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끔찍하고 무섭게도 늑대떼의 집요한 추격에 썰매개들은 서서히 잡아먹히고, 두 명의 사람 중 한 명도 죽고, 나머지 사람도 죽기 직전까지 내몰립니다. 그 늑대 무리 중 개에 가까운 암컷 늑대와 애꾸눈 늑대는 짝을 짓고, 늑대개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태어난 늑대개와 어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인 자연 속에서 잡아먹고 잡아먹힐 위기를 겪으며 살아나갑니다. 그러다 어미늑대는 예전에 자신을 길들였던 ‘그레이 비버’를 만나 다시 길들여진 생활을 시작하고 그 새끼 ‘화이트 팽’도 길들여진 생활을 시작합니다. 매일이 생존을 위한 활동과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이었던 자연보다 덜 위험한 길들여진 생활, 그러나 여기에도 서열과 다툼은 있습니다. ‘리프리프’를 필두로 한 다른 개들의 따돌림과 집단 구박 속에서 ‘화이트 팽’은 영리하게 때론 교활하게 잘 살아남습니다.
‘그레이 비버’를 위스키로 꼬여 망가뜨리면서 ‘화이트 팽’의 소유권을 넘겨받은 ‘뷰티 스미스’는 ‘화이트 팽’을 이용해 투견으로 돈을 벌며 ‘화이트 팽’을 학대합니다. 그래서 책에서는 ‘미친 신’으로 부릅니다. 투견판에서 학대받으며 죽어가던 ‘화이트 팽’을 구해준 것은 세 번째 주인인 ‘위든 스콧’은 ‘사랑의 신’으로 부릅니다.
‘화이트 팽’은 사랑의 신 ‘위든 스콧’을 따라 북국을 떠나 주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떠나게 됩니다. 북국의 질서와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의 환경을 벗어나 ‘화이트 팽’이 보는 신들이 잔뜩 있는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게 될 지는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2. 정말 아동 도서가 맞나?
<야성의 부름>과 <화이트 팽>을 아동도서로 분류하는가 봅니다.
<야성의 부름>에서는 개들끼리의 서열을 위한 싸움을 넘어서 죽이고 먹기까지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화이트 팽>에서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존을 위한 사냥(죽임)과 싸움이 일반적으로 나옵니다. 심지어는 길들여진 이후에도 재미를 위해 다른 개들을 사냥하는 모습까지 나오죠. 그리고 <화이트 팽>의 첫 부분은 ‘좀비 공포 영화’ 뺨칠 정도로 굶주린 늑대무리에게 쫓기며 죽어가는 눈썰매개와 주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아동도서라니 조금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제가 어느새 아동도서를 저만의 기준과 개념으로 재단질하는 꼰대가 되어 버린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쩌면 자연이든, 인간세상이든 ‘협동‘, ’조화‘, ’양보‘, ’사랑‘보다 우선되고 기본적인 사회상호작용은 생존을 위한 ‘투쟁’ 또는 ‘경쟁’이라고 생각합니다. ‘협동’이나 ‘조화’는 개인의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경쟁’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그 기본적인 생존을 충족하였을 경우에 그 이상을 바라보는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엄연히 나름의 경쟁과 투쟁을 알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숨긴 채로 ‘협동’과 ‘조화’ 또는 ‘양보’나 ‘사랑’을 주입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의문입니다.
3. <화이트 팽>역시 영화로 어떻게 각색되었는지 궁금합니다
『 젊은 우두머리는 무섭게 으르렁거렸지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간지러운 듯한 기침으로 바뀌었다. 젊은 늑대는 이미 부상당해 피를 흘리고 기침을 하면서, 늙은 늑대에게 달려들어 목숨이 꺼져가는 동안 싸웠다. 그를 받쳐주는 다리는 약해져 갔고 눈에 비친 낮의 빛은 흐릿해졌고, 타격과 도약의 강도도 계속 약해져만 갔다.
그러는 내내 암컷 늑대는 웅크리고 앉아 미소를 지었다. 암컷은 왠지 몰라도 이 싸움이 즐거웠다. 이것은 야성이 짝짓기하는 방식이었고, 자연 세계에서 수컷의 비극은 죽은 놈들에게만 비극이기 때문이었다. 생존한 놈에게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실현이자 성취였다. 』 P 195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책의 초반부에 늑대 떼들의 끈질긴 추격과 그 중에 죽어가는 개들과 사람들의 이야기, 위에 인용한 장면 외에도 자연에서 생존을 위해 죽고 죽이는 상황들, 남쪽에서 온 개들을 재미로 죽이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족영화에는 부적합할 수 있을텐데 이런 부분을 어떻게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읽은 책이었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장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썰매개들 사이에서 서열을 가리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하고 그 끝은 패배하여 쓰러진 개를 모든 개가 공격하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인 개가 눈밭의 추운 야외에서 눈을 파고 그 구덩이에서 밤을 지내는 방법을 배워 실행하는 장면입니다. 읽고 보니 그 두 장면이 이 책에도 나오더라고요. 결국 제가 어렸을 때에 읽었던 책이 이 책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이 맞았습니다.
