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 특강>을 통해서 처음으로 오주석 선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아서 많이 좋아서 아는 분들에게 주절 주절 떠들어 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좋았다면서, 선생의 다른 책을 집어드는데 거의 반 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가 본 일도 없죠.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선생이 들려준 말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라는 놈은 참 간사하구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저에게 학창시절 미술시간은 '재미 반, 고역 반' 이었습니다. 자기표현이 서툴지만 좋았고, 친구들의 재미있어 하는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반면에, 거의 시간내에 완성을 하지 못해 쩔쩔매서 고역이었고, 난초라 그리면 대파라 놀림받기에 난감했습니다.
선생이 미술 선생님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상해 봅니다.
오주석 선생의 책을 보시면, 그림을 말해줍니다. 그림을 보는 것보다, 그림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선생이라 그런가봅니다. 선생 스스로 그림을 읽으시니, 독자에게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말해줍니다. 주역풀이를 해주기도 하시고, 그린 사람의 사귐과 일화를 말해주기도 하십니다. 저같이 미술에 소질이 없는 사람에게 '이야기로 하는 미술 시간' 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머리에 기계충자리가 있는 콧물흘리는 아이가 되어서, 오주석 선생에게 동지긴밤 이야기를 조르는 손자가 되어보는 상상도 해봅니다.
아래는 선생의 이 책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권> 중에서 "옛그림 보는 법"을 발췌해서 옮겨 적었습니다. 좋은 글이라 잊고 싶지 않아서가 그 이유입니다.
<옛 그림 보는 법> - p. 183
제목이 건방져보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 옛 그림을 잘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부분이기도 하고, 또 나 스스로도 여러 선생님과 선배들로부터 배운, 또는 스스로 터득한 몇 안 되는 지식 가운데 가장 마음 뿌듯했던 경험이었기에, 감히 옛 그림의 감상 요령을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가장 커다란 두 가지 원칙이 있으니 그것은 '옛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옛사람의 마음으로 읽는 것' 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옛 그림 읽기>와 <옛 그림에 깃든 마음>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감상 요령의 첫째는좋은 작품을 무조건 많이, 자주 보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살아 있는 생명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접근해서 지식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감상자 개개인의 체험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서로 많이 다른데, 그것은 대체로 우리가 경험한 삶의 내용이 서로 다른 데서 온다. 아무리 클래식 음악이 훌륭하고 고상하다고 학교에서 배웠어도, 또는 애국심의 발로로 우리 전통 음악을 사랑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해보아도, 일상 생활 속에서 그것을 들을 기회가 적으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기란 힘들어진다.
반면에 유명한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인 음악은 실제로 감상하기 어려운 난곡인 경우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한다.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대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그널 음악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대하여 경계심을 풀고 친근감을 느끼며 결국은 좋아하게 된다. 누구라도 그리워하게 마련인 고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친근하게 느끼니까 그 내용까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는 오랜 진리이다.
대학에서 옛 그림에 대한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작품은 김홍도의 풍속화였다. 그들에게 초등학교 이래로 가장 친숙한 옛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바로 옛 그림을 잘 감상하기 위한 첫번째 비결은 '좋은 작품을 무조건 많이, 자주 보는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안목은 설령 지적인 것이 아닌 막연한 것일지 몰라도 오히려 허황된 권위로 포장된 기성 학계의 틀에 박힌 설명보다 훌륭한 것이다. 그것은 작품을 자기만의 눈으로 소화하고 즐길 수 있는 자율적인 역량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둘째, 작품 내용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뜯어본다. 세상을 살다 보면 '보았지만 못 보았고 들었지만 못 들었다'는 정황이 있음을 종종 경험한다.
한문의 '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이불문(聽而不聞)' 이 그말이고, 영어에도 see와 look at, hear와 listen to라는 전혀 다른 표현이 있다. 주의 깊게 살펴본 사람이 감탄해 마지않는 작품도 건성으로 그저 휙 지나쳐 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마련이다. 음악에 골똘히 집중해서 귀기울이는 사람은 낮은 베이스음 하나가 바뀌는 순간에도 깊은 감동을 받지만 엉뚱한 데 마음을 쓰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음악이 자동차 소음처럼 시끄럽게만 느껴질 것이다.
