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을 기억하세요? 아니면 비교적 최근의 <논스톱>은 보신 적이 있으시죠?
대학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막연한 동경만 갖고 있던 중. 고교 시절에 이들 시트콤에서 보는 대학생활은 가슴 벌렁거리게 하기에 충분히 낭만적이고,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물론 시트콤이기에, 대학의 일부분을 그것도 약간은 과장되게 그린 것임을 곧 알게 됩니다.
시트콤 얘기로 시작한 이유는, 이 책은 개인의 경험담일 뿐, 로스쿨의 모든 것을 아려주는 책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려 함입니다.
이 책, <하버드 로스쿨>은 작가인 스콧 터로의 자전적 수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경험담이기에 그가 느낀 갈등과, 괴로움, 진로고민, 동료와의 마찰, 등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의 진술일 뿐인 한계가 있고요. 스테디 셀러라는 점이, 그의 경험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위에 말한 한계는 거의 없는 셈도 되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잠도 못자가면서 공부했노라는 그의 이야기가 저에게 별 감동은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도서관, 연구실, 강의실, 노량진, 신림동에 가도 잠못자고, 위장병 앓아가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말이죠.
다만, 그곳이 하버드이든, 신림동이든 동료와 경쟁자의 미묘한 줄타기와, 협력과 경쟁사이의 갈등, 그리고 성적에 연연해 하면서 스스로의 모멸감에서 허우적대는 모습들에는 많이 공감이 갔습니다. 비록, 오래 전, 먼 곳의, 서양사람 이야기임에도 말이죠.
아래에는 인상깊었던 부분들을 발췌해 보았습니다. (# 제목 이하가 발췌부분입니다)
# 1 로스쿨 입학 결심 ( p. 20)
저물어 가는 그 해 스탠퍼드를 오가며, 나는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고 하버드에 가기로 한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이따금 걱정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 영문과 대학원생으로 로스쿨 진학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한 친구에게 그 얘기를 털어놓았다. "있지." 그가 말했다. "만일 내가 로스쿨에 가게 된다면 난 내 적을 만나고 싶어서 가는 거야. 그거 해볼 만한 일 아냐. 그리고 만약 적을 만나고 싶다면 나는 하버드로 갈 거야. 거기 가면 분명히 만날 거라는 확신이 들거든."
나는 친구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적을 만난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영문과에서 사람들이 늘 사용하는 교묘하고 애매한 그런 표현 같았다. 그러나 그 다음 몇 주 동안 그 말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나는 그 말이 어쩐 일인지 로스쿨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 즉 두려움과 불확실함, 그리고 도전, 승리, 발견의 희망을 합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쨌든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그 이름을 붙이고 나자 나의 결정이 옳았다는 굳은 확신이 들었다.
# 2 법학은 제 2 외국어 (p. 67)
우리 부부가 동부로 떠나기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변호사를 하던 친구는, 법률 교육이란 여러 면에서 바로 제 2 외국어를 배우는 일임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다. 며칠 만에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우리는 '법률어' 강습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는 아닌데도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그 언어로 읽고 생각하도록 강요받는 언어 말이다.
# 3 배움의 만족 (p. 69)
괴롭고 떨리고 지쳐 있어도, 나는 매혹과 압도의 감정에 결코 저항하지 않았다. 나를 로스쿨로 이끌었던 그 느낌, 법률 지식이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어떻게든 확대시켜줄 것이라는 느낌이 바로 충족되었으므로.
# 4 스터디 그룹 (p. 81)
교수들은 대부분 스터디 그룹을 만들기를 권한다. 법률적 문제를 폭넓게 토론하는, 강의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습의 효과 외에도 불안정한 1년차들에게는 안정이라는 매우 귀중한 가치를 제공하는 치료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룹의 멤버들은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고 자기를 헌신적으로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인 것이다.
# 5 법은 도덕적인가? (p. 108)
민사소송법 시간에 재판관할권을 배울 때 모리스 교수는 중요해 보이는 발언을 했다. "지금쯤 로스쿨은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분은 법규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법규를 통달하여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알면 상당한 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법규들을 배우는 데 도덕적인 완결성을 버려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의 모든 국면에서 서로 경쟁하는 가치 체계들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여러분이 하나의 법규를 배우고 있기 때문에 드는 생각, 즉 처음 그 법규를 낳은 가치들을 여러분이 필연적으로 이미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 6 법은 도덕적인가?2 (p. 122)
"많은 교수들이 정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훈련으로 생각하라고 하지만, 낮에는 오염 감소 명령을 방치하는 유에스 스틸을 돕다가, 집에 가서는 시에라 클럽 같은 환경단체에서 온 우편물을 읽으면서 어떻게 자신이 온전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어?"
# 7 자신감의 상실 (p. 161)
그날 가으이실에서 나오면서 나는 정말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나는 만에게, 그리고 급우들 모두에게 나는 절대로 바보가 아니라고 멍청이가 아니라고, 나는 도전적인 많은 일들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 8 자신감의 상실2 (p. 208)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보건소가 있는 파운드 빌딩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유사시에 쓸 수 있게 벽에 장착한 소화기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나는 멀쩡하게 보이기 위해 쾌활하게 굴었다. "의사 선생을 만나려면 얼마나 크게 신음소리를 내야 할까요?" 의사의 방문을 가르키고 내가 물었다. 대답은 아주 크게 내야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간호사가 자살 문제냐고 물었다. 아, 물론 아니라고, 그저 아플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버드 로스쿨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다. 진단을 받으려면 추수감사절 이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고 했다. 나는 풀이 죽어서 약속 시간을 잡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 9 교수에 대한 반감 (p. 344)
그런 이유로 모리스 교수를 지목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이전에 페라니 교수가 나를 지명한 후에 있었던 일들과 똑같은 반응을 급우들에게서 발견했다. 말하자면 절망할 정도로 크지 않게 위협을 당했기에 내가 페라니에게 반감을 품었던 것이 아닐까. 교수들 중에 온화한 편인 모리스에 대해서만 유독 많은 학생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것도 강의실에서 일어나는 교수와 학생의 반목, 강의실 밖에서 거리두기, 시험을 당하고 점수가 매겨지는 모멸감 등 끊임없이 자행되는 모욕적인 로스쿨 생활의 문제를 모리스 교수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 10 시험에 대한 공포 (p. 353)
그러나 모리스 교수의 발표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나는 올가미에 갇힌 듯 허우적거렸다. 낙제하고 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간절하게 시험을 잘 보고 싶다는 종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작년 11월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또 다시 꽈리를 틀었다. 주말 내내, 나는 다시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가끔은 밤에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