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끔찍하고 무섭게도 늑대떼의 집요한 추격에 썰매개들은 서서히 잡아먹히고, 두 명의 사람 중 한 명도 죽고, 나머지 사람도 죽기 직전까지 내몰립니다. 그 늑대 무리 중 개에 가까운 암컷 늑대와 애꾸눈 늑대는 짝을 짓고, 늑대개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태어난 늑대개와 어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인 자연 속에서 잡아먹고 잡아먹힐 위기를 겪으며 살아나갑니다. 그러다 어미늑대는 예전에 자신을 길들였던 ‘그레이 비버’를 만나 다시 길들여진 생활을 시작하고 그 새끼 ‘화이트 팽’도 길들여진 생활을 시작합니다. 매일이 생존을 위한 활동과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이었던 자연보다 덜 위험한 길들여진 생활, 그러나 여기에도 서열과 다툼은 있습니다. ‘리프리프’를 필두로 한 다른 개들의 따돌림과 집단 구박 속에서 ‘화이트 팽’은 영리하게 때론 교활하게 잘 살아남습니다.
‘그레이 비버’를 위스키로 꼬여 망가뜨리면서 ‘화이트 팽’의 소유권을 넘겨받은 ‘뷰티 스미스’는 ‘화이트 팽’을 이용해 투견으로 돈을 벌며 ‘화이트 팽’을 학대합니다. 그래서 책에서는 ‘미친 신’으로 부릅니다. 투견판에서 학대받으며 죽어가던 ‘화이트 팽’을 구해준 것은 세 번째 주인인 ‘위든 스콧’은 ‘사랑의 신’으로 부릅니다.
‘화이트 팽’은 사랑의 신 ‘위든 스콧’을 따라 북국을 떠나 주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떠나게 됩니다. 북국의 질서와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의 환경을 벗어나 ‘화이트 팽’이 보는 신들이 잔뜩 있는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게 될 지는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2. 정말 아동 도서가 맞나?
<야성의 부름>과 <화이트 팽>을 아동도서로 분류하는가 봅니다.
<야성의 부름>에서는 개들끼리의 서열을 위한 싸움을 넘어서 죽이고 먹기까지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화이트 팽>에서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존을 위한 사냥(죽임)과 싸움이 일반적으로 나옵니다. 심지어는 길들여진 이후에도 재미를 위해 다른 개들을 사냥하는 모습까지 나오죠. 그리고 <화이트 팽>의 첫 부분은 ‘좀비 공포 영화’ 뺨칠 정도로 굶주린 늑대무리에게 쫓기며 죽어가는 눈썰매개와 주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아동도서라니 조금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제가 어느새 아동도서를 저만의 기준과 개념으로 재단질하는 꼰대가 되어 버린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쩌면 자연이든, 인간세상이든 ‘협동‘, ’조화‘, ’양보‘, ’사랑‘보다 우선되고 기본적인 사회상호작용은 생존을 위한 ‘투쟁’ 또는 ‘경쟁’이라고 생각합니다. ‘협동’이나 ‘조화’는 개인의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경쟁’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그 기본적인 생존을 충족하였을 경우에 그 이상을 바라보는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엄연히 나름의 경쟁과 투쟁을 알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숨긴 채로 ‘협동’과 ‘조화’ 또는 ‘양보’나 ‘사랑’을 주입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의문입니다.
3. <화이트 팽>역시 영화로 어떻게 각색되었는지 궁금합니다
『 젊은 우두머리는 무섭게 으르렁거렸지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간지러운 듯한 기침으로 바뀌었다. 젊은 늑대는 이미 부상당해 피를 흘리고 기침을 하면서, 늙은 늑대에게 달려들어 목숨이 꺼져가는 동안 싸웠다. 그를 받쳐주는 다리는 약해져 갔고 눈에 비친 낮의 빛은 흐릿해졌고, 타격과 도약의 강도도 계속 약해져만 갔다.
그러는 내내 암컷 늑대는 웅크리고 앉아 미소를 지었다. 암컷은 왠지 몰라도 이 싸움이 즐거웠다. 이것은 야성이 짝짓기하는 방식이었고, 자연 세계에서 수컷의 비극은 죽은 놈들에게만 비극이기 때문이었다. 생존한 놈에게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실현이자 성취였다. 』 P 195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책의 초반부에 늑대 떼들의 끈질긴 추격과 그 중에 죽어가는 개들과 사람들의 이야기, 위에 인용한 장면 외에도 자연에서 생존을 위해 죽고 죽이는 상황들, 남쪽에서 온 개들을 재미로 죽이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족영화에는 부적합할 수 있을텐데 이런 부분을 어떻게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읽은 책이었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장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썰매개들 사이에서 서열을 가리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하고 그 끝은 패배하여 쓰러진 개를 모든 개가 공격하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인 개가 눈밭의 추운 야외에서 눈을 파고 그 구덩이에서 밤을 지내는 방법을 배워 실행하는 장면입니다. 읽고 보니 그 두 장면이 이 책에도 나오더라고요. 결국 제가 어렸을 때에 읽었던 책이 이 책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이 맞았습니다.
유튜브에서 같은 제목의 영화 트레일러를 보면, 온 가족이 보면 좋을 가족영화인 듯합니다.
동물이 주인공인 다른 영화들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각색을 어떻게 했을지 궁금합니다. 책의 내용대로라면 주인공인 개 ‘벅’은 북쪽으로 끌려가서 세 번의 주인을 만나는데, 두 번째와 세 번째 주인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개를 학대하는 장면과, 개들끼리 생존을 걸고 죽고 죽이는 장면도 나오기 때문에 어떻게 가족영화로 각색을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미지출처 - 다음영화
영화와 별개로 이 책에서 이제 다 자라버린 저는 큰 재미도 의미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피식 하고 웃었던 장면과 수십 년 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어릴 적 강렬했던 장면을 다시 적어보려고 합니다.
오래도록 남은 이 책의 장면1 – 개 싸움에서 벅이 느낀 충격
『벅은 이 늑대 같은 개들처럼 싸우는 개들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첫 경험은 잊지 못할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사실, 그것은 간접경험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살아남아서 교훈을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컬리가 피해자였다. 그들은 통나무 저장고 근처에서 야영하고 있었는데, 컬리는 그곳에서 평소처럼 다정한 태도로, 다 자란 늑대만큼 크기는 해도 자기 몸집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허스키 한 마리에게 다가갔다. 아무런 경고도 없었다. 다만 섬광 같은 도약과 이빨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도약할 때처럼 재빠른 한 번의 착지밖에는, 그러고 나니 컬리의 얼굴이 눈에서 턱까지 찢어져 있었다.
