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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평전(민중신학자)-김남일인물, 평전, 전기 2008. 4. 9. 18:10반응형
"기억이란 흘러가 버린 과거의 재현이나 회상인 것만은 아니다.
현재 우리의 의무이며 다가올 미래의 기획이기도 하다."- p. 360 저자후기 중에서믿음도 고만고만하고,
신학은 고사하고 성경도 잘 모르고,
더구나, 민중신학은 관심의 대상일뿐 알지 못하는 이유로.
가슴벅차오르게 책은 읽었지만, 들려드릴 것이 없음에 답답합니다.
얼마 전 <정치교회>를 읽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답답함입니다.
그래도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남미의 민중신학과는 다르다는 그의 민중신학이,
-주류 신학자들로 부터 얼마나 비난 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성도들에게, 아니 적어도 저에게만큼은 소금이 되어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짠맛을 내겠느냐? 그러면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리니,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마태복음 5장 13절~15절 (표준새번역) -
저의 이해가 부족함에도,
그를 기억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고, 저 스스로의 정체성 형성의 밑그림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책의 본문 중에서 몇 구절 인용하고, 맘에 새기고자 합니다.
인용하고자 하는 것들은
1. 안병무 선생이 살아온 시대 설명 부분
2. 안병무 선생의 일화 조각들
3. 안병무 선생의 신학을 엿볼수 있는 부분들 입니다.
조각 조각 인용하는 것이 오해를 부를 수도 있음에 걱정이 되지만,
일단은 저의 기억을 위해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 제목 부분이 인용부분입니다. 소제목은 제가 임의로 붙임을 밝힙니다.# 1 해방 전의 간도 교회 (p. 55)
당시 간도에는 기독교 이외에도 천주교, 대종교, 천도교 등 각종 종교가 번성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가 안심입명의 역할과 더불어 배일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짙게 띤다. 하다못해 일제가 조종했던 시천교, 청림교, 공교회까지도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북간도에서는 이주 한인들의 종교운동을 독립운동, 교육운동, 사회운동 등과 서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민경배에 따르면, 간도의 기독교는 식민지시대 조선을 장악하고 있던 이른바 서북계 보수주의 기독교와는 큰 차별성을 보인다. 즉,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에는 유난히 중산층
기독교인이 많았고, 그들을 또 미국 동부 출신의 중산층 지식인 선교사들이 맡아 선교했다. 그들은 보수적이고 단일 근본주의 신학과 엄격한 청교도적 윤리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신학생의 외국 유학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인문계 지식이나 세속 학문의 기초적 소개에도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 결과 교역자의 후진성이라는 비극적 요소를 한국 교회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런 그들의 입장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기독교의 보수적 정통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 대부흥운동은 가령 '죄의 고백'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개신교도들의 죄인 정체성 형성에 주요한 제도적 장치로 작용하는데, 이는 가부장적이고 신화적인 성서해석을 통해 강력한 순종 이데올로기를 생산해 내고 특히 여성들을 소극적. 부정적 의미의 순종적 주체로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 호남지역에서는 기독교가 별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데, 워낙 가난한 소작농들이 많아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지주들의 핍박을 넘어서서 기독교에 입문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간도 기독교는 처음부터 민족주의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사실, 간도로 초기에 이주한 이들 중에는 분명한 민족의식을 지닌 지사적 인물들이 많다. 그런 목적의식 때문에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한계, 즉 봉건적 유교의식을 뛰어 넘어 "기독교는 곧 신학문이고 신학문은 곧 자주독립과 연결된다"며 기독교를 앞장서서 받아들인다. 문치정, 김약연, 구춘선, 강백규, 마진, 정재면 등이 대표적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우리는 간도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훗날 우리 민족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애쓴 많은 기독교인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용정에서 가까운 명동은 민족운동의 대표적인 근거지일뿐더러 문익환, 문동환 형제를 비롯해 많은 기독교 인물들을 배출해 낸 곳으로 유명하다.
은진에서 안병무는 문동환과 강원룡 등을 만나는데, 일찍이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까지 다녀온 장공 김재준이 그들 모두의 스승이었다. 문익환과 윤동주, 송몽규는 이미 학교를 떠난 선배들이었다. 안병무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큰 교회(동산교회) 새벽기도회를 통해서도 신앙의 동지들을 여럿 만난다. 장하구, 최봉삼, 장덕순, 도기순 등이 그들이다.
