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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문학, 소설, 등 2024. 5. 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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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잊은 그대에게

    부제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정재찬 지음

    휴머니스트 출판

     

    소풍은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런 실용적 목적도 없이 즐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가 아닌가? p.256 ‘천상병의 시 귀천을 얘기하는 대목 중에서 인용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을 아껴 최대한 합목적적으로 낭비 없이 살아야만 할 것 같은 인생에서, 아주 사소한 것에 조차 의미나 목적을 부여하지 않으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 삶에서, 그 어떤 실용적 목적도 없이 무언가 고차원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목적도 없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가 있을까 싶습니다. 작가 정재찬은 시 귀천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논다라는 행위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돈이 되고, 아파트가 되고, 외제차가 되고, 지위와 명성이 될 시간을 보내기 바쁜데, 미래를 위해 무언가 더 높아질 것 같은 기대와 목적을 세우고, 목적이 없는 삶을 회개하며 살았던 것 같은데, 지위는 밑바닥을 쓸고 있고, 잔고는 비어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낮음을 부끄러워하며 상처를 받을까 만나는 일을 저어하며 살고 있었고, 잔고를 두려워하며 웅크리고 망설이고 불안해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에 인용한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놀 수 있는' 책 입니다. '놀고 있는 책'이라고 하면 너무 비아냥대는 말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목적이 없는 책이라는 생각을 하면 읽을 수가 없지만,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읽기를 하면 조금은 편한 맘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교 졸업 이후 시를 거의 읽지 않는 저에게 여러 시를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책도 좋지만, 아마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때론 육두문자를 점잖게 섞기도 하며, 쓴웃음 짓는 것도 보고 한숨 소리도 들어가며 강의를 들었다면, 저도 아마 그의 강의에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아울러 오래 전 고교시절에 좋아했던 문학선생님의 강의가 아주 많이 그립습니다. 그렇게도 거친 남학생들을 잘 다루셨고, 문인들의 기이한 행적이나 야사를 재미있게 설명해주셨던 청주 신흥고등학교 허장무선생님의 문학시간이 저는 아직도 많이 그립습니다. 되바라진 남학생들에게는 때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쓴웃음(요즘 말로는 썪소)을 지으며, 주먹감자를 날려도 학생들을 왁자하게 웃게했던 허장무선생님의 문학수업이 그리고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선생님이 말한 "일 마치고 돌아가는 노동자의 엉덩이춤에 꽂혀 있는 시집"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 떠오릅니다. 그 바라던 세상에서 제가 밑바닥을 쓰는 하층 노동자는 되었습니다만, 엉덩이에춤에 시집을 꽂고 읽으며 살아가기엔 역부족입니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며 그 시절이 그 생각이 그립긴 합니다.

     

    정재찬교수의 이 책에 소개되진 않았지만, 수험서 에서는 유명한 시마찬가지로 수험생이었던 어린 저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시 중에서 이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장을 읽으며 추가하고 싶은 시 두 편을 적음으로 마무리 합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눍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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