그것은 늑대가 싸우는 방식이었다. 치고 빠지는 방식.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삼사십 마리의 허스키가 그곳으로 달려오더니, 둥그렇게 에워싸고 조용히 집중해서 두 마리 개의 싸움을 지켜보았따. 벅은 그들이 말없이 열중한 이유를,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입맛을 다시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했다. 컬리가 상대에게 덤벼들었으나, 상대는 두 번째 공격을 가하고는 옆으로 뛰어내렸다. 상대는 컬리가 다시 공격해 오자 특이하게 가슴으로 받아치면서 컬리를 넘어뜨렸다. 컬리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때가 바로 구경하던 허스키들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들은 으르렁거리고 컹컹 짖으면서 컬리에게 덤벼들었고, 컬리는 털을 곤두세운 무리들 밑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들에게 깔려 버렸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뜻밖의 일이어서 벅은 깜짝 놀랐다. 그는 스피츠가 웃는 것처럼 진홍색 혀를 날름거리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프랑수아가 도끼를 휘두르면서 개 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몽둥이를 든 세 남자가 프랑수아를 도와 개들을 쫓았다. 그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컬리가 쓰러지고 이 분 후, 컬리를 덮쳤던 개들 중 최후의 한 마리가 몽둥이에 쫓겨 갔다. 그러나 컬리는 피로 울글불긋 물들고 짓이겨진 채 눈밭에 축 늘어져서, 그야말로 거의 갈가리 찢겨 죽어 있었고, 가무잡잡한 혼혈 남자는 컬리 위에 서서 엄청나게 욕설을 퍼부었다. 잠을 잘 때면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 벅을 괴롭혔다. 그게 이곳의 이치였다. 페어플레이는 없었다. 일단 쓰러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랬다,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스피츠는 혀를 내밀고 다시 웃었다. 그 순간부터 벅은 지독히, 그리고 영원히 그를 증오했다.』
오래도록 남은 이 책의 장면2 – 눈밭에서 잠자리 구하는 벅
『마침내 벅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돌아가서 동료들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는 드넓은 야영지를 헤메다니면서 동료 개들을 찾아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혹시 텐트 안에 있는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벅이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정말로 씁쓸하게, 그는 막연히 텐트 주변을 맴돌았다. 갑자기 앞발 아래쪽 눈이 푹 꺼지면서 몸이 가라앉았다. 무언가가 발밑에서 꿈틀거렸다. 벅은 펄쩍 뒤로 물러나서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겁내며 털을ㄹ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귀에 익은 작은 깨갱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놓였고, 자세히 살펴보려고 다시 다가가 보았다. 따뜻한 공기가 훅 하고 그의 코끝으로 올라왔다. 저기, 눈 아래 공처럼 둥글게 웅크린 채 누워 있는 것은 빌리였다. 빌리는 벅을 안심시키려는 듯 낑낑거렸고 몸을 꿈틀거리며 호의를 보이더니, 심지어 사이좋게 지내자고 뇌물을 건네듯, 따뜻하고 축축한 혀로 벅의 얼굴을 핥았다.
하나의 교훈이었다. 그래, 저 친구들이 저런 방식으로 잔단 말이지? 벅은 자신 있게 한 장소를 고르고는, 요란하게 헛발질을 해가면서 자기가 들어갈 구덩이를 팠다. 순식간에 몸의 열기가 비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길고 고된 하루를 보낸 뒤였기 때문에, 이따금 나븐 꿈에 으르렁거리고 짖거나 몸부림치면서도, 깊고 편안하게 잤다.
눈 한번 뜨지 않고 자던 벅은 아침에 야영지의 소움에 잠이 깼다. 처음에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밤새 내린 눈으로 몸이 완전히 덮여 버렸던 것이다. 눈 벽이 사방에서 그를 압박해 왔고 커다란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은 덫에 걸린 야생동물이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벅이 새로운 삶을 통해 조상들의 생활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왜냐하면 그는 문명화된 개, 고도로 문명화된 세계의 개였고, 그동안의 경험상 덫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온몸의 근육이 발작적으로, 본능적으로 수축하면서 목과 어깨의 털이 곤두섰다. 벅은 사납게 으르렁거리면서 눈부신 아침 햇살 속으로 곧장 뛰어올랐다. 눈이 반짝이는 구름이 되어 사방에 흩날렸다. 발이 땅에 닿기 전, 하얗게 펼쳐진 야영지가 눈에 들어온 순간, 벅ㅇ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정원사 조수 매뉴얼과 함께 산책을 나가던 때부터 전날 밤 구덩이를 팔 때까지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벅이 나타나자 프랑수아가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뭐랬어?” 그 개썰매꾼이 페로에게 외쳤다. “저 벅이란 녀석은 뭐든지 빨리 배운다고 했잖아.”
페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했던 부분 – 벅의 북쪽에서 두 번째 주인 무리들의 곤경
『이쯤 되자, 남무 사람 특유의 싹싹함과 상냥함은 세 사람에게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북극 여행은 그 매력과 낭만을 잃어버렸고, 그들의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으로 견디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현실이 되었다. 이제 머세이디스가 개들 때문에 흐느끼는 일은 없어지고,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흐느끼느라, 또 남편이나 동생과 말다툼하느라 너무 바빴다. 말다툼은 그들이 결코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의 짜증은 비참함 속에서 떠올라 함께 커졌고, 비참함 때문에 배가되었으며, 비참함보다 커졌다. 열심히 일하고 고생하면서도 여전히 다정한 말과 친절을 잃지 않는 개썰매꾼들의 훌륭한 인내심을 이 두 남자와 한 여자에게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런 인내심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몸이 뻣뻣했고 여기저기 욱신거렸다. 근육이 아프고 뼈가 아프고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말투가 날카로워졌고, 아침에 그들의 입에서 처음 나오고 밤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은 죄다 거친 말들뿐이었다. 찰스와 할은 머세이디스가 틈만 주었다 하면 말다툼을 했다. 서로가 마음속으로 자기가 해야 할 몫보다 일을 많이 한다고 믿고서, 그것을 담아두지 않고 기회가 날 때마다 투덜거렸기 때문이었다. 머세이디스는 때로는 남편 편을 들었고, 때로는 동생 편을 들었다. 그러다보면 끝날 줄 모르는 꼴사나운 가족 싸움이 되었다. 찰스와 할만 관계된 말다툼이었지만, 땔감으로 쓸 장작 및 개를 패는 것에 관한 언쟁이 시작되면, 이윽고 나머지 가족들,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 삼촌, 사촌들과 죽은 친척들까지 들먹이게 되었다. 할의 예술관, 또는 할의 외삼촌이 쓴 연극 대본 같은 것이 장작 몇 개를 패는 일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
『벅은 옛 생활의 버릇이었던 까다로운 입맛을 재빨리 버렸다. 입이 짧은 편이었던 그는 먼저 식사를 끝낸 동료들이 그가 미처 먹지 못한 그의 몫을 강탈해 간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을 지킬 방법은 없었다. 그가 두세 마리 개와 싸우다 보면, 그사이 먹이는 다른 개들의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벅은 그들만큼 빨리 먹어치웠다. 그리고 배고픔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자기 몫이 아닌 것을 차지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도 그가 보고 배운 것이었다. 새로 들어온 개들 중에 파이크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벅은 영리한 꾀병쟁이에 도둑질까지 잘하는 파이크가 페로가 등을 돌린 사이 베이컨 한 조각을 교활하게 훔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다음 날 벅은 그 짓을 똑같이 따라 해 베이컨을 덩어리째 가지고 무사히 도망쳤다. 큰 소동이 일어났지만 벅은 의심받지 않았다. 대신에 항상 들키곤 하는 서투른 얼간이 더브가 누명을 쓰고 벌을 받았다.