작품 내용을 의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품을 내 손으로 직접, 있는 그대로 옮겨 그리는 것이다. 손은 '신체 바깥으로 드러난 뇌' 라는 말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임모(臨摹), 즉 베끼는(copy) 행위가 화가의 가장 큰 스승이다. 그것은 작가의 기술적 비밀을 공유케 하고 창작 과정에 그대로 감정 이입되도록 함으로써 작가 영혼의 미묘한 숨결까지도 추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체험은 참으로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임모할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림은 손은 물론이고, 눈과 마음으로도 베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자 자신이 마치 화가인 양, 그림의 부분 부분과 획 하나 점 하나를 그려 나가듯이 차근차근 살펴보고 또 내용을 혼잣말로라도 중얼거려 본다면 작품의 조형 세계는 우리 뇌를 통과해서 감상자 개개인의 마음속에 각별한 각인을 남기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은 눈만 감으면 그 모습이 절로 선하게 떠오를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즉 떠오르는 것은 대상을 향한 넘쳐나는 마음일 뿐이고, 그 모습 자체를 재현하는 능력이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를 보고서, "계란형 얼굴에 이마가 시원하고 결 고운 가는 눈썹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을 고르게 덮었다. 쭉 곧은 콧등은 단정하고 콧방울도 반듯하다"고 했을 때, 또 거기에 "인중은 약간 긴 편이고 입은 코보다도 작은데 입술가가 약간 들려 보일 듯 말 듯한 표정이 살포시 담겨 있다"고 했을 때,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 <미인도>를 떠올릴 수 있다.
조형을 언어로 바꿀 때 그것은 마음속에 간직하기 쉬운 그 무엇으로 바뀐다. 그림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그런 작업을 기술記述(description)이라고 부른다. 기술은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모든 조형물을 파악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기술을 통해서 확보된 기억은 한참 뒤에까지 살아 남아 이와 유사한 작품을 보았을 때 즉각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산 지식으로 활용된다. 처음 발견된 김홍도의 작품을 보고 "아, 김홍도로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훈련의 덕택이다. 물론 이런 기억은 역시 작품을 손수 베껴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조형에 관한 한 언어는 손보다 성능이 더 열등한 '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더라도 기술은 모사에 버금가게 '작품 내용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뜯어보는' 행위이다.
셋째, 오래 두고 보면서 작품의 됨됨이를 생각한다. 오래 보아서 좋은 작품이 정말 좋은 작품이다. 여기서 오래라는 말은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 몇 달 또는 몇 년에서 한 인간의 평생에 걸친 것일 수도 있다. 훌륭한 그림은 진정 훌륭한 인간과 같다.
만나면 만날수록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가치가 깎이기는커녕 오히려 세월이가면 갈수록 더 더욱 진가를 발한다. 게다가 사람처럼 늙거나 변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떤 작품은 첫눈에 아주 매력적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미력이 줄어들고, 반대로 어떤 작품은 첫대면에서는 별로 특별한 관심을 끌지 않았는데 보면 볼수록 마음이 끌리는 깊이가 있다.
<중략>
마지막으로우리는 옛 그림 속에서 지나간 역사를 볼 수 있다. 옛 그림속에는 다치지 않은 옛 그대로의 자연이 있고, 그것을 보는 옛사람들의 눈길이 스며 있고, 그들의 어진 마음자리가 담겨 있으니, 한마디로 말해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재질이 종이거나 비단이거나 간에 옛 그림은 하나의 물질 자체로서 아련하게 배어 있는 지난 세월의 향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아꼈던 많은 인물들의 고상한 입김과 정성스런 손때가 묻어 있다. 어떠한 물건도 저절로 수백 년이나 보관되는 일은 없다. 또 한 폭의 작은 그림에는 옛 문학, 옛 건축, 옛 음악, 옛 풍속, 옛 의상, 옛 글씨 등 여러 분야가 고루 관여하고 있으니 거기에 실려 있는 것들을 모두 살피자면 참으로 끝이 없다. 여기에 회화 예술만이 가지는 독자적인 깊이가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종국에는 작품을 그린 화가라는 한 인격체의 독특한 빛깔로 물들여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그림에서 한 분의 그리운 옛 조상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