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2-무라카미 하루키

 

 

* 아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2권의 구절 인용입니다.

 

 

기억나지 않아요. 그때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것 같아요. 기억하고 있는 건 단지 그 늦가을 비가 오는 날 저녁나절에 어느 누구도 나를 꼭 안아 주지 않았다는 사실뿐. 그것은 마치 내게 있어서 세계의 끝과 같은 것이었어요. 어둡고 힘겹고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꼭 껴안아 주었으면 했는데, 그때 주위에 자신을 안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이해하겠어요?

......

이 세상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외톨이가 될 수는 없어. 모두들 어딘가에서 조금씩 연결되어 있지. 비도 내리고, 새도 울고, 배에 상처가 나고, 어둠 속에서 여자 아이와 키스하는 일도 있지.

 

 


 

나는 주어진 숫자를 머리 속에서 주물럭주물럭 반죽해 다르게 바꾸어 버리는 것만으로 세상과 관련을 맺고, 그 이외의 시간은 혼자서 케케묵은 소설을 읽거나, 비디오로 할리우드의 옛날 영화를 보거나, 맥주나 위스키를 마시면서 내 삶을 지탱해 왔다. 자연히 신문이나 잡지 같은 걸 훑어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빛을 잃어버린 수수께끼 같은 어둠 속에서, 무수한 구멍과 무수한 거머리들에 둘러싸인 지금은 신문을 읽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햇볕이 드는 따사로운 곳에 걸터앉아, 고양이가 우유 접시를 핥듯이 신문의 구석구석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깡그리 읽는 것이다. 그래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단편들을 몸 속으로 빨아들이고, 세포 하나하나를 기름지게 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구두 굽으로 땅에 원을 그렸다.

테두리가 완성되어 있어. 그래서 여기에 오래 머물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점점 그들이 옳고 내가 틀린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게 되지. 그들이 너무나 빈틈없이 완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구. 내가 하는 말 이해할 수 있겠어?

………..

그것과 마찬가지야. 이 도시의 완전함과 완결성이란 그 영구 운동과 같은 거라구.

원리적으로 완전한  세계 같은 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그러나 여기는 완전해. 그렇다면 어딘가에 반드시 장치가 있을 거야. 실은 영구 운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계가 뒤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외적인 힘을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

너는 자신을 상실한 게 아니야. 다만 기억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을 뿐이지. 그래서 넌 혼란스러운 거야. 그러나 결코 네가 틀린 게 아니야. 가령 기억이 상실되었다 해도,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 마음이란 것은 그 자체의 행동 원리를 가지고 있어. 그게 곧 자기지. 자신의 힘을 믿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넌 외부의 힘에 이끌려서 수수께끼와도 같은 장소로 끌려가게 된다구.

 

 


 

당신이 이제부터 가게 되는 세계에 나도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 세계를 버리고?


, 그래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여기는 시시한 세계예요. 당신의 의식 속에서 사는 것이 훨씬 즐거울 것 같아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 의식 속 따위에서 살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 누구의 의식 속에서도 살고 싶지 않다.

 

 

 

그들은 구덩이를 파는 것 자체가 목적이네. 단지 구덩이를 파고 있을 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순수한 구덩이지.

? 잘 모르겠습니다.

간단해. 그들은 단지 구덩이를 파고 싶으니까 파고 있는  걸세. 그 이상의 목적은 아무것도 없지.

………….

우리는 여기서 모두 제각기 순수한 구덩이를 계속 파고 있는 것뿐이야.

목적이 없는 행위, 진보도 없는 노력, 아무데도 다다르지 않는 보행, 멋지다고 생각지 않나?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지, 아무도 앞질러 가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추월당하지도 않네,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는 걸세.

 

 


 

우선 마음의 문제야. 너는 나한테 이 도시에는 싸움도, 미움도, 욕망도 없다고 했지?

그건 그것대로 좋아. 나도 기운만 있으면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야. 그런데 싸움과 미움과 욕망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반대의 것도 없다는 얘기기도 하지.

그건 기쁨이고. 행복이고. 애정이야.

절망이 있고 환멸이 있고 비애가 있음으로 해서 기쁨이 생기는 거야 절망이 없는 행복 따위는 아무데도 없어. 그게 내가 말하는 자연스러움 이라는 거야.

 

 

 

세계의 끝 =

내가 잃어버린 것과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불사의 세계

 

 

 

내가 이 도시의 어딘가에 반드시 출구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처음에는 직감이었어.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확신을 하게 되었지. 그 까닭은 이 도시가 완벽한 시가지기 때문이지.


완벽하다는 건 필연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이 곳은 도시라고 얘기할 수 조차 없어.

좀 더 유동적이고 총체적인 그 무엇이야. 모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어 가고, 그리고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다구.


, 이곳은 결코 고정적으로 완벽한 세계는 아니란 거야.

다시 말해 움직이면서 완벽해 지는 세계란 말이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탈출구를 원한다면, 탈출구는 있게 마련인 거야.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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