이것이 혹독한 북국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응하면서 벅이 저지른 최초의 도둑질이었다. 그 일은 그의 적응력, 변화하는 환경에 스스로를 조화시키는 능력에 대한 증거였다.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은 언제든 끔찍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그의 도덕성이 쇠퇴했음을 뜻했다. 그런 도덕성ㅇ은 무자비한 생존 투쟁에서는 허영이자 약점이었다. 사랑과 협력의 법칙이 존중되는 남쪽 지역에선느 사적인 재신과 개인적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러나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이 지배하는 북쪽 지역에서는 그런 미덕을 가지고 있으면 바보 취급을 당했고, 지금까지 벅이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벅이 그것을 머리로 추론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적응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활 방식에 순응했던 것이다. 그는 평생, 승산이 얼마였든 간에, 싸움을 피해 도망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붉은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들고 있던 몽둥이가 벅을 때려 더욱 근본적이고 원시적인 규범 속으로 몰아넣었다. 문명화된 세계에서 그는 도덕적 명분을 위해서라면, 이를테면 밀러 판사의 승마용 채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완전히 문명에서 벗어났고, 그것은 도덕적 명분을 지키는 일을 저버리고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게 됨으로써 증명되었다. 벅은 재미로 그것을 훔친 것이 아니라,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훔쳤다. 그리고 드러내놓고 훔친 것이 아니라,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이 두려워 몰래 교활하게 훔쳤다. 한마디로, 그는 그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더 쉬워서 그 잘못들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것이 발전이든, 퇴보든 벅은 빠르게 달라졌다. 』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
– 법보다 빠른 주먹의 세상을 사는 사람의 줄타기
이 책에서 ‘벅’이 살아가는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구별된다.
도덕을 따라 사는 문명화된 세계의 규범을 따를 것인지,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에 따를 것인지 아주 명쾌하게 구별된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세상은 그 둘을 넘나드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요즘의 생각이다.
그 규범들의 혼란의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의 선의나 규범의 준수의 틈을 파고들어 무임승차하고 조롱하며 이득을 보는 사람들. 그 결과 선의와 규범의 수준을 내려놓는 사람들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아직 정답은 찾지 못했다. 그들을 정죄하고, 그들에 분노하는 것은 지양하려 한다. 정죄와 분노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이다. 다만 제1의 소명은 ‘생존의 투쟁’으로 두며 선택과 결정의 순간마다 명쾌하고 빠른 결론을 내려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명령을 계속해서 찾아야지.
우연히 유튜브에서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트레일러를 보았습니다. 어릴 때 문고판으로 읽었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인가 싶어서 찾아보았고요. ‘잭 런던’ 이라는 작가의 단편소설집인 이 책을 먼저 읽어보았습니다. 이 책에는 아래와 같은 단편들이 있습니다.
1부 사회적인 이야기
스테이크 한 장 A Piece of Steak(1909)
배교자 Tjhe Apsstate(1906)
시나고 The Chinago(1909)
멕시칸 The Mexican(1911)
2부 우화적인 이야기
그냥 고기 Just Meat(1907)
프란시스 스페이트 호 The “Francis Spaight”(1911)
전쟁 War(1911)
강자의 힘 The Strength of the Strong(1911)
3부 클론다이크 이야기
생의 법칙 The Law of Life(1900)
불을 지피다 To Build a Fire(1908)
생에의 애착 Love of Life(1905)
제가 이해하기로는 1부와 3부의 얘기들은 같은 주제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자 지상명령을, ‘생존’이라는 본능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들과 그것을 가로막는 부조리, 혹독한 환경과 굶주림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들어 젊은 복서에 밀려 쇠하고, 경제력이 약해진 복서 ‘톰 킹’(스테이크 한 장), 어린 시절부터 고된 노동으로 발육도 정서도 불안한 소년 ‘조니’의 이야기(배교자), 사회적 지위가 약하여 부당하게 차별 받고 생존을 위협받는 이야기(시나고의 ‘아초’, 멕시칸의 ‘리베라’)입니다. 1부는 이렇게 생존하기 위한 노력과 몸부림들을 가로막는 원인이 주로 사회적인 문제들입니다. 반면에 3부는 생존을 가로막는 주된 원인이 ‘가혹한 자연’에 있습니다.
2부의 이야기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비슷하게 기존의 규범들이 그 영향력을 잃은 상황에서 비인간적으로 보일지라도 자기의 생존에 치중한 새로운 규범이 세워지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써 놓고 보니 이 책의 단편들의 일맥상통하는 주제는 ‘생존’과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자 지상명령과, 이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하는 ‘생존’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들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2.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 단편 소설집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는 ‘생존’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신의 축복이자 명령 그리고 인간으로서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본능일 ‘생존’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아래에 적습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자들을 부수고, 부술 수 없는 적대자들에게 굴종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에 따를 때에는 선택과 결정이 명쾌합니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 더해지면 이제 혼란이 시작됩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자를 향한 분노도 죄스럽고, 투쟁과 다툼 불만도 역시 죄스럽습니다. 그럼 생존을 위한 투쟁과 자구행위는 어디까지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언제까지 왼 뺨을 돌려대고, 속옷까지 내주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 합쳐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명령사이에서 선택의 혼란에 교회는 어떤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세간의 비난처럼 교회는 이런 풀 수 없는 혼란을 던져주며 죄의식과 참회를 곁들여 팔기만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선택의 순간들은 늘 어려웠습니다.
