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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문학, 소설, 등 2024. 5. 2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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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시인 : 신경림

    출판 : 창비

     

      

    2024 5 23일 신경림 시인이 타계하셨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집에 꽂혀 있는 달랑 두 권의 시집 가운데 하나가 신경림 시인의 농무시집 입니다. 시에 대해 문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시인과도 모르는 사이이지만, 왠지 모르게 추도하고 싶은 맘이 들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신경림 시인의 책을 몇 권 빌려서 시인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그 중 첫째로 읽은 것이 이 시집 입니다. 제목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시집입니다. 1998 3 15일이 초판 발행일이니 시인의 나이 64세에 출판된 시집입니다. (시인은 1935년 충북 충주 노은면에서 태어났고, 2024 5 22일 지병으로 별세하셨다. 향년 89 – 기사참조)

     

    시인의 노년에 출판된 시집이라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젊은이의 혈기로 과장된 이상이나 날선 정의보다 일정부분 체념하고 수긍하는 관조적인 느낌이 든다고 생각해 봅니다. 아래에는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인 제가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을 적어 본 것입니다.

     

    1부에 있는 시들은 아웅다웅 살면서 미움, 원한, 증오를 비치며 살기도 하고, 용서와 화해도 하고 수긍도 하며 살기도 하는 사람들. 이도저도 아니게 경계도 희미하게 뭉개지고 닳아져 살아가며 익숙해지는 삶에 대한 시선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2부의 시들 중에서 <더딘 느티나무>라는 시를 보면 거기서 거기인 숙명 같은 인간사 가족사. 그저 그런 운명에 대한 체념과 수긍 그리고 회한 같은 정서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아래는 2부에서 인상 깊었던 시 <더딘 느티나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인용해 봅니다.

     


     

    더딘 느티나무

     

    할아버지는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짚고

    훠이훠이 바람처럼 팔도를 도는 것이 꿈이었다

    집에서 장터까지 장터에서 집까지 비칠걸음을 치다가

    느티나무 한그루를 심고 개울을 건너가 묻혔다

    할머니는 산을 넘어 대처로 나가 살겠노라 노래삼았다

    가마솥을 장터까지 끌고 나가 틀국수집을 하다가

    느티나무가 다섯자쯤 자라자 할아버지 곁에 가 묻혔다

    아버지는 큰돈을 잡겠다며 늘 허황했다

    광산으로 험한 장사로 노다지를 찾아 허둥댄 끝에

    안양 비산리 산비알집에 중풍으로 쓰러져 앓다가

    터덜대는 장의차에 실려 할아버지 발치에 가 누웠다

    그 사이 느티나무는 겨우 또 다섯자가 자랐다

    내 꿈은 좁아빠진 느티나무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을 건너 산을 넘어 한껏 내달려 스스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런 자신이 늘 대견하고 흐뭇했다

    하지만 나도 마침내 산을 넘어 강을 건너 하릴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 발치에 가 묻힐 때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싫어 들입다 내달리지만

    느티나무는 참 더디게도 자란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것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3부의 정서는 시인 스스로의 풀지 못한 내면의 문제들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부의 시는 모르겠습니다.

    5부에는 부질없음이나 초연이 주된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치열하게 이상을 위해 살아왔든, 전쟁을 몸의 상처로 증언하는 삶을 살아왔든, 그저 그렇게 떠밀리는 삶을 살아왔든, 지나고 보면 모두 꿈결같이 흘러왔고 때론 부질없이 지나왔을 뿐인 것을. 어쨌든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니 부질없음이 아니라 달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초연이나 수긍정도라고는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래에 <잔잔한, 슬픈 미소>라는 시를 옮겨 봅니다.

     


    잔잔한, 슬픈 微笑

    奈良 法隆寺에서

     

     

    쿠다라 관음만이 잔잔히 웃고 있다.

    모든 부처들이 사납게 눈을 부릅뜨거나

    금방 공격할 듯

    창과 칼을 겨누고 있는 사이에서.

    아무렴, 미소가 쇠를 녹이고 말고,

    창과 칼을 녹이고 그 속에 든

    독도 삭일거야.

     

    호텔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니

    머리에 띠를 두른 데모대가 아우성이다,

    정신대는 그네들의 상행위였다 !”

    “:국가배상 결사반대 !”

    화면은 바뀌어 이번에는 오사까 전자상가에

    한국 관광객들이 몰려 법석을 떤다,

    나라 안에서는 쪽발이 어쩌면서 치떴을 눈에

    잔뜩 물욕의 핏발들이 서서.

    그 미소는 저 아우성도 녹이고 말고.

    아무렴, 저 뻔뻔스러움도 삭이겠지.

     

    쿠다라 관음의 미소는 잔잔하다.

    일그러진 입술, 어두운 눈빛, 그 천오백년의 잔잔한

    슬픈 미소.

     


    쿠다라 백제의 일본음이며, 쿠다라 관음상은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법륭사)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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