유튜브에서 같은 제목의 영화 트레일러를 보면, 온 가족이 보면 좋을 가족영화인 듯합니다.
동물이 주인공인 다른 영화들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각색을 어떻게 했을지 궁금합니다. 책의 내용대로라면 주인공인 개 ‘벅’은 북쪽으로 끌려가서 세 번의 주인을 만나는데, 두 번째와 세 번째 주인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개를 학대하는 장면과, 개들끼리 생존을 걸고 죽고 죽이는 장면도 나오기 때문에 어떻게 가족영화로 각색을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미지출처 - 다음영화
영화와 별개로 이 책에서 이제 다 자라버린 저는 큰 재미도 의미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피식 하고 웃었던 장면과 수십 년 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어릴 적 강렬했던 장면을 다시 적어보려고 합니다.
오래도록 남은 이 책의 장면1 – 개 싸움에서 벅이 느낀 충격
『벅은 이 늑대 같은 개들처럼 싸우는 개들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첫 경험은 잊지 못할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사실, 그것은 간접경험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살아남아서 교훈을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컬리가 피해자였다. 그들은 통나무 저장고 근처에서 야영하고 있었는데, 컬리는 그곳에서 평소처럼 다정한 태도로, 다 자란 늑대만큼 크기는 해도 자기 몸집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허스키 한 마리에게 다가갔다. 아무런 경고도 없었다. 다만 섬광 같은 도약과 이빨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도약할 때처럼 재빠른 한 번의 착지밖에는, 그러고 나니 컬리의 얼굴이 눈에서 턱까지 찢어져 있었다.
그것은 늑대가 싸우는 방식이었다. 치고 빠지는 방식.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삼사십 마리의 허스키가 그곳으로 달려오더니, 둥그렇게 에워싸고 조용히 집중해서 두 마리 개의 싸움을 지켜보았따. 벅은 그들이 말없이 열중한 이유를,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입맛을 다시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했다. 컬리가 상대에게 덤벼들었으나, 상대는 두 번째 공격을 가하고는 옆으로 뛰어내렸다. 상대는 컬리가 다시 공격해 오자 특이하게 가슴으로 받아치면서 컬리를 넘어뜨렸다. 컬리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때가 바로 구경하던 허스키들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들은 으르렁거리고 컹컹 짖으면서 컬리에게 덤벼들었고, 컬리는 털을 곤두세운 무리들 밑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들에게 깔려 버렸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뜻밖의 일이어서 벅은 깜짝 놀랐다. 그는 스피츠가 웃는 것처럼 진홍색 혀를 날름거리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프랑수아가 도끼를 휘두르면서 개 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몽둥이를 든 세 남자가 프랑수아를 도와 개들을 쫓았다. 그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컬리가 쓰러지고 이 분 후, 컬리를 덮쳤던 개들 중 최후의 한 마리가 몽둥이에 쫓겨 갔다. 그러나 컬리는 피로 울글불긋 물들고 짓이겨진 채 눈밭에 축 늘어져서, 그야말로 거의 갈가리 찢겨 죽어 있었고, 가무잡잡한 혼혈 남자는 컬리 위에 서서 엄청나게 욕설을 퍼부었다. 잠을 잘 때면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 벅을 괴롭혔다. 그게 이곳의 이치였다. 페어플레이는 없었다. 일단 쓰러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랬다,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스피츠는 혀를 내밀고 다시 웃었다. 그 순간부터 벅은 지독히, 그리고 영원히 그를 증오했다.』
오래도록 남은 이 책의 장면2 – 눈밭에서 잠자리 구하는 벅
『마침내 벅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돌아가서 동료들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는 드넓은 야영지를 헤메다니면서 동료 개들을 찾아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혹시 텐트 안에 있는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벅이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정말로 씁쓸하게, 그는 막연히 텐트 주변을 맴돌았다. 갑자기 앞발 아래쪽 눈이 푹 꺼지면서 몸이 가라앉았다. 무언가가 발밑에서 꿈틀거렸다. 벅은 펄쩍 뒤로 물러나서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겁내며 털을ㄹ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귀에 익은 작은 깨갱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놓였고, 자세히 살펴보려고 다시 다가가 보았다. 따뜻한 공기가 훅 하고 그의 코끝으로 올라왔다. 저기, 눈 아래 공처럼 둥글게 웅크린 채 누워 있는 것은 빌리였다. 빌리는 벅을 안심시키려는 듯 낑낑거렸고 몸을 꿈틀거리며 호의를 보이더니, 심지어 사이좋게 지내자고 뇌물을 건네듯, 따뜻하고 축축한 혀로 벅의 얼굴을 핥았다.