해답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해답을 얻기 전까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우선 수행하려고 합니다. ‘생존’ 그리고 투쟁, 경쟁, 싸움 이런 현실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것에 소명을 두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니’의 생존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3. 여담 : 서양인들은 이런 개개인의 투쟁을 좋아하는가?
이 책 ‘불을 지피다’의 단편 소설들을 읽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특히 ‘생애의 애착’에서 곰과 마주하는 장면을 읽다가 ‘레버넌트’, ‘가을의 전설’ 같은 영화가 떠오릅니다. 곰과의 사투라는 장면에서 공통점이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그리고 ‘노인과 바다’에서 물고기와의 사투도 떠올랐습니다. 서양인들은 이런 생존을 위한 개인의 위대한 투쟁을 좋아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배교자’ 편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수험생인 고교시절 읽었던 ‘독서평설’에는 이 책의 해설로 이런 말들이 붙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산업화와 개발로 사라져가는 농촌의 마을과, 전통적인 가족관의 해체,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상실감과 갈등’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다시 이 책을 읽으니 이전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이제는 정해진 정답에 걸맞는 글을 써야 하는 수험생이 아니기에 더 다른 느낌입니다. 이 책은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살아가는 노영달, 정씨, 백화 세 사람의 노정이 그 줄거리입니다.
1. 고향, 정처, 정착, 사랑 그리고 가정
겨울이 되어 공사판이 닫게 되자 다른 곳으로 떠나는 노영달과 정씨가 만나 대화를 이어갑니다.
『“넉 달 있었소. 그런데 노형은 어디로 가쇼?”
“삼포에 갈까 하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용히 말했다. 영달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방향 잘못 잡았수. 거긴 벽지나 다름없잖소. 이런 겨울철에.”
“내 고향이오.”
사내가 목장갑 낀 손으로 코 밑을 쓱 훔쳐냈다. 그는 벌판 저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달이와는 전혀 사장이 달라진 것이다. 그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영달이는 또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길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 P. 113~114
이 소설이 1973년 작품이라는데, 2020년 현재에도 사람들은 너나 할것없이 안정위해 노력합니다. 안정적인 직장, 경제생활, 사랑과 가정. 그러며 어린 시절의 고향 어쩌면 요즘은 추억 속의 평안을 바라거나, 이상적인 삶을 꾸리기 위해 애쓰며 살아갑니다. 일상적인 삶이랄까, 평균적인 삶이랄까. 그런 안정적 지위가 없다고 느끼는 우리는 극 중의 세 사람처럼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이 직장 저 직장, 파트타이머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말이죠.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을 위해서 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2. 고단한 노정의 안식
눈길을 걷는 고단한 세 사람은 폐가에서 불을 쬐며 몸을 녹이고, 옷을 말립니다. 그것만으로도 노정의 고단함을 덜고 집과 같은 평안을 잠시나마 얻습니다.
『 영달이가 폐가 안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저기서 신발이라두 말리구 갑시다.”
백화가 먼저 그 집의 눈 쌓인 마당으로 절뚝이며 들어섰다.
안방과 건넌방의 구들장은 모두 주저 앉았으나 봉당은 매끈하고 딴딴한 흙바닥이 그런대로 쉬어가기에 알맞았따. 정씨도 그들을 따라 처마밑에 가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영달이는 흙벽 틈에 삐죽이 솟은 나무막대나 문짝, 선반 등속의 땔 만한 것들을 끌어모아다가 봉당 가운데 쌓았다. 불을 지피자 오랫동안 말라 있던 나무라 노란 불꽃으로 타올랐다. 불길과 연기가 차츰 커졌다. 정씨마저도 불가로 다가앉아 젖은 신과 바짓가랑이를 불길 위에 갖다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이 생기니까 세 사람 모두가 먼 곳에서 지금 막 집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고, 잠이 왔다. 』 P. 132
이일 저일, 파트타임 잡으로 계약직 노동자로, 이리 저리 떠돌고 만나며 살고 있습니다. 몸 닳고 마음 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발 녹이는 정도의 안식마저 감사합니다. 먹고 살고 있음에, 일상의 소중함과 평안에 그리고 이정도의 건강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정착하며 고향이라 부르지 못하고 다시 일어서 길을 떠남은 오롯이 불만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도 그 이상의 무엇을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은 어쩌면 생애 내내 찾아야할 푯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3. 안정 어쩌면 다시 볼 수 없는 추억
오래 전 객지에서의 고시원 자취 시절에 좋아하던 풍경이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창밖에 다른 집들과 아파트 유리창에 번지는 노란색 불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찌나 따뜻하고 집생각을 나게했는지 모릅니다. 후각으로는 다른 집에서 풍기는 김치찌게 된장찌개의 냄새가 그러했고, 청각적으로는 집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밥하는 소리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막상 집에 돌아가면 타지에서 집 생각했던 아련함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어쩌면 바라는 안정을 평생 이룰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집에 대한 기억의 아련함이 현실과 달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 속 안정과 꿈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요. 지금껏 안정을 확실을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정해지지 않은 것과 확실하지 않은 것에 불안해했고 멈춰서고 웅크렸습니다.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 이제부터는 눈길을 떠도는 삶일지라도 끝까지 길을 가야 합니다. 언 발을 녹이는 안식에 감사하면서도,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찾아보려고 이루려고 계속해서 가야 합니다. 가려던 길이 막히고 사라져도 계속해서 가야 합니다.
대단위 사과농장이 있는 토커스 지역에 ‘임금삭감’이 이루어지고, 떠돌이 농장 노동자들의 불만과 불안이 싹트고 있을 때, 공산당원인 ‘맥’과 새로 입당을 준비하는 ‘짐 놀란’이라는 젊은이가 토커스 지역으로 향한다. 그들의 목적은 노동자들의 연대와 파업이다. 그리고 파업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의 경험은 남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자 이상.
농장 노동자들의 불만화 요구를 구체화하고, 효율적이고도 조직적인 투쟁을 위해 맥과 짐은 노력한다. 노동자 대표로 선출된 ‘런든’과, 런든의 성과와 도덕성에 근거없는 흠집을 내려했던 ‘버크’같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득 없는 이상만을 목적으로 함께 일하는 맥과 짐 그리고 관찰자 입장으로 그들과 함께하는 닥터 ‘닥’과 후방을 지원하는 ‘딕’, ‘조이’, ‘해리닐슨’. 파업 참가자들에게 앤더슨 농장을 빌려 준 ‘앨’과 ‘앤더슨’. 이들의 불안하고도 불편한 일상과 이들을 따르는 다수 노동자들의 일상은 어떻게 될 지가 이 책 대강의 내용입니다.