# 2 해방, 엑소더스 - 간도 (p. 63)
8월 15일, 용정에 갔다가 온 주민들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독립이 되었다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긴가민가하던 안병무는 용정으로 달려간다. 장하구를 만나 사실을 확인한 그는 모아산으로 돌아와 비로소 '해방'의 뜻을 나름대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해방의 주체는 누구인가. 넌가 난가. 아니다. 주변의 누구도 준비된 주체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해방군이 따로 있었다.
그때 간도에서는 소비에트 군대가 대일 선전포고(8월 9일)를 한 지 며칠 만에 해방군이 된다. 안병무는 지식인답게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지휘해 나간다. 이불 홑청을 뜯어 거기에 "소비에트 군대 만세!"라고 어디선가 주워 익힌 러시아어로 써서 신작로 한복판에 내건다.
과연 그들은 해방군다운 위용으로 진주해 온다.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하얀 한복을 깨끗이 차려 입고 나와 진심으로 그들을 환영한다. 그 기쁨은 해동갑에만 지속된다.
그날 밤, 해방군은 해방을 가져다 준 대가를 요구한다.
달빛 아래 그들은 성에 굶주린 야수로 탈바꿈한다. 총을 들이대며 여자들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중략>
용정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방기념 축제를 열기로 결정한다.
안병무는 연극 대본을 책임진다. 숨어 지내던 학병이 주동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다는 내용인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
용정의 일본 영사관을 접수한 채 스스로 '사령부'를 세운 일단의 세력 - 아직 정체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애국가를 금지하고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상용하는 것으로 보아 공산당 계열이 분명했다 - 안병무를 불러 다그친다.
"해방이 언제 조선인의 힘으로 이루어졌느냐? 해방은 전적으로 붉은 군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안병무는 젊은 혈기로 그 주장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들이 언제 우리를 위해 싸웠느냐. 그러다가 모욕도 당하고 결국 제목을 '분노'에서 '서광'으로 바꾼다. 내용도 완전 달라진다. 이미 해방 공간의 헤게모니는 '그들'의 손으로 넘어가 있는게 분명했다.
그들은 누구일까. 증언을 다시 들어 보자.
조선의용군이 진주하면서 하동 땅에는 전례 없던 사회대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동에는 고려인회가 해산되고 새로운 민주련맹이 건립되었으며 이전에는 고려인회 문 앞에 청천백일기나 태극기를 걸던 것이 붉은 기로 바뀌어졌다.
1946년 여름 이후 소련군은 만주 동북 지역에서 철수하고,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합작한 동북민주연군에 편입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용정의 '그들' 역시 '민주연맹' 정도의 단체 소속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중략>
마침내 해방은 청년 안병무에게 또 다른 족쇄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핬다.
"지주나 친일파는 물론이고, 평범한 사람들도 앞문으로 늑대를 쫓으니 뒷문으로 호랑이가 들어오는 경험을 하는 셈" 이었다.
# 3 해방, 서울에서 (p. 70)
서울 역시 이방인의 땅이었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동의어였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에서는 말 그대로 자본이 주인이다.
거기, 헌신하는 이타적 인간은 없었다. 협력과 상생, 공존과 이해의 가치는 다시 찾은 조국의 대지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사람들은 급했다. 급히, 서둘러 조국을 재건해야 했다. 그것이 준비하지 못한 자들의 변명이었다.
일본어가 물러간 자리를 한국어 대신 영어가 차지한다. 해방이 되었어도 모국어는 여전히 식민언어에 불과한 것. 역관이 없으면 신작로 하나 낼 수 없었다. 하위주체들은 미군을 통해 보급된 새로운 상전, 즉 물신(物神)을 모시기에 정신이 없었다.
# 4 한국 전쟁 (6.25) (p. 79)
안병무는 6월 23일부터 서울 자하문 밖 승가사 근처 한 수도원에서 일신회 동지들(장하구, 이영환, 이종완, 한철하, 홍창의)과 더불어 기도회를 하던 중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상황이 다급했다. 그들은 어떤 대책이나 약속도 없이 6월 26일 뿔뿔이 흩어진다. 안병무는 고민한다. 남을 것인가, 일단 피할 것인가.
