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 김훈

1. 관계, 사연 그리고 사람

문정수는 기자입니다.
많은 사건이나 사고를 경험합니다. 취재를 하며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수록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수록 그들의 사연을 알아갑니다. 사람을 닮은 사연들은 각자의 색을 갖고 명멸합니다. 간척되어 마르는 해망지역 못의 물고기처럼 살아 꿈틀거리고 모두가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그 사연들을 묻어야 합니다. 신문이 브리태니커가 되는 일은 막아야 하니까요. 기사가 되는 것은 사연을 배제한 무채색의 사실들 입니다. 이런 무채색의 사연들은 일기예보 보다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짧은 탄식이나 동정의 대상이 될 뿐이죠.

임금님 귀의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의 심정으로 문정수는 체한 듯 걸려있는 사연들을 노목희에게 이야기하면서 풀어냅니다. 묻어도 자꾸 살아나는 사연들을 노목희에게 방류합니다.
문정수에게 노목희는 대밭이기도 하고, 해망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노목희는 미대를 졸업한 교사였고 출판사 직원입니다.
대나무밭으로서의 일상도 좋아하는 노목희는 문정수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문정수가 그녀의 대밭에서 위안을 얻는 것처럼, 그녀도 문정수의 주절거림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그녀도 변화하는 세상의 빛과 색을 그림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주저함이 있어서인가 봅니다. 만물의 변화를 단정 짓지 못하는 그녀의 주저함은 어쩌면 넘치는 사연을 다 품지 못해 괴로워하는 문정수의 그 어떤 면모와 닮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장철수
그는 불만과 개혁, 운동이라는 색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색을 잃고 맙니다.
어쩌면 색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신문에서 색을 빼버린 사람들 이야기처럼 색이 빠져 보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세 사람 외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금자, 그녀의 아들, 소방관 박옥출, 제3자와 그의 어머니, '남'이나 '오'처럼 성만 나오는 사람, 존속살인범, 익명의 익사자, 방미호와 방천석, 후에, 미군 공보관, 횟집마을 사람들......
관계의 밀접함에 따라 사연과 사람은 색이 있을 겁니다.
사람에 따라, 관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색일 테고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멸하는 색일 테지요.
노목희가 창야의 저수지에서 포착하지 못해 그리지 못하는 그런 빛과 색일 테고요.
문정수가 가슴에 품기에 벅차서 방류해야만 하는 사연과 사람일겁니다.

바람에 날리며 해망의 간척지를 덮는 풀씨처럼 살아도.
다른 사람들이 흑백으로 보는 삶을 살아도.
한 줄짜리 기사거리도 못되는 삶을 살아도.
바다를 그리며 머리가 깨지도록 수조를 들이받는 바다사자처럼 지향점을 갖고 살고 싶네요.
혐오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색깔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색 자주 변하고, 금세 사라질지라도 말이죠.

2. 맑게 소외된 자리

책을 읽고 난 후 감상은 "허무"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지만 허탈합니다.
그 많은 사연들은 숫자로만 기록되는 익명의 사망자들처럼 덤덤하고요, 명멸하는 사람들의 삶은 기사처럼 감흥이 없습니다. 문정수는 데면데면하고, 장철수는 색을 빼버렸습니다. 그나마 노목희가 유학 가는 장면을 희망적이라고 봐야 하나요?

작가의 말에서 김훈 작가는 이렇게 말하네요.

[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 문제다. (p. 325) ]


작가의 심중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맑게 소외된 자리'가 뜻하는 바도 알기 힘들죠.
그러나 작가가 <공무도하>같이 허무로 가득한 책을 연이어 써 낸다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확실히 '소외된 자리'를 체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감상을 '허무'로 받아들인 저의 개인적 잡생각일 뿐입니다.

해망 바다의 풀씨에게 허무는 없습니다.
수조 안에 갇힌 바다사자에게도 없습니다.
오금자, 박옥출, 등 많은 사람들에게 허무는 사치일겁니다.
실망이나 좌절 같은 허무와 유사한 감정은 있겠지만 허무보다 앞서는 것은 배고픔 같은 생존에의 욕구일겁니다.
오금자씨처럼, 그 아이처럼, 박옥출씨처럼일지라도, <남한산성>에서 말 먼지에 피바람이 몰아쳐도 그저 살고 죽는 사람들처럼요. 일단은 살고 봐야죠.

생각해보면 저 같은 단순한 놈의 생존을 위해서 작가는 부러 허무를 내뱉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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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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