<의심스러운 싸움 영화 포스터>
2.개인의 권리와 소중한 일상을 위한 조직의 투쟁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고, 사랑을 하고, 멋진 집에 목표를 둘 수도 있고, 극 중의 ‘데이킨’처럼 자동차에 욕심도 부려보는 등. 개인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이나 욕망 권리를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어렸을 적, 특이점이 없는 늘 같은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기만 하였지만-그렇다고 엄청나게 도전적인 성격도 아니면서-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인 요즘은 그 일상의 소중함이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유롭고도 평화롭길 원하는 이 일상이 위협받는다면, 이 위협이 내가 가진 체제 내 도구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난 다른 이들과 연대해서 조직적인 투쟁을 할 수 있을까? 저의 성격으로는 모르는 사람과 한 배를 타며 위험을 무릅쓰고 싸움을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마도 최대한 체제 내의 해결방법을 모색하다가 좌절할 것이고, 눈물과 동정에 호소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라는 우울한 생각이 듭니다.
3.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촉발된 시위와 폭동의 간극
Black lives matter!! – 우선 저는 약탈을 제외한 이 시위의 취지에는 찬성합니다.
미국에서 백인 경찰관의 흑인 제압. 체포 과정에서 흑인이 사망하였습니다.
충분히 제압이 된 상태에서 무릎으로 엎드려 있는 흑인의 목을 죽음에 이를 때 까지 눌렀다는 점에서 경찰의 과잉진압 논란이 제기 되었고, 흑인이기에 그런 불상사가 발생했다는 ‘인종차별’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인종차별을 성토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시위가 평화시위와 함께 폭력, 약탈 시위의 모습이 보이면서 한국 내 인터넷 여론은 이 시위에 부정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이 시위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의 근거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폭력 약탈 시위로 한국 교포들이 많은 피해를 본 점
둘째, 조지 플로이드는 다수의 전과를 가진 범죄자라는 점
셋째,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동북아시아의 체제 순응적인 문화에서 저항과 시위에 대한 반감
첫째 근거는 이해도 되고 공감도 되지만, 둘째와 셋째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둘째 근거를 커뮤니티 사이트의 베스트 댓글로 적고 추천하는 행위는 어리석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것 원리 중 하나는 ‘법치주의’ 입니다. 피의자를 수사하고 체포, 기소하는 기관이 따로 있고, 피고인의 변호권리를 보장하며 재판하고 형을 확정하고,선고하는 기관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형을 집행하는 기관도 따로 있습니다.
경찰이 그 모든 권리와 절차 규정을 무시하면서 사형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온 즉결처분까지 했다는 점은 ‘법치주의’원리 자체를 무시하는 중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행위는 나중에 ‘조지 플로이드’가 다수의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임이 밝혀졌다고 해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사진 : 영화 ‘져지 드래드’ 포스터>
이 영화 초반에 져지는 불법주차된 고급 차량을 폭파시킨다.
그래도 미래가 배경인 이 장면은 재판관으로 판결, 선고와 형의 집행 권한까지 있는 상태이므로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는 많이 다르다.
이번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인한 미국 시위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나 반감, 그리고 미국 ‘흑인들이 아시아인들을 인종차별 한다’는 인종차별에 대한 그들의 이중성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 흑인들의 시위는 그들이 하고 싶고,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의 발현일 것입니다. 결과가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지위는 이번처럼 긴 세월을 따로 또 같이 싸워오며 획득한 것이고, 아시아인의 지위 역시 다양한 개인적 방법과 조직의 투쟁으로 획득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 댓글로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이중성을 성토해봐야 한국인의 지위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를 맞아 재외한국인과 한국교포를 ‘검은머리 외국인’이라고 부르며 혐오하는 행태도 한국인의 지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리가 없습니다. 유태인들과 화교들의 힘의 근원은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그들의 뿌리에 대한 정체성과 단합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이고도 소중한 나의 일상과, 여러분의 이루고 싶은 소망과 안전을 담보할 지위를 위해, 우리는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와중에라도 상황과 필요에 의해 연대하고 협동하는 방법에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아직은 서툴러도 비록 끝까지 서툴지라도, 그 연대와 협동의 필요성은 당위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인 식료품점 상인인 리청, 맥을 대장으로 헤이즐, 에디, 휴이, 그리고 존스 5명이 모여사는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 술집 ‘베어플래그’의 사장 도라를 비롯해 경비원인 앨프리드와 그리스인 요리사 그리고 여성작부들, 고장난 보일러에 사는 샘 맬로이 부부, 어딘가 모자란 프랭키라는 소년, 웨스턴 생물학 연구소의 닥, 그리고 생활고에 죽는 가장과 이유를 모르고 죽은 소녀까지 많은 이들이 등장합니다.
초반에는 나와 상관 없는 시답잖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바쁘고 피곤할 때 듣는 재미없는 농담, 대꾸할 말도 마땅치 않은 농담을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때 마침 읽던 성경 구절도 전도서 말씀이었습니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전도서 1장 2절~4절 말씀- 표준새번역
작가는 이 하찮고도 비루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데 성공했고, 저는 초반의 이 지루하고 헛되어 보이는 허무함을 참고 끝까지 읽어서 나름의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중반 이후부터는 꽤나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지루했던 전반부를 다시 읽어보니 처음 읽을 때만큼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아래와 같이 이 책을 시작합니다. 아마도 이 도입부를 처음에 읽을 때는 너무도 추상적으로 느끼실 테지만, 두 번째 읽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시게 될 것입니다.
《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캐너리 로는 시이고, 악취이고, 삐걱거리는 소음이고, 독특한 빛이고, 색조이고, 습관이고, 노스탤지어이고, 꿈이다. 캐너리 로는 모여 있는 동시에 흩어진 곳이고, 함석과 쇠와 녹과 쪼개진 나무이고, 잘게 부서진 보도와 잡초가 무성한 나대지와 고물 수집장이고, 골함석으로 지은 통조림공장이고, 초라한 극장이고, 식당과 매음굴이고, 북적이는 작은 식료품점이고, 연구소와 싸구려 여인숙이다. 그 주민은, 그 사람이 말한 적 있듯이, “창녀, 뚜쟁이, 도박꾼, 개자식들”인데, 그 말은 곧 ‘모두’라는 뜻이다. 그 사람이 다른 구멍을 통해 들여다 보았다면 “성자와 천사와 순교자와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차피 뜻은 마찬가지이지만.》 통조림공장 골목 7P~8P 발췌
오늘 본 <동아사이언스>의 기사는 무려 3500년 전에 살았던 한 여성의 유전자를 분석해서 기사를 냈습니다. 유전자과학과 인류학 역사의 접목학문이라고 소개를 하네요.