하나의 교훈이었다. 그래, 저 친구들이 저런 방식으로 잔단 말이지? 벅은 자신 있게 한 장소를 고르고는, 요란하게 헛발질을 해가면서 자기가 들어갈 구덩이를 팠다. 순식간에 몸의 열기가 비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길고 고된 하루를 보낸 뒤였기 때문에, 이따금 나븐 꿈에 으르렁거리고 짖거나 몸부림치면서도, 깊고 편안하게 잤다.
눈 한번 뜨지 않고 자던 벅은 아침에 야영지의 소움에 잠이 깼다. 처음에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밤새 내린 눈으로 몸이 완전히 덮여 버렸던 것이다. 눈 벽이 사방에서 그를 압박해 왔고 커다란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은 덫에 걸린 야생동물이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벅이 새로운 삶을 통해 조상들의 생활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왜냐하면 그는 문명화된 개, 고도로 문명화된 세계의 개였고, 그동안의 경험상 덫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온몸의 근육이 발작적으로, 본능적으로 수축하면서 목과 어깨의 털이 곤두섰다. 벅은 사납게 으르렁거리면서 눈부신 아침 햇살 속으로 곧장 뛰어올랐다. 눈이 반짝이는 구름이 되어 사방에 흩날렸다. 발이 땅에 닿기 전, 하얗게 펼쳐진 야영지가 눈에 들어온 순간, 벅ㅇ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정원사 조수 매뉴얼과 함께 산책을 나가던 때부터 전날 밤 구덩이를 팔 때까지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벅이 나타나자 프랑수아가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뭐랬어?” 그 개썰매꾼이 페로에게 외쳤다. “저 벅이란 녀석은 뭐든지 빨리 배운다고 했잖아.”
페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했던 부분 – 벅의 북쪽에서 두 번째 주인 무리들의 곤경
『이쯤 되자, 남무 사람 특유의 싹싹함과 상냥함은 세 사람에게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북극 여행은 그 매력과 낭만을 잃어버렸고, 그들의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으로 견디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현실이 되었다. 이제 머세이디스가 개들 때문에 흐느끼는 일은 없어지고,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흐느끼느라, 또 남편이나 동생과 말다툼하느라 너무 바빴다. 말다툼은 그들이 결코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의 짜증은 비참함 속에서 떠올라 함께 커졌고, 비참함 때문에 배가되었으며, 비참함보다 커졌다. 열심히 일하고 고생하면서도 여전히 다정한 말과 친절을 잃지 않는 개썰매꾼들의 훌륭한 인내심을 이 두 남자와 한 여자에게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런 인내심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몸이 뻣뻣했고 여기저기 욱신거렸다. 근육이 아프고 뼈가 아프고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말투가 날카로워졌고, 아침에 그들의 입에서 처음 나오고 밤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은 죄다 거친 말들뿐이었다. 찰스와 할은 머세이디스가 틈만 주었다 하면 말다툼을 했다. 서로가 마음속으로 자기가 해야 할 몫보다 일을 많이 한다고 믿고서, 그것을 담아두지 않고 기회가 날 때마다 투덜거렸기 때문이었다. 머세이디스는 때로는 남편 편을 들었고, 때로는 동생 편을 들었다. 그러다보면 끝날 줄 모르는 꼴사나운 가족 싸움이 되었다. 찰스와 할만 관계된 말다툼이었지만, 땔감으로 쓸 장작 및 개를 패는 것에 관한 언쟁이 시작되면, 이윽고 나머지 가족들,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 삼촌, 사촌들과 죽은 친척들까지 들먹이게 되었다. 할의 예술관, 또는 할의 외삼촌이 쓴 연극 대본 같은 것이 장작 몇 개를 패는 일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
『벅은 옛 생활의 버릇이었던 까다로운 입맛을 재빨리 버렸다. 입이 짧은 편이었던 그는 먼저 식사를 끝낸 동료들이 그가 미처 먹지 못한 그의 몫을 강탈해 간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을 지킬 방법은 없었다. 그가 두세 마리 개와 싸우다 보면, 그사이 먹이는 다른 개들의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벅은 그들만큼 빨리 먹어치웠다. 그리고 배고픔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자기 몫이 아닌 것을 차지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도 그가 보고 배운 것이었다. 새로 들어온 개들 중에 파이크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벅은 영리한 꾀병쟁이에 도둑질까지 잘하는 파이크가 페로가 등을 돌린 사이 베이컨 한 조각을 교활하게 훔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다음 날 벅은 그 짓을 똑같이 따라 해 베이컨을 덩어리째 가지고 무사히 도망쳤다. 큰 소동이 일어났지만 벅은 의심받지 않았다. 대신에 항상 들키곤 하는 서투른 얼간이 더브가 누명을 쓰고 벌을 받았다.