<중략>
그는 자기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신도들을 어린 양인 듯 여겼다.
자신은 그들의 목자.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이 자기동일시가 마침내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 순간에는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다. 죽음은 순교자로서 새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환상이었는지 깨닫는 데에는 단 며칠이면 족했다.
서울은 이미 붉은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 보이나니 온통 붉은 깃발이요, '이승만 괴뢰도당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해방'을 찬양, 고무하는 구호들이다. 개중에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선전물도 있었다. 현실은 전혀 달랐다.
교회의 피아노는 서울 '해방' 이틀 만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예배는 야유와 난동 속에 중단된다.
결국 모든 교인이 지하로 잠적한다.
<중략>
그 피란길에서 안병무는 전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똑똑히 목격한다. 길가 논밭에서는 농민들이 전과 다름없이 일하면서 피란 가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에게 전쟁은 남의 일인 듯 보였다. 훗날 안병무는 사실 그 전쟁이 가진 자들의 전쟁이지 민중의 그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6.25 전쟁은 해방 후 5년간에 한국 안에 형성되어 가던 계급을 폭로한 날이기도 하다.
관변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돈푼이나 가진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고 힘없는 민중들과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서울에 남아 갖은 수난을 다 겪었다."
국가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독점할 때 한국전쟁은 '북괴의 잔악한 양민학살'과 같은 이미지로만 기술된다. 그러나 전쟁은 국가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지 않다. 농민이 물끄러미 바라 본 안병무의 기억 속에, 그리고 안병무가 다소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본 농민들의 기억 속에, 비록 여리지만, 전쟁은 국가가 강요하는 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진실로 살아남게 마련이다.
한국 현대사는 그런 개별적 진실들의 총화로 재구성되어야만 한다.
# 5 거친 들판에서 외치다 - '야성'의 출간 (p. 89)
"이제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대중은 안 따른다. 너무 속은 민중이라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오늘의 교인들은 교회를 냉소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과 함게 살면서 참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들은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동안 쌓아 온 신앙 훈련을 기반으로 새로운 신앙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평신도를 각성시키기 위해 각기 다른 교회에서 봉사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매주 한 차례 신흥교회에서 모임을 갖는다. 이것은 활동을 조율하고 각자의 활동 성과를 확인. 점검하는 자리로, 당연히 동지들만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이 집회가 지역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받아 모이는 숫자가 나날이 늘어 갔다.
전주에 온지 부로가 2개월 만인 1952년 1월에 이미 80여 명이 참석할 정도였다. 몇몇 동지들은 부흥집회에 강사로 초청받기도 했다. 대구 육군병원, 제주 한림과 같이 상당히 먼 지역이나, 남워노가 같이 빨치산 투쟁이 치열하여 누구도 가기를 꺼리는 위험지역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사도 바울처럼 '전도여행'을 다녔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잡지를 낸다.
제목은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을 생각하며 '야성(野聲)'이라고 짓는다.
안병무 개인의 사상 발전 단계에서 '야성'의 시기를 "세계의 악마적 구조로부터 분열된 내적 자아를 선택" 하는 시기로 규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때 "세계의 악마적 구조"를 대표하는 것은 물론 전쟁으로 여실히 그 정체를 드러낸 공산주의였다. 하지만 기독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는 전쟁을 통해 그 야만성이 넉나라하게 드러난 자본주의적 남한이나 공산주의적 북한의 비근대성을 지양할 기독교적 근대성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데 실상 교회는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기는커녕 자본주의의 퇴행성을 답습했고, 심지어 한국 근대국가 형성기의 부패한 국가의 주역의 하나였고, 저들의 그 야만적 폭력의 정치를 선도했다. 따라서 '야성'은 이렇듯 구조화된 악에 대해 거리를 두는
안병무의 '분열된 내적 자아'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6 독일유학중 (p. 131)
"서양은 모순 덩어리다. 철학과 종교를 함께 가짐이 모순이다. 그렇게 이성적인 이들이 법왕의 무오설을 내세우고 그 때문에 발을 핥는 게 모순이다.