무려 3500년 전의 여성의 삶. 얼마나 굴곡진 삶을 살았는지, 밥은 제 때 잘 먹었는지, 결혼 때문에 고민을 얼마나 했는지, 전쟁 포로나 노예로서의 삶을 살았는지…….수 많은 사람들이 까마득한 시간 동안 살다 집니다.
재개발 지역에 가면 볼 수 있는 집터만 바라봐도 선사시대 유적지를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동시대 사람이라는 생각에 더 쉽게 여러가지들이 연상되기에 그러리라 생각합니다.“이 집에 살던 식구는 몇 명이었을까?”, “몇 살, 몇 살의 구성원들이 살았을까?”, “삼겹살을 먹을 때 가족들이 모여서 먹었을까?”, “겨울에 난방비는 얼마나 나왔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집터를 바라보게 됩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 오른다.』 전도서 1장 4절.5절 표준새번역
3.아웅다웅 하면서도 서로를 생각하며 멋진 파티의 결말에 이른다
긴 시간 인류의 역사 중에, 수 많은 사람들의 명멸 중에, 이 책 ‘통조림공장 골목’의 주인공들 역시 그렇게 사건으로 대화로 행동으로 자신들을 드러내고 설명하며 살아갑니다. 다른 이의 절망적인 죽음도, 허무한 죽음도, 그리고 고통스러운 사건이나 웃긴 추억 같은 사건들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사건일 뿐입니다. 바람에 굴러 다니는 낙엽처럼 그렇게 구르고, 부딪치며 살아갑니다.
이 책의 초반의 인물 설명과 사건들은 결국 후반의 좌충우돌 ‘대환장파티’에서 절정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각자 사건들의 시답잖은 주인공들은 마지막의 멋진 파티를 준비하고 완성하고 즐기는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 전도서 2장 24절 25절. 표준새번역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이제 나는 알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전도서 3장 12절~14절. 표준새번역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니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 전도서 12장 13절 14절. 표준새번역
이름없이 짧은 인생 살아가는 중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여러가지 일들로 2020년 한해는 정말 일상의 편안함에 새삼 감사하는 한 해 입니다. 반복적이고 특이할 거 없는 일상이 지겹고 답답하기만 했던 젊은 날과 작별하는 한 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다소 바보 같을지라도, 비아냥을 들을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번 더 웃을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멋진 파티의 주인공이 되거나, 주도적으로 파티를 준비하지 못한다 하여도, 파티의 끝자락에서 지켜보고 웃으며 축하해 줄 수만 있어도 좋으니 파티를 준비하는 인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대공황의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다는 글을 보고 ‘존 스타인벡’의 책들을 골라봤습니다. 오늘은 ‘생쥐와 인간’을 읽고 써 봅니다.
1.내가 기대했던 것은 ‘삼포 가는 길’
아주 오래 전 중학생 때 읽어서 기억도 희미해진 ‘삼포 가는 길’은 지금 제멋대로 세 사람의 고독과 고단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고독과 고단함 그리고 애잔함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냉기가 되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현실로 돌아오며 온기가 도는 안도감으로 ‘삼포 가는 길’은 저에게는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생쥐와 인간’에서 ‘삼포 가는 길’에서 느꼈던 스산한 냉기와 현실로 돌아와서 얻는 안도를 느끼길 기대했나 봅니다.
2.이 책에서 인간성이나 인간애를 느끼는 사람들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계획이나 내일을 위한 계산도 꿈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박한 자영농의 꿈을 얘기하고, 내일을 위해 계산도 해가며, 사람을 모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인 ‘조지 밀튼’과 ‘레니 스몰’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아마 이런 부분들 때문에 이 소설에서 ‘인간성’이나 ‘인간애’를 느끼는 분들도 많으신 듯 합니다.
“자넨 그 얘기가 꽤나 재미있었던 모양이로군? 좋아, 얘기해주지. 그리고 나서 저녁을 먹자구……”
조지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전에도 여러 번 그렇게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며 이야기를 해나갔다.
“우리 같이 농장에서 일하는 인간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족속이지. 그들에겐 가족이란 게 없어. 사는 곳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자네도 알다시피 그들은 농장에서 일해 돈푼 깨나 만지게 되면 읍내에 나가 몽땅 털어 써버리고 다시 다른 농장으로 기어들지. 그들에게는 앞날이란 게 존재하지 않아.”
레니가 신이 나서 끼어 들었다.
“그래. 그렇지.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할 건 지에 대해 얘기해줘.”
조지는 말을 이었다.
“우린느 그렇지 않아. 우린 앞날을 생각하니까. 우린 우리에게 작은 도움을 줄 사람도 있지. 우리는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술집에 들어앉아 주머니를 털어 버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구. 다른 친구들은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도움을 청할 사람 하나 없지. 하지만 우린 달라.”
레니가 말을 가로챘다.
“우리는 달라. 왜냐구? 그건…..그건 내가 자네를 돌봐주고 자네는 나를 돌봐주기 때문이야.”
그는 활짝 웃었다.
“계속해, 조지!”
“자넨 그 이야길 아주 가슴에 새기고 있군, 자네가 얘기해보지 그래.”
“아니, 자네가 해. 나는 조금 잊어버렸거든.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 말해줘.”
“좋아 언젠간 우린 얼마간의 돈을 모아서 작은 집 한 채와 두 에이커의 땅을 장만하고 호화스런 생활을 하게 되는 거지.”
레니가 소리쳤다.
“토끼도 기르고 말이야. 계속해줘, 조지! 우리가 가지게 될 땅과 토끼장 속의 토끼들에 대해서, 겨울비와 난로 그리고 자르기조차 힘들 정도의 우유 위에 두껍게 엉켜 붙은 크림에 대해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얘기해 봐. 조지.”
“왜 자네가 직접 하지 않나? 다 알고 있으면서.”
“아니야 ….. 자네가 해. 내가 하면 딴 얘기가 되어버려. 계속해……조지. 내가 어떻게 토끼를 길러야 되는지.” 』 책인용
3.2020년 한국의 독자들은 무엇을 볼까
2020년 한국 독자들의 일반적 성향을 제가 알 수 없는데 너무 거창하게 시작했습니다.
한국독자를 일반화해서, 대표성도 없는 제가 대신 말할 순 없으니 저의 개인적인 견해로 하겠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대공황의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난과 그 중에도 드러나는 인간성과 인간애를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도무지 그런 교훈적인 내용을 도출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레니 스몰’의 욕정과 살해가 너무 끔찍해서입니다.
