사람들을 죄인이라 윽박지르며 자신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목회자가 없기를 바랄 뿐 입니다.


3.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아직 내용을 모르시는 분을 위해 사기꾼 킬로의 부분을 인용하지는 않을게요.

지키기 힘든 교리, 따르기 어려운 명령은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용서도 자비도 사랑에서 연유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없는 사람, 눌린 사람, 슬픈 사람이 기독교에 끌리는 것도 사랑이 이유일 겁니다.

사랑하지 못해도 사랑받고 싶고,
용서하지 못해도 용서받고 싶고,
평안주지 못해도 평안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주기도문을 해 봅니다.

그리고 극 중의 네로같이 약함에서 오는 잔인함을 없이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크리스푸스처럼 정죄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베드로처럼 순교의 길을 걷고 싶지도 않으니 어찌합니까.
Quo Vadis Domine?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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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reenbea 2009.09.27 13: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들릅니다. ^^

    음..예전에
    어린이용 요약본으로 봐서, 위에처럼 깊이 있는 내용은 미처 보지 못했는데요.

    저도 일단 리스트에 추가를 해 놓아야 겠습니다. !!

  2. 밤의추억(Nightmemory) 2009.10.06 2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쿠오바디스를 아직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로처님과 비슷한 이유이지요. 명작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당장 눈앞에 끌리는 문구 당장 나에게 필요한 서적에만 눈이 가는 탓입니다. 아무래도 세속적인 것에서 눈을 정화할 필요가 느껴지는 요즈음 한 번 읽어줘야 할 책인 것 같습니다.

    • 로처 2009.10.07 1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거요거 재미있어요.
      근래에 드물게 강추하는 책입니다. ^___________^

      허나 제가 번역을 잘 몰라서요.
      번역이 더 잘된 책이 있다면 그걸 읽으시면 더 좋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