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싱턴의 유령> 책 말미에
- 옮긴이의 말 김난주

 

  

렉싱턴의 유령 가장 뒷부분에 옮긴이의 말이 있습니다.

옮긴이 김난주씨의 글이죠.

하루키 속의 따뜻함을 퍼올리는 글이라 생각할 정도로 좋아서 옮겨 봅니다.

 

옮긴이의 말 김난주

출처 렉싱턴의 유령(열림원)

 

며칠 전 늦은 밤이다. 둘째 딸아이가 잠이 안 온다면서 얘기를 해달라고 칭얼거렸다.

내가 예의 옛날에 어떤 소설가가 있었는데…….. 라고 서두를 꺼내자, 아이는 또 소설가야라며 시큰둥해 했다.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야. 들어 봐 라고 달래자, 샐쭉한 표정으로 내 가슴에 기대는 딸.

 

밤마다 얘기를 해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늘 새로운 얘기를 들려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작업하고 있는 작품의 내용을 대충 각색하여 들려주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그날은, <렉싱턴의 유령>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소설가가 미국에 살았는데 미국 친구네 집을 봐주러 갔었대. 그런데 그 소설가는 너 같지 않아서 열한 시만 되면 잠을 잤다는 거야………”


얘기가, 혼자 잠자던 소설가가 느닷없이 한밤중에 깨어나 무슨 소리를 듣는 장면에 이르자, 아이의 표정은 반짝반짝 오히려 잠이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린가 싶어서, 소설가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대. 그랬더니…….


엄마, 유령이야?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무섭다고 더욱 안겨 드는 딸.

나는 순간적으로 극적인 각색을 감행하여야 했다. 한밤에 유령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으응, 그게 아니고, 그 소설가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야. 잠에서 깨어나 무슨 소리를 듣는 꿈 말이야. 그 집은 아주 오래된 집이었거든. 소설가 아저씨 혼자 자니까 아주 심심하겠지. 그래서 그 집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의 꿈 속에 나타나서 소설가가 혼자 자도 외롭고 심심하지 않게 파티를 열어 준거야.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면서 말이야.


, 그럼 그 소설가 아저씨, 아침까지 안 일어났어?


그럼, 아침까지 푹 자고 일어나서, 또 소설 썼지.


딸아이는 그제서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고 나서 잠시 생각했다.

적막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케이시.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깊은 잠을 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란 외로움과 두려움에 마음이 늙어가고 있는 그, 그를 위해 이미 죽은 많은 자들이 파티를 열어 준다면, 그는 길고 긴 잠 같은 죽음에 편안히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죽은 자들이 내미는 따스한 손길을 마주 잡을 수 있다면 말이다

 

1997년 깊어가는 가을

김난주

 

 

이 정도 따뜻함과 자기긍정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루키 소설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관찰자인 듯, 거리 두고, 외롭고, 건조하고, 때로는 괴기스럽고 차가운 하루키 소설 속의 따뜻함을 이해하고 퍼 올리려면 말이죠.

 

김난주 씨가 어떤 작품 활동을 하는지 새삼 궁금해 집니다.

소설을 써도, 아동문학을 써도, 읽어 보고 싶네요.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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