신을 찬미하면서 실생활은 날로 유물적으로 흐르는 게 모순이다. 사랑의 종교를 가지고 전쟁을 준비하는 게 모순이다. 결국 제1모순은 저들이 성서를 유일한 경전으로 가진 것이 모순이다.
도대체 저들이 가진 성서가 그 대로 모순인 책인 것이다. (중략) 그 하나님 자체가 모순이다.
선악과를 만들어 세우고 먹지는 말라 하고 유혹의 악마를 보낸 모순의 주체이다."
안병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구를 비판하자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서구문명의, 특히 기독교에 뿌리를 둔 서구 문명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그 모순을 짚어 내지만,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라는 점도 잘 알았다.
왜냐하면 그 글에서 그는 또한 "유럽이란 그 생명이 그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더라. 오히려 모순이 동력이더라"라고 하여, 모순을 끊임없이 극복하고자 하는 변증법적 노력이 오늘의 유럽을 일구었음도 찾아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서구에서도 늘 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의 지도교수 보른캄도 "복음(진리)은 하나이나 역사적 상황은 각 민족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 진리를 자기의 역사적 조건과 대결시켜서 얻는 것이라야 자기를 살릴 수 있는 학문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 7 결혼 (p. 151)
안병무에게도 결혼은 중요한 계기가 된다.
결혼을 통해 사람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결혼 전 사람에 대해 자신이 지녔던 편견과 허영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만혼인데도 결혼 전에는 이성과의 접촉에서 어느 쪽에서 작동하건 어떤 기대 같은 것은 사람을 붕 뜨게 해서 사실을 직시하는 데 방해를 받았다. 그런데 결혼 후에는 그런 것이 깨끗이(?) 가시었다. 체념이라면 체념, 단념이라면 단념 따위가 작용한 그런 상태!
나에 대한 어떤 여자의 시선이나 행위 때문에 괜히 자신을 부풀게 하는 그런 붕 뜨는 것이 없어졌다.
'남자' 로부터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주고받는 것이 흐리게 보이지 않고 제대로 보이더라.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전기였다. 그것은 허영심이 제거되는 중요한 전기였다."
# 8 일화 - 검소, 물질 (p. 153)
물질에 대한 안병무의 인식은 한마디로 '개념이 없다'고 하는 게 옳을 터이다.
독일 유학 시절,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이따금 안병무를불러 설교를 청해 들었다. 그때마다 안병무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 생겼는데, 안병무는 그 돈을 다른 가난한 유학생에게 있는 대로 털어 주기도 했다. 그게 몇 천 마르크이든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은 다 꺼내 놓는 게 안병무였다고.
<중략>
넥타이 하나로 버틴다든지, 누가 준 새 양복을 어떻게 감히 입느냐고 남이 먼저 입다가 주면 좋겠다면서 내준다든지 하는 일화는 부지기수다.
안병무가 무슨 일로 독일에 얼마간 갔다 올 때 일이다. 마침 독일에서 제자 하나가 진주목걸이를 만들어 팔아 부자가 되었는데, 그가 안병무가 이미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진주목걸이를 선물한다. 그러자 이렇게 비싼 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제자도 만만치 않다. 안병무는 할 수 없이 진주목걸이를 꿴 고리만 달랑 떼어 가지고 귀국한다.
안병무는 공항에 마중 나온 박영숙에게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러더니 미아리쯤에서 선물이라고 그 진주목걸이용 고리를 건네준다.
# 9 <현존> 창간 (p. 156)
'현존'을 통해 안병무는 신학의 불모지인 한국 신학계와 교회 목회자들에게 한편으로 세계 신학의 동향을 소개하고 다른 한편으로 역사비평학에 의거한 성서해석 방법론을 소개했다. 이 잡지를 중심으로 성서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기독교 복음이 갖는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며 기독교 계몽운동을 펼쳐 나갔다.
안병무는 집요한 사람이다.
'야성'을 내던 때,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분투한 끝에 마침내 결실을 보았듯이, '야성'이 중단된 후에는 언제고 다시 그 뜻을 이어가리라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스스로 개인잡지라 부르는 '현존'을 내기로 하자, 이미 그 의미를 읽어 내고 장준하가 종로 뒷골목 어느 음식집으로 그를 불러 조촐하게 축하연으 베풀어 준다. 그때 장준하는 자신이 그토록 껴안고 몸부림치던 '사상계'가 거의 쓰러져 가는 상태였기에 더더욱 '현존'에 거는 기대가 컸으리라.