이것이 혹독한 북국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응하면서 벅이 저지른 최초의 도둑질이었다. 그 일은 그의 적응력, 변화하는 환경에 스스로를 조화시키는 능력에 대한 증거였다.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은 언제든 끔찍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그의 도덕성이 쇠퇴했음을 뜻했다. 그런 도덕성ㅇ은 무자비한 생존 투쟁에서는 허영이자 약점이었다. 사랑과 협력의 법칙이 존중되는 남쪽 지역에선느 사적인 재신과 개인적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러나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이 지배하는 북쪽 지역에서는 그런 미덕을 가지고 있으면 바보 취급을 당했고, 지금까지 벅이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벅이 그것을 머리로 추론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적응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활 방식에 순응했던 것이다. 그는 평생, 승산이 얼마였든 간에, 싸움을 피해 도망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붉은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들고 있던 몽둥이가 벅을 때려 더욱 근본적이고 원시적인 규범 속으로 몰아넣었다. 문명화된 세계에서 그는 도덕적 명분을 위해서라면, 이를테면 밀러 판사의 승마용 채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완전히 문명에서 벗어났고, 그것은 도덕적 명분을 지키는 일을 저버리고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게 됨으로써 증명되었다. 벅은 재미로 그것을 훔친 것이 아니라,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훔쳤다. 그리고 드러내놓고 훔친 것이 아니라,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이 두려워 몰래 교활하게 훔쳤다. 한마디로, 그는 그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더 쉬워서 그 잘못들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것이 발전이든, 퇴보든 벅은 빠르게 달라졌다. 』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
– 법보다 빠른 주먹의 세상을 사는 사람의 줄타기
이 책에서 ‘벅’이 살아가는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구별된다.
도덕을 따라 사는 문명화된 세계의 규범을 따를 것인지,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에 따를 것인지 아주 명쾌하게 구별된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세상은 그 둘을 넘나드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요즘의 생각이다.
그 규범들의 혼란의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의 선의나 규범의 준수의 틈을 파고들어 무임승차하고 조롱하며 이득을 보는 사람들. 그 결과 선의와 규범의 수준을 내려놓는 사람들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아직 정답은 찾지 못했다. 그들을 정죄하고, 그들에 분노하는 것은 지양하려 한다. 정죄와 분노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이다. 다만 제1의 소명은 ‘생존의 투쟁’으로 두며 선택과 결정의 순간마다 명쾌하고 빠른 결론을 내려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명령을 계속해서 찾아야지.
대단위 사과농장이 있는 토커스 지역에 ‘임금삭감’이 이루어지고, 떠돌이 농장 노동자들의 불만과 불안이 싹트고 있을 때, 공산당원인 ‘맥’과 새로 입당을 준비하는 ‘짐 놀란’이라는 젊은이가 토커스 지역으로 향한다. 그들의 목적은 노동자들의 연대와 파업이다. 그리고 파업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의 경험은 남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자 이상.
농장 노동자들의 불만화 요구를 구체화하고, 효율적이고도 조직적인 투쟁을 위해 맥과 짐은 노력한다. 노동자 대표로 선출된 ‘런든’과, 런든의 성과와 도덕성에 근거없는 흠집을 내려했던 ‘버크’같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득 없는 이상만을 목적으로 함께 일하는 맥과 짐 그리고 관찰자 입장으로 그들과 함께하는 닥터 ‘닥’과 후방을 지원하는 ‘딕’, ‘조이’, ‘해리닐슨’. 파업 참가자들에게 앤더슨 농장을 빌려 준 ‘앨’과 ‘앤더슨’. 이들의 불안하고도 불편한 일상과 이들을 따르는 다수 노동자들의 일상은 어떻게 될 지가 이 책 대강의 내용입니다.