‘레니 스몰’의 쓰다듬는 행위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부드러운 감촉’에 집착하는 욕정의 충족일 뿐이었습니다. 죽은 쥐를 계속 쓰다듬는 장면이 이를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강아지의 죽음과 살인은 실수라기 보다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아마도 2020년 한국의 다른 독자들도 ‘동물학대’와 ‘여성살인’에 방점을 두고 읽으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의문 : 무력감과 낙담 그리고 부정적인 금지의 강화는 분노를 파생하는가?
이 소설 ‘생쥐와 인간’에서 ‘레니 스몰’은 숙모와 ‘조지 밀튼’에게 많은 금지명령을 듣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자기편인 ‘조지 밀튼’이 떠날 수도 있음으로 위협받기도 합니다.이런 금지 명령으로 인한 무력감과 낙담, 자기편의 떠남으로 받는 위협으로 인한 불안은 ‘레니 스몰’의 불안과 분노 공격성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요즘 정치, 사회 기사 뿐 아니라, 스포츠 기사에 이르기까지 댓글을 보고 있자면 편을 갈라 분노와 증오 다툼을 즐기고 키워간다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지금이 ‘레니 스몰’이 살고 있던 시기처럼 힘든 금지와 무력감 낙담의 시기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가 그런 게 아니라면 개인이 ‘레니 스몰’처럼 무력감과 낙담속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다른이와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온 후루쿠라씨의 어릴적 일화는 고교 사회 시간에 배우는 "사회화" 개념의 예시로 써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남들의 말투와 의습을 흉내내고, 남들의 의아함을 떨치려 거짓말을 하는 후루쿠라씨를 보면 남들 말투를 쉽게 따라하는 제 자신이 투영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지금은 "안빈낙도"에 대한 잡생각을 써볼까 합니다.
안빈낙도, 안분지족
학창시절 문학시간이나 미술 시간에 조선시대 작품들의 주제로 많이 들어보셨을 단어입니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이란 너무도 그럴듯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유가의 가르침만은 아닐 것 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도 소명의식과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하는 것은 덕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연 주제파악을 하고 소임에 성실하면 만족할만한 삶인 것인가?
스스로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만족할만한 삶일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아니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후루쿠라는 18여년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성실히 생활하지만 친구들에겐 걱정과 염려의 대상으로 이물질과 다름 없었고, 점장이나 동료들에게 당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당장 대체 가능한 자원 입니다. 몸 속의 수분과 피가 계속 교체되어도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후루쿠라씨는 점내의 젓가락이나 종이컵과 같이 편의점(사회)를 유지하는 수분인 것 입니다.
후루쿠라씨가 근무시간 외에 무보수로 쥐위 배설물 범벅이 되어 버린 반품상품 무더기를 치우면 귀해질까요? 노약자 손님이나 임산부 손님 짐이 많은 손님들의 출입문을 열고 닫아 주며 인사를 하면 귀해질까요? 미취학 아동들이 컵라면을 먹다 데일까 끓여주고 종이컵에 나눠주고 하면 귀해질까요? 개그맨 같이 특별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매출증가를 이끌면 귀해질까요?
결국 후루쿠라씨는 시라이씨의 도움을 받아 알아본 일자리를 면접 단계에서 스스로 걷어차고,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편의점으로 돌아갑니다. 편의점에선 금방 대체 되어 버릴지라도 자신은 존재를 의미있게 해주는 관계가 있습니다. 손님과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 점장과의 관계. 그리고 '먹이'를 살 수 있게 해주는 급여의 지급이 있고, 대화도 있습니다. 아마도 결국 후루쿠라씨의 종말은 "겨울에 길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시라이씨 제수의 저주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빈낙도란 그 여유를 자랑할 만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정신 유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명에 충실한 삶이란 '기어 오르지 말고 주제에 맞게 박박 기어라!' 같은 말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이름없이 소명을 다하는 편의점 젓가락, 찌그러져 팔리지 않는 우묵캔 같은 편의점 인간들의 구원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인가. 경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를 뿐인데 말입니다.
끝으로 주제와는 무관 하지만, 개인적인 추측으로 말씀드리자면 후루쿠라씨의 동거인으로 묘샤되는 '시라이'씨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의 다른 모습이자 작가의 다른 내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인이 평범한 사회화 과정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평범하지 못하게 18여년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주위의 의문과 염려에도 게속하는 주인공 후루쿠라씨와 남들처럼 살고 싶은 욕망은 있으나 능력과 노력의 부족으로 실패하였고, 구직사이트를 뒤적이는 것조차 본인의 일이라면 힘들어 하며 세상으로부터 숨어 욕조에 웅크린채 사는 시라이씨는 주인공 본인의 분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장만 있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글이 되었지만 삭제하지 않겠습니다.
연예인이 되고 싶은데 자꾸 빗나가기만 하는 호빠 선수 '제리'와 유일한 꿈이 누군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나'가 등장 합니다. 그 둘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곤궁한 것도 아닙니다. 당장 내일을 알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병을 앓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도 그 둘의 이야기가 이렇게 절망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둘은 꿈이 없습니다. 어쩌면 꿈이 있는데, 그것으로 가는 길이 막혀있거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꿈만 없을 뿐 아니라 안식도 없습니다. 집도, 학교도, 술자리도, 여관방도 어디 하나 맘 편히 쉴 수 있는 곳조차 없네요. 현실에서 없을 수도 있는 누군가가 옆에만 있어준다면 그것을 최고의 안식처로 삼으려 하는데, 그게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실없어 보이지만 '시인'이 되고 싶노라고 말하는 '미주'가 낫습니다.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살아보겠노라는 '여령언니'의 꿈도 그 둘에 비하면 행복해 보일 지경이니 말이죠.
스스로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꿈을 찾지 못하는 상황과, 꿈을 명확히 알더라도 가는 길이 꽉 막혀 있다면 개인이나 사회나 건강한 것은 아닐 테죠. '나'를 응원해 봅니다. 조금은 냉소를 버리고, 부정적 시선도 거두고, 손으로 더듬으며 넘어져 무릎이 까져도 좀 걸어가야죠. 앞인 줄 알고 갔는데 그게 뒤나 옆일지라도 말이죠.
읽을 것이 없어서 도서관 서가를 돌아다니다가, 최근에 떠들썩했던 책이기에 집어 왔습니다. 말이 많았던 책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을 심심함이 이겨낸 결과죠. 이 책의 앞에 '작가의 말'에 개인적인 고민과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서 "두고 보자!"는 심산으로 읽었어요.