'현존'은 '야성'이 그랬듯, 그리고 앞으로 그가 창간할 다른 잡지들과 마찬가지로, 지식인으로서 안병무가 세상과 관계를 맺고 또 책임을 지는 한 중요한 형식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장준하의 '사상계'와 더불어 안병무의 '현존'이 당대의 억압적 정치 상황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 10 1970년 전태일 분신 (p. 159)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가 외친 목소리는, 그 생경한 목소리는 이내 광야를 불사르는 들불처럼 퍼져 나간다.
청계천 다락방 공장 한 구석에서 고작 미싱이나 돌리던 한 청년의 죽음일 뿐인데, 그리고 그의 죽음을 보도하는 것조차 악착같이 통제하는 손길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은 실로 컸다.
특히 지식인들이 받은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일기에서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다면"하고 쓴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대를 비롯해 각 대학이 시위 및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간다.
정부는 즉각 서울대에 무기한 휴교령을 발동했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금식기도회와 추모 예배가 이어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이란 게 우리 사회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1970년에 일어난 노동운동이 165 건인 데 반해, 1971년에는 1656건으로 확산되는 게 단적인 증거다. 아울러 기독교계에서는 1971년 9월에 수도권도시빈민선교회를 창설하고, 이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인권위원회도 두게 된다.
박정희 정권이 추구한 경제개발계획은 한마디로 '성장'을 모든 가치에 우선하여 밀어붙이는 정책이다.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자립경제의 기반을 일구는 것보다 중요했다.
그를 위해서는 구걸하다시피 한일청구권조약을 맺고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하여 피의 값으로 원시자본을 축적하고, 또한 농촌을 파괴해서라도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장성 갈재 너머 문경 새재 너머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떠난 노동자들은 '산업역군'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등골이 휘어갔다.
# 11 <역사와 증언> 출간 (p. 167)
이 책은 성서에 대한 신비화를 불식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청년들이 성서를 하나의 '고전'으로 대할 수 있도록 친절한, 그러면서도 독창적인 해석과 매우 깊이 있는 해석을 해 나간다.
안병무는 성서를 인류의 고전 중 하나로 대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고전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일이다. 고전은 그것을 가진 민족에게는 큰 보물이지만 자칫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가령 유대교가 성서를 율법으로 고착시켜 버렸을 때, 성서는 곧 재앙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의 재해석으로 폐쇄성을 뚫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고전으로서의 성서는 그것이 율법화되어 오히려 미래로 향하는 문을 차단해 버리는 망령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한다.
<중략> - 다윗 비행의 예
놀랍게도 안병무는 바로 그런 점에서 성서의 가장 큰 특징을 발견한다.
즉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범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도 저들의 역사가 세계 역사에 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그 비밀을 여는 열쇠라는 것. 왜냐하면 성서 안의 인간상은 완전무결하게 다듬어진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의 잡다한 요소들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안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나를 보고 내 안에서 성서 안의 인간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 안의 인간상과 역사가 수천 년 전에 생겼던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 안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것과 공동운명체임을 경험하게 한다.
# 12 10월 유신 (p. 195)
역사상 전무후무한 '유신'을 단행한다.
메이지유신의 그 유신!
이로써 일본 관동군 출신 박정희의 '근대' 인식이 지닌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최소한 한국어는 그의 거대한 구상을 실현시키는 데 전혀 유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유신헌법은 절대군주시대에나 가능했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것은 물론, 국민들에게는 무진장한 의무를 부과한다.
즉,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간선제를 수용할 의무, 그나마 그렇게 선출되는 대통령의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나고 연임 불가 조항이 폐지되어 한없이 그 대통령 밑에서 살다 죽을 의무, 견제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꼭두각시 국회를 멀거니 바라볼 의무, 사법권 독립을 요원한 희망을 갖고 기다릴 의무, 고문을 통한 자백에 근거한 처벌을 감내할 의무, 노동자 단체행동 금지의 의무, 온갖 침묵과 복종과 동원의 의무 등등. 한마디로 유신체제의 성립은
"곧 노골적인 폭력의 제도화를 의미했다. 이는 사회구조 전반에 걸친 왜곡과 억압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국민 개개인의 일상생활과 의식 구조에까지도 지대한 파급효과를 발휘"한다.