<의심스러운 싸움 영화 포스터>
2.개인의 권리와 소중한 일상을 위한 조직의 투쟁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고, 사랑을 하고, 멋진 집에 목표를 둘 수도 있고, 극 중의 ‘데이킨’처럼 자동차에 욕심도 부려보는 등. 개인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이나 욕망 권리를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어렸을 적, 특이점이 없는 늘 같은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기만 하였지만-그렇다고 엄청나게 도전적인 성격도 아니면서-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인 요즘은 그 일상의 소중함이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유롭고도 평화롭길 원하는 이 일상이 위협받는다면, 이 위협이 내가 가진 체제 내 도구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난 다른 이들과 연대해서 조직적인 투쟁을 할 수 있을까? 저의 성격으로는 모르는 사람과 한 배를 타며 위험을 무릅쓰고 싸움을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마도 최대한 체제 내의 해결방법을 모색하다가 좌절할 것이고, 눈물과 동정에 호소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라는 우울한 생각이 듭니다.
3.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촉발된 시위와 폭동의 간극
Black lives matter!! – 우선 저는 약탈을 제외한 이 시위의 취지에는 찬성합니다.
미국에서 백인 경찰관의 흑인 제압. 체포 과정에서 흑인이 사망하였습니다.
충분히 제압이 된 상태에서 무릎으로 엎드려 있는 흑인의 목을 죽음에 이를 때 까지 눌렀다는 점에서 경찰의 과잉진압 논란이 제기 되었고, 흑인이기에 그런 불상사가 발생했다는 ‘인종차별’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인종차별을 성토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시위가 평화시위와 함께 폭력, 약탈 시위의 모습이 보이면서 한국 내 인터넷 여론은 이 시위에 부정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이 시위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의 근거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폭력 약탈 시위로 한국 교포들이 많은 피해를 본 점
둘째, 조지 플로이드는 다수의 전과를 가진 범죄자라는 점
셋째,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동북아시아의 체제 순응적인 문화에서 저항과 시위에 대한 반감
첫째 근거는 이해도 되고 공감도 되지만, 둘째와 셋째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둘째 근거를 커뮤니티 사이트의 베스트 댓글로 적고 추천하는 행위는 어리석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것 원리 중 하나는 ‘법치주의’ 입니다. 피의자를 수사하고 체포, 기소하는 기관이 따로 있고, 피고인의 변호권리를 보장하며 재판하고 형을 확정하고,선고하는 기관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형을 집행하는 기관도 따로 있습니다.
경찰이 그 모든 권리와 절차 규정을 무시하면서 사형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온 즉결처분까지 했다는 점은 ‘법치주의’원리 자체를 무시하는 중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행위는 나중에 ‘조지 플로이드’가 다수의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임이 밝혀졌다고 해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사진 : 영화 ‘져지 드래드’ 포스터>
이 영화 초반에 져지는 불법주차된 고급 차량을 폭파시킨다.
그래도 미래가 배경인 이 장면은 재판관으로 판결, 선고와 형의 집행 권한까지 있는 상태이므로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는 많이 다르다.
이번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인한 미국 시위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나 반감, 그리고 미국 ‘흑인들이 아시아인들을 인종차별 한다’는 인종차별에 대한 그들의 이중성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 흑인들의 시위는 그들이 하고 싶고,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의 발현일 것입니다. 결과가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지위는 이번처럼 긴 세월을 따로 또 같이 싸워오며 획득한 것이고, 아시아인의 지위 역시 다양한 개인적 방법과 조직의 투쟁으로 획득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 댓글로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이중성을 성토해봐야 한국인의 지위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를 맞아 재외한국인과 한국교포를 ‘검은머리 외국인’이라고 부르며 혐오하는 행태도 한국인의 지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리가 없습니다. 유태인들과 화교들의 힘의 근원은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그들의 뿌리에 대한 정체성과 단합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이고도 소중한 나의 일상과, 여러분의 이루고 싶은 소망과 안전을 담보할 지위를 위해, 우리는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와중에라도 상황과 필요에 의해 연대하고 협동하는 방법에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아직은 서툴러도 비록 끝까지 서툴지라도, 그 연대와 협동의 필요성은 당위라고 생각합니다.
대공황의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다는 글을 보고 ‘존 스타인벡’의 책들을 골라봤습니다. 오늘은 ‘생쥐와 인간’을 읽고 써 봅니다.