[ 감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현대인에게, 또 자본주의적 안락에 기대어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하는 젊은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숨기고 싶지 않다. 소망대로 잘 완성 됐는지는 물론 단정할 수 없다. 소설이란 독자와 소통의 길을 내는 것이면서 왕왕 독자의 '오해'를 만드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p. 10 중에서> ]
작가가 '감히'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고백한 것처럼 이 정도면 '인생'의 모든 것을 다루었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나처럼 저 역시 깊이 있고 연속적이진 않지만 '꿈'과 '정체성'과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니, 이 책을 읽어봤습니다.
소통
박상민과 정선배는 잡음 섞인 무전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외마디를 나눕니다. "그 놈 중 되겠다고......"와 "도장 찍었어요." 하영교의 말대로 웃기는 화법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잠자면서 하지 못하는 얘기들을 술기운 빌듯, 무전기 잡음에 섞어서 얘기를 합니다. 일상에서는 이것저것 눈치 볼 것도, 생각해야 할 것도 많지만 그것이 점점 사라지는 상황의 힘을 빌어서 겨우 통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의 절박함과 단순한 상황
복잡한 집안 내력만큼이나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가는 두 형제. 하영교와 박상민 형제는 맘에 담고도 풀어두지 못했던 응어리들을 하나 둘 풀어냅니다. 치고받고, 악을 쓰고 욕도 합니다. 비박의 혹독함을 느끼는 신음소리와 상상,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맺힌 것이 풀립니다.
둘 만 있는 정적의 장소, 살아야 하는 이유 외에는 배제된 곳이기에 막혔던 물길이 다시 흐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에 어울리는 시가 책의 끝부분에 있어서 인용해 봐요.
[ 눈물짓는 슬픔에 찬 세상을 떠나서 고독한 동굴을 네 아버지로 삼고 정적을 네 낙원으로 만들라 사고(思考)를 다스리는 사고가 기운찬 말이고 네 몸이 신들로 가득 찬 너의 사원이니 끊임없는 헌신이 너의 최선의 약이 되게 하라 - 밀라레파 - <p.331 중에서> ]
다시 현실로
책의 구절들 중에 맘에 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상은 모든 길이 시작되는 곳이고, 모든 선이 모여드는 곳.'
그 곳에서 응어리들이 다 풀렸는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촐라체를 넘었고, 다시 또 현실에서 시작입니다. 정선생과 박상민과 하영교는 무전기의 잡음 없이 얘기하기 힘든 일을 또 겪을지도 모르고, 묻고 싶은 것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응어리를 다시 키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소설 속 인물의 삶을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제가 가진 응어리가 있다면 풀고, 가슴 따뜻해지는 사랑도 하며, 존재의 나팔을 불어야죠. 아직 넘어야 할 정상이 무엇인지 푯대도 알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입니다만, 촐라체에 선 두 형제들처럼 정적 안에서 상황을 좀 단순화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마을에 처음으로 생긴 공립도서관, 그 곳 강당에서 접이식 간이의자 백여 개를 놓고 한 영화상연을 통해 처음 만났습니다. 영화 제목이 '인생'. 까까머리 코흘리개 중학생이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인생'이란 제목의 영화를 보기위해 거기에 앉아있었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영화를 접하기 어려운 때라, 공짜로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겠죠.
영화 곳곳에 나오는 중국 근현대사를 몰라도(지금도 잘 모릅니다.)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추억은, 불편한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같이 영화를 보던 사람들과 같이 탄식하고, 웃으면서 호흡을 같이 한 기억입니다. 추억은 항상 아름다운 과장으로 범벅이 되는 것일지는 몰라도, 그 때의 추억은 제 머릿속에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을극장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머리가 굵어진 후, 우연히 그 영화의 원작이 책이란 것을 알았어요.
작가는 '위화(여화)' 책 제목은 '인생(살아간다는 것)' 입니다. 영화와 책은 조금씩은 다릅니다. 아마도 그걸 각색이라고 하나 봅니다.
책이건 영화건 본론을 얘기해야죠. 너무 사담이 길었습니다.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제법 있어서, 도련님 소리를 듣는 철부지가 있습니다. 이름은 '푸구'. 결혼도 해서 딸까지 하나 있는 이 녀석은, 가족의 만류에도 도박과 기생에 빠져 삽니다. 결국 도박으로 모든 것을 잃습니다. 집도, 땅도, 도련님이라는 지위도, 곧이어 아버지, 어머니도 말이죠.
그나마 다행인 점은 푸구가 젊다는 것과 그의 아내 '자전'은 착하고 지혜롭다는 것 입니다.
'푸구'와 '자전' 그리고 사랑하는 딸 '펑샤'와 막내아들 '유칭' 이들이 가족이라는 것도 눈물나게 다행입니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풀처럼 사는 사람들. 이들의 행복을 빌어주실래요? 저도 여러분의 행복을 빌어드리겠습니다.
아래는 그냥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1. 나만 모르는 것
그가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위가 다 알아도 정작 본인은 모릅니다.
'반만 잃었을 때 알아차렸다면.', '집만이라도 살렸다면.' 싶지만, 푸구는 파산을 할 때까지 알지 못합니다. 매일같이 외상장부에 지장을 찍으면서도, 아내 '자전'이 임신한 몸으로 걸어와서 하소연을 해도 알지 못합니다.
답답합니다. 책속으로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서 멱살을 잡고 한 대 때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책 밖으로 나와 봤는데 저 역시 뭔가를 계속 잃고 있네요. 시간, 금전,......을 말입니다. '푸구'와 같은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잃고 있는 것과 버려야 할 것 그리고 새출발의 기초자산
푸구는 재산과 가족을 잃고 있었고, 도박과 기생을 버려야 했습니다.
책 속의 푸구 인생과 때때로 들려오는 다른 사람의 인생은 훤히 보이는 것 같은데, 막상 자신의 인생은 잘 모르겠습니다. 잃고 있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알 것도 같으면서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끼적여 보면 버려야 할 것은 '같지 않은 학벌'과 '자존심', '주위의 시선이나 평가', '체면' 이런 것이 있네요.
푸구는 그림자극 소품(영화)과 농지(책),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로 다시 살아갑니다. 저는 무엇으로 다시 출발해야 할까요? 이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묵적도, 방향도......
써놓고 보니 일기인지 리뷰인지........
신세한탄을 공개하는 것도 같습니다만, 신세한탄이 아니라 반성하고자 함이니 좋게 봐주세요. 그리고 '무슨 짓을 하던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이 책 머릿말에서 작가가 한 말에 영향을 받아서 제가 한 동안 읊조리고 다녔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