이어 한국신학대학의 학생들은, 전국 대학 최초로 반정부 시위를 전개한다.
<중략>
1973년 늦가을, 수유리 한신 교정에는 차가운 북풍이 몰아친다.
정부는 반정부학생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제적하라고 학교 측을 협박한다.
한신 학생들은 예배실에 모여 노성으로 맞섰다. 하루는 김정준 학장이 예배 설교 중에 면도칼로 강단에 있던 교기를 그어 버린다.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적당한 학생들이 돌아오면 그 인원수대로 한 땀씩 잇겠다."
그 무렵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아침마다 회의실에 모여 성서를 함께 읽고 민주화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다.
예배 후 안병무가 갑자기 "우리 삭발하자!"고 전격 제안하는 일이 벌어진다. 교수들은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싶었지만, 김정준 학장을 필두로 이내 동조한다.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포이어바흐가 맞다. 인간은 감성적 동물이다.
<중략>
마침내 1975년 여름 그는 문동환과 함게 이사회의 결의로 해직당하고 만다.
그해 봄부터 학원가는 반정부 시위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자 정부는 학생운동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이유로 각 대학 '문제교수'들을 강제 해임시키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백낙청(서울대), 김병걸(경기공전), 김찬국, 서남동, 성내운(연세대), 이문영, 김용준(고려대), 이우정(서울여대), 노명식(경희대)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직된다.
<중략>
고은을 위시한 문학인들은 동아일보사 앞에서 기습 시위를 벌이며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한다. 바야흐로 순수문학의 허울 아래 정권의 시녀이기를 자처한 한국문인협회와 정반대 운명을 선택한 자유실천문인협회(후에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창립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것이 이미 1974년 11월 18일, 칼바람 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였다.
거기, 세종로 한복판을 가로막고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던져 왜군이 침략을 막아 낸 장군.
그러나 그 장군조차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오직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된 박정희 정권의 포로였다.
그는 '충'과 '효'라는 수직적 유교 가치를 내세워 국민들의 복종을 강요하는 정권에 의해 원하지 않은 악역을 담당하는 신세가 된다.
예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종로 한복판의 이순신 장군이 '구리'에 갇혔다면 한국에 온 예수는 물 대신 원하지 않은 시멘트로 세례를 받는다.
그 아래, 거지가 있다. 고향도 잃고 주리고 헐벗고 지친 거지가 센사 한탄을 하다가, 문득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본다.
거기, 시멘트로 떡칠이 된 예수가 서 있다. 거지는 예수도 먹고 입고 살아갈 집을 가진 자들에게나 구주가 될지언정 자기 같은 놈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중얼거린다.
# 13 3.1민주구국선언 후 구속 수감
브레히트는 시민들의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한 동독의 독재정권에 대해 자신의 시 '해결방법'에서 이미 이렇게 '해결방법'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 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중략>
그 후, 연말 항소심이 있을 때까지 재판이 장장 16회나 이어진다.
이 사건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따. 김대중처럼 워낙 명망 있는 인사들 때문이겠지만, 기소된 18명 전원이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사실도 주목을 끌었다.
안병무는 재판이 열리는 토요일을 동지들과 만난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고인들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연설회장 같았다. 하다못해 변호사들도 그들의 그런 신념을 구체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젊은 판사가 그런 변호사의 신문에 대해, "도대체 그 신문이 피고를 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중죄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라고 되물어 장내에 폭소를 자아내기도 할 정도였다.
함석헌은 베옷을 입고 출정했다가 판사가 그걸 지적하자,
"한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도 상복을 입어 애도를 나타내거늘, 하물며 양심도 법도 그리고 나라마저 죽었는데 어찌 상복을 안 입을 수 있겠냐"며 오히려 호통을 치기도 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그들을 재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정부를 재판하는 셈이었다.
<중략> 먼저 석방된 후
그를 위한 석방기념회에서 김정준이 그의 석방을 가리켜 하느님이 고래에게 요나를 토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라는 비유로 이야기해서 사람들을 감격시킨다. 안병무는 오히려 부끄러웠다.