1.내가 기대했던 것은 ‘삼포 가는 길’
아주 오래 전 중학생 때 읽어서 기억도 희미해진 ‘삼포 가는 길’은 지금 제멋대로 세 사람의 고독과 고단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고독과 고단함 그리고 애잔함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냉기가 되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현실로 돌아오며 온기가 도는 안도감으로 ‘삼포 가는 길’은 저에게는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생쥐와 인간’에서 ‘삼포 가는 길’에서 느꼈던 스산한 냉기와 현실로 돌아와서 얻는 안도를 느끼길 기대했나 봅니다.
2.이 책에서 인간성이나 인간애를 느끼는 사람들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계획이나 내일을 위한 계산도 꿈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박한 자영농의 꿈을 얘기하고, 내일을 위해 계산도 해가며, 사람을 모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인 ‘조지 밀튼’과 ‘레니 스몰’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아마 이런 부분들 때문에 이 소설에서 ‘인간성’이나 ‘인간애’를 느끼는 분들도 많으신 듯 합니다.
“자넨 그 얘기가 꽤나 재미있었던 모양이로군? 좋아, 얘기해주지. 그리고 나서 저녁을 먹자구……”
조지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전에도 여러 번 그렇게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며 이야기를 해나갔다.
“우리 같이 농장에서 일하는 인간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족속이지. 그들에겐 가족이란 게 없어. 사는 곳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자네도 알다시피 그들은 농장에서 일해 돈푼 깨나 만지게 되면 읍내에 나가 몽땅 털어 써버리고 다시 다른 농장으로 기어들지. 그들에게는 앞날이란 게 존재하지 않아.”
레니가 신이 나서 끼어 들었다.
“그래. 그렇지.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할 건 지에 대해 얘기해줘.”
조지는 말을 이었다.
“우린느 그렇지 않아. 우린 앞날을 생각하니까. 우린 우리에게 작은 도움을 줄 사람도 있지. 우리는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술집에 들어앉아 주머니를 털어 버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구. 다른 친구들은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도움을 청할 사람 하나 없지. 하지만 우린 달라.”
레니가 말을 가로챘다.
“우리는 달라. 왜냐구? 그건…..그건 내가 자네를 돌봐주고 자네는 나를 돌봐주기 때문이야.”
그는 활짝 웃었다.
“계속해, 조지!”
“자넨 그 이야길 아주 가슴에 새기고 있군, 자네가 얘기해보지 그래.”
“아니, 자네가 해. 나는 조금 잊어버렸거든.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 말해줘.”
“좋아 언젠간 우린 얼마간의 돈을 모아서 작은 집 한 채와 두 에이커의 땅을 장만하고 호화스런 생활을 하게 되는 거지.”
레니가 소리쳤다.
“토끼도 기르고 말이야. 계속해줘, 조지! 우리가 가지게 될 땅과 토끼장 속의 토끼들에 대해서, 겨울비와 난로 그리고 자르기조차 힘들 정도의 우유 위에 두껍게 엉켜 붙은 크림에 대해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얘기해 봐. 조지.”
“왜 자네가 직접 하지 않나? 다 알고 있으면서.”
“아니야 ….. 자네가 해. 내가 하면 딴 얘기가 되어버려. 계속해……조지. 내가 어떻게 토끼를 길러야 되는지.” 』 책인용
3.2020년 한국의 독자들은 무엇을 볼까
2020년 한국 독자들의 일반적 성향을 제가 알 수 없는데 너무 거창하게 시작했습니다.
한국독자를 일반화해서, 대표성도 없는 제가 대신 말할 순 없으니 저의 개인적인 견해로 하겠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대공황의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난과 그 중에도 드러나는 인간성과 인간애를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도무지 그런 교훈적인 내용을 도출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레니 스몰’의 욕정과 살해가 너무 끔찍해서입니다.
‘레니 스몰’의 쓰다듬는 행위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부드러운 감촉’에 집착하는 욕정의 충족일 뿐이었습니다. 죽은 쥐를 계속 쓰다듬는 장면이 이를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강아지의 죽음과 살인은 실수라기 보다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아마도 2020년 한국의 다른 독자들도 ‘동물학대’와 ‘여성살인’에 방점을 두고 읽으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의문 : 무력감과 낙담 그리고 부정적인 금지의 강화는 분노를 파생하는가?
