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1 - 느슨한 관계

어떻든 나는 그녀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나이가 몇 살인지도. 생일조차 알지 못한다. 학력도 알지 못한다.
가족이 있는지 어떤지조차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비처럼 어디선가 와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다만 기억만을 남겨 놓고.


# 장면2

나는 낙수물을 쳐다보면서 자신이 무엇엔가에 포함된다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 때문에 울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몹시 먼 세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달인가 우주인가 그런 곳에서의 사건처럼 느껴진다. 결국 그건 꿈인 것이다.
손을 제아무리 길게 내뻗어도, 제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나는 거기에 당도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어째서 누군가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가?'


# 장면3

하지만 이루카 호텔로 돌아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화로 방을 예약하고,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에 가면 그걸로 끝날 일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호텔인 동시에  하나의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호텔이라는 형태를 취한 상황인 것이다. 이루카 호텔로 돌아간다는 것은, 과거의 그림자와 다시 한 번 상대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렇다, 내가 이 4년 동안 조용히 부지런히 모아온 모두를 송두리째 포기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일인 것이다. 물론 나는 그다지 대수로운 것을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다. 그 거의 대부분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잠정적이고 편의적인 잡동사니였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으며, 그 같은 잡동사니를 제법 그럴싸하게 짝을 맞춰 가지고 현실과 자신을 연결하고, 내 나름의 조촐한 가치관에 기초한 새로운 생활을 쌓아 온 것이다. 다시 한 번 전의
텅 빈 자리로 되돌아 가라는 것인가?
창문을 열고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라는 것인가?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로선 그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밖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장면4 - 이해받고 싶어하면서, 거부하는 하루키(1)

- 어린왕자에서 여우의 이름 그리고 김춘수의 꽃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자기 소개.
옛날, 학교에서 자주 했다.
학급이 새로 편성되었을 때, 순번으로 교실 앞쪽에 나가서, 여럿 앞에서 자신에 관해 여러 가지를 지껄인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질색이었다. 아니, 질색일 뿐만도 아니었다.
나는 그러한 행위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내가 내 의식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일까?
바로 테이프레코드에 ㅜ치입한 소리가 자신의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내가 파악하는 나 자신의 상은, 왜곡되게 인식되어 적당하게 변형되어 만들어진 상은 아닐까?......

언제나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럴 때, 나는 되도록 해석이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이야기하도록 마음을 썼지만, 그래도 어쩐지 가공의 인간에 대한 가공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

하지만 아무튼, 무엇인가 지껄이기로 하자.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 지껄이는 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것이 우선 제 1 보인 것이다.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못한 것인지는 나중에 다시 판단하면 된다.
나 자신이 판단해도 되고 다른 누군가가 판단해도 된다.


#장면5 - 이해받고 싶어하면서, 거부하는 하루키(2)

나는 색다른 인간은 아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평균적인 인간이라곤 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러나 색다른 인간도 아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지극히 성실한 인간인 것이다. 매우 직선적이다. 화살처럼 직선적이다. 나는 나로서 극히 필연적으로, 극히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자명한 사실이어서, 타인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파악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전혀 관계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나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우둔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계산이 빠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려면 어떤가. 게다가 '실제이상으로'라는 표현을, 내가 파악한 나 자신의 상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나는 어쩌면 현실적로 우둔하며, 어쩌면 계산이 빠르다.
그것은 뭐 어느 쪽이건 좋다.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는 오해라는 것은 없다. 사고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장면 6 - 결국, 밀어내는 건, 하루키 아닌가?

내 방에는 두 개의 문이 달려 있는데 하나가 입구이고 하나가 출구다
호환성은 없다.
입구로는 나갈 수가 없고, 출구로는 들어올 수가 없다. 그건 뻔한 일이다.
사람들은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간다. 어느 누구는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기 위해 나갔으며, 어느 누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나갔다. 어느 누구는 죽었다. 남은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부재를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 사라져 간사람들을. 그들이 입에 담은 말들이랑, 그들의 숨소리랑, 그들이 읊조린 노래가 방의 이 구석 저 구석에 티끌처럼 떠돌고 있는 게 보인다.


# 장면 7 - 그의 허무를 딛고 나의 허무에서 탈출.

새벽녘에 나는 혼자서 멍청하니 달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고 생각했다. 나는 이윽고 또 어디선가 다른 여자와 해후하게 될 게다. 우리들은 유성처럼 자연스레 연관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시 헛되이 기적을 기대하며, 시간을 갉아먹으며, 마음을 마멸시키며, 헤어져 가는 것이다.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 장면 8 - 가장 실체가 있었던 시간

입구와 출구.
죽어버린 친구와 둘이서 다니던 조그마한 스넥 바 일도 생각났다.
우리는 거기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이 이제껏 인생에서 가장 실체가 있는 시간이었던 것처럼 느낀다.

#장면 9 - 요구하지 않는 사이

그녀가 사라져 갔다는 것은, 내 속에 예상 이상의 상실감을 가져왔다.
얼마 동안은,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모두가 차례차례 사라져가고, 나만이 연장된 유예 기간 속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었다.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인생.

하지만 그것이 내가 공허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마음 밑바닥으로부터는 그녀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그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와 함게 있는 것이 좋았다.
그녀와 둘이 있으면, 나는 쾌적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온순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은 나는 그녀를 요구하고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 나는 그 사실을 명백히 인식했다.


#장면 10 - 군중 속의 여유, 적당한 거리

나는 예전에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는 어떤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좀 마시고 간단한 식사를 했다.지저분하고, 시끌시끌하고, 값이 싸고, 맛이 좋은 가게였다. 나는 혼자서 밖에서 식사를 할 때는 언제나 될 수 있는 대로 시끌벅적한 음식점을 택하기로 하고 있었따. 그러는 편이 안정이 되는 것이다.
쓸쓸하지 않으며, 혼잣말을 해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 장면 11 - 당신의 매듭, 당신의 장소

"괜찮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은 이루카 호텔에 정말로 포함되어 있는 거요."
하고 양 사나이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까지도 줄곧 포함돼 있었고, 이제부터도 줄곧 포함돼 있지.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나는 거요.

여기가 당신의 장소란 말이오.
그건 변함이 없어요. 당신은 여기에 연결돼 있어. 여기가 모든 것에게 연결돼 있어. 여기가 당신을 맺어주는 매듭인 거요.

# 장면 12 - 세상의 끝에서의 노래

"춤을 추는 거요." 하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음악이 울리고 있는 동안은 어떻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이 말을 알아 듣겠는가?"
"춤을 추는 거야. 계속 춤을 추는 거요. 왜 춤추느냐 하는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거요.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멎어. 한번 발이 멎으면 이미 나로선 어떻게도 도와 주지 못하게 되고 말아.
당신의 연결은 이미 모두가 없어지고 말아.
'영원히 없어지고 마는 거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쪽 세계에서밖엔 살아가지 못하게 되고 말아.

자꾸자꾸 이쪽 세계로 끌려들고 마는 거야. 그러니까 말을 멈추면 안 돼요.
아무리 싱겁기 짝이 없더라도, 그런 건 신경쓰면 안 돼. 제대로 스텝을 밟아 계속 춤을 추어대란 말이오.
그리고 굳어져 버린 것을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풀어나가는 거요.
아직 늦지 않은 것도 있을 테니까. 쓸 수 있는 것은 전부 쓰는 거요. 최선을 다하는 거요.

두려워할 것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확실히 지쳐 있어. 지쳐서 겁을 먹고 있어.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어. 무엇이고 모두 잘못 돼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야.
그래서 발이 멎어 버리거든.

Posted by 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