"하나님의 호령에 놀란 고래가 다 토하지는 않고 겨우 재채기를 했는데 삼키운 이들 중에서 가장 가벼운 두 사람이 밀려 나왔다고 했습니다. 아직 고래는 다 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호령은 계속될 것입니다."
# 14 80년 광주 (p. 236)
광주가 무참히 짓밟혔을 때, 수천 명이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들려왔을 때,
그는 울었다. 통곡했다.
그렇지만 폭도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간첩이 독침을 품고 스며들었다고 했을 때, 그는 화를 냈다. 폭발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자들의 혀가 뱀의 그것으로 변하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다시 유언비어가 돌아,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시민군에게 황금동 작부아가씨들이 떼로 몰려와 "내 피를 쓰세요. 몸은 이래도 피는 깨끗해요"라고 헌혈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죽은 것은 책상물림 것들이 안라 글뒤주들이 아니라 난놈들이 아니라 날품팔이, 양아치, 구두닦이, 때밀이, 미장이, 신문팔이, 시다, 지게꾼, 공돌이, 공순이, 실업자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울면서 웃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아주 손쉽게 다리를 건너갔다.
그것이다.
민중만이 희망이었다.
민중은 고통 속에서 쓰러지지만, 스스로 일어선다.
# 15 강남향린교회 설립 예배 설교 (1993년 5월)
'우리가 세상에 뭐 할라고 왔나? 얼굴 하나 보러 왔지.'
그게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세상이 무슨 소리 무슨 소리 해도 얼굴 하나 볼라고 왔지. 세상에 나돌아다니는 찌그러진 얼굴, 근심 많은 얼굴,남을 괴롭히는 얼굴, 별의별 얼굴이 다 있는데, 그 중에 참 평화로운 얼굴을 하나 볼 수가 없구나' 하고 한탄한 시가 있습니다.
'세상에 왜 왔나? 얼굴 하나 보려고 왔지.' 그 말이 제겐 언제든지 마음에 새겨집니다.
좋게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 뭐하러 왔나?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그려보자 그거죠. 왜 교회가 여기에 하나 섰나?
많은 교회들이 모두 그리고 있는 에수의 얼굴이 틀렸다. 우리 바른 예수의 얼굴을 그려보자.
그거죠. 김 목사, 안 그렇소?
나도 참예수의 얼굴을 그려보자.
지금 구십 퍼센트 이상의 한국 교회가 예수의 얼굴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느 밑에 있는지 알아요? 놀랍게도 이제는 모든 것을 다 거슬러 올라가서 두 가지를 선택했습니다.
율법주의를 그대로 지키고 있고, 그 밑에서 예수를 봅니다.
또 하나는 그레꼬-로마의 밑에서 얻은 그리스도론을 가지고 강제하고 고집합니다.
그것을 떠나면 이단자로 몹니다.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사의 예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Christiianity without Jesus!
예수 없는 기독교, 그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입니다.
예수는 배제했습니다. 왜? 예수는 우리에게 거리끼니까.
그대로 수용했다가는 팬티까지도 다 빼앗길 걸? '겉옷을 빼앗으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더 나가면 팬티까지도 벗어주라는 말이 되니까, 난 그건 죽어도 못한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 그건 난 못한다.
그러니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예수는 좀 배제하자. 그래서 예수는 아니야.
Christianity라는 데로 흡수해 버리지.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가 설립된 중요한 목적은 예수를 도로 살펴 보자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지도 않았어요. 의미가 없어요. 안 그린 겁니다.
교리를 얘기하고, 율법을 얘기합니다. 아직도 토라(Torah)가 절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김 목사는 어떤지 몰라. 우리 예수의 얼굴을 정말 그려보자.
예수의얼굴은 신비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고행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개인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유야 어쨌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다.
자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뭔지 미지수는 많지만 그는 남을 위해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은 이다.
김 목사님, 오늘 너무 한계를 지어놔서 운신의 폭이 좁을 줄은 모르나, 예수의 얼굴을 정말 그리시오.
당신이 망해도 예수는 살아야 하니까.
세례 요한의 말대로, '당신은 흥해야겠고, 나는 쇠해야겠다.' 그말을 당신은 지키시오!
안병무는 다시 울었다.
"지켜야지. 세상에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인물, 평전, 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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