이 소설 ‘생쥐와 인간’에서 ‘레니 스몰’은 숙모와 ‘조지 밀튼’에게 많은 금지명령을 듣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자기편인 ‘조지 밀튼’이 떠날 수도 있음으로 위협받기도 합니다.이런 금지 명령으로 인한 무력감과 낙담, 자기편의 떠남으로 받는 위협으로 인한 불안은 ‘레니 스몰’의 불안과 분노 공격성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요즘 정치, 사회 기사 뿐 아니라, 스포츠 기사에 이르기까지 댓글을 보고 있자면 편을 갈라 분노와 증오 다툼을 즐기고 키워간다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지금이 ‘레니 스몰’이 살고 있던 시기처럼 힘든 금지와 무력감 낙담의 시기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가 그런 게 아니라면 개인이 ‘레니 스몰’처럼 무력감과 낙담속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 나는 내 나라에서는 새는 바가지였다. 대학을 수석 졸업했는데도 오라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 광고쟁이가 광고만 잘하면 되지 왜 토익 성적이 필요하고, 왜 명문대 간판이 필요한 걸까? 창의력을 이런 잣대로 잴 수 있는가? ...<중략> 하지만 나는 내 나라 밖에서는 새는 바가지가 아니었다. (프롤로그 중에서) ]
책의 앞날개에 써 있는 '루저' 발언과 마찬가지로 프롤로그에 있는 '난 새는 바가지였다.'는 고백에는 지금의 성공과 뚜렷한 소신에서 오는 당당함이 묻어 있습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저는 이런 반골(?)들이 좋습니다.
어려서부터 주목 받아온 엘리트 보다 잡풀처럼 억세게 자란 인물들에게 호감이 갑니다. 예를 들면 대학진학이나 프로입단이 어려웠던 시절을 극복하고 우뚝 선 박지성 선수와 같은 인물이 제게는 영웅입니다.
이 책은 당당한 '나는 잡풀이로소이다.'는 고백과 함께 저만의 소영웅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의 극복으로 시작합니다. 계명대를 수석졸업 하고도 취업을 하지 못해 동네 간판쟁이로 살다가 어떤 계기로 유학을 결심하게 됐는지 뉴욕행 편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곳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등 말이죠.그리고 각종 수상경력과 광고회사에서의 경력, 등의 성공스토리로 이어집니다.
마무리는요?
아이디어는 빈약한 채 물량을 통한 반복 세뇌만 성행하는 광고, 돈지랄로 느껴지는 광고에 반성적 회의를 하기 시작해서 공익광고로 눈을 돌린다거나, 광고주로부터 지시를 받지 않고 먼저 제작한 광고를 파는 방식의 광고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잡풀영웅의 책인데다가, 기발한 광고 사진까지 곁들여져 있어서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저에게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아래의 내용입니다.
[ 6개월이 되자 5명만 살아남았다. 그 과정에서 빡세게 트레이닝 되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트레이닝이기도 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후배들은 국제광고 공모전에서 1등도 하고 뉴욕, 런던, 도쿄의 광고회사에서 자리도 잡았다. 내가 졸업한 이후에도 학과의 상위 5퍼센트를 차지한 것도 이들이었다.
이들은 이제석 광고연구소와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언제든 서로 뜻만 맞으면 힘을 합쳐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동료가 되었다.
p. 206 동아리 모집 ]
저 정도 실력과 유명세로도 맘과 뜻을 모아서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할 사람을 얻는 것이 저 정도로 힘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저 역시 준비하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우선 나중에라도 함께 할 사람들과 모으게 될 뜻을 세우는 것이 먼저 일지도 모르지만요.
오래 전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을 기억하세요? 아니면 비교적 최근의 <논스톱>은 보신 적이 있으시죠?
대학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막연한 동경만 갖고 있던 중. 고교 시절에 이들 시트콤에서 보는 대학생활은 가슴 벌렁거리게 하기에 충분히 낭만적이고,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물론 시트콤이기에, 대학의 일부분을 그것도 약간은 과장되게 그린 것임을 곧 알게 됩니다.
시트콤 얘기로 시작한 이유는, 이 책은 개인의 경험담일 뿐, 로스쿨의 모든 것을 아려주는 책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려 함입니다.
이 책, <하버드 로스쿨>은 작가인 스콧 터로의 자전적 수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경험담이기에 그가 느낀 갈등과, 괴로움, 진로고민, 동료와의 마찰, 등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의 진술일 뿐인 한계가 있고요. 스테디 셀러라는 점이, 그의 경험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위에 말한 한계는 거의 없는 셈도 되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잠도 못자가면서 공부했노라는 그의 이야기가 저에게 별 감동은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도서관, 연구실, 강의실, 노량진, 신림동에 가도 잠못자고, 위장병 앓아가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말이죠.
다만, 그곳이 하버드이든, 신림동이든 동료와 경쟁자의 미묘한 줄타기와, 협력과 경쟁사이의 갈등, 그리고 성적에 연연해 하면서 스스로의 모멸감에서 허우적대는 모습들에는 많이 공감이 갔습니다. 비록, 오래 전, 먼 곳의, 서양사람 이야기임에도 말이죠.
아래에는 인상깊었던 부분들을 발췌해 보았습니다. (# 제목 이하가 발췌부분입니다)
# 1 로스쿨 입학 결심 ( p. 20)
저물어 가는 그 해 스탠퍼드를 오가며, 나는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고 하버드에 가기로 한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이따금 걱정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 영문과 대학원생으로 로스쿨 진학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한 친구에게 그 얘기를 털어놓았다. "있지." 그가 말했다. "만일 내가 로스쿨에 가게 된다면 난 내 적을 만나고 싶어서 가는 거야. 그거 해볼 만한 일 아냐. 그리고 만약 적을 만나고 싶다면 나는 하버드로 갈 거야. 거기 가면 분명히 만날 거라는 확신이 들거든."
나는 친구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적을 만난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영문과에서 사람들이 늘 사용하는 교묘하고 애매한 그런 표현 같았다. 그러나 그 다음 몇 주 동안 그 말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나는 그 말이 어쩐 일인지 로스쿨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 즉 두려움과 불확실함, 그리고 도전, 승리, 발견의 희망을 합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쨌든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그 이름을 붙이고 나자 나의 결정이 옳았다는 굳은 확신이 들었다.
# 2 법학은 제 2 외국어 (p. 67)
우리 부부가 동부로 떠나기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변호사를 하던 친구는, 법률 교육이란 여러 면에서 바로 제 2 외국어를 배우는 일임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다. 며칠 만에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우리는 '법률어' 강습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는 아닌데도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그 언어로 읽고 생각하도록 강요받는 언어 말이다.
# 3 배움의 만족 (p. 69)
괴롭고 떨리고 지쳐 있어도, 나는 매혹과 압도의 감정에 결코 저항하지 않았다. 나를 로스쿨로 이끌었던 그 느낌, 법률 지식이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어떻게든 확대시켜줄 것이라는 느낌이 바로 충족되었으므로.
# 4 스터디 그룹 (p. 81)
교수들은 대부분 스터디 그룹을 만들기를 권한다. 법률적 문제를 폭넓게 토론하는, 강의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습의 효과 외에도 불안정한 1년차들에게는 안정이라는 매우 귀중한 가치를 제공하는 치료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룹의 멤버들은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고 자기를 헌신적으로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인 것이다.
# 5 법은 도덕적인가? (p. 108)
민사소송법 시간에 재판관할권을 배울 때 모리스 교수는 중요해 보이는 발언을 했다. "지금쯤 로스쿨은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분은 법규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법규를 통달하여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알면 상당한 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법규들을 배우는 데 도덕적인 완결성을 버려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의 모든 국면에서 서로 경쟁하는 가치 체계들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여러분이 하나의 법규를 배우고 있기 때문에 드는 생각, 즉 처음 그 법규를 낳은 가치들을 여러분이 필연적으로 이미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 6 법은 도덕적인가?2 (p. 122)
"많은 교수들이 정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훈련으로 생각하라고 하지만, 낮에는 오염 감소 명령을 방치하는 유에스 스틸을 돕다가, 집에 가서는 시에라 클럽 같은 환경단체에서 온 우편물을 읽으면서 어떻게 자신이 온전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어?"
# 7 자신감의 상실 (p. 161)
그날 가으이실에서 나오면서 나는 정말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나는 만에게, 그리고 급우들 모두에게 나는 절대로 바보가 아니라고 멍청이가 아니라고, 나는 도전적인 많은 일들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 8 자신감의 상실2 (p. 208)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보건소가 있는 파운드 빌딩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유사시에 쓸 수 있게 벽에 장착한 소화기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나는 멀쩡하게 보이기 위해 쾌활하게 굴었다. "의사 선생을 만나려면 얼마나 크게 신음소리를 내야 할까요?" 의사의 방문을 가르키고 내가 물었다. 대답은 아주 크게 내야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간호사가 자살 문제냐고 물었다. 아, 물론 아니라고, 그저 아플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버드 로스쿨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다. 진단을 받으려면 추수감사절 이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고 했다. 나는 풀이 죽어서 약속 시간을 잡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 9 교수에 대한 반감 (p. 344)
그런 이유로 모리스 교수를 지목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이전에 페라니 교수가 나를 지명한 후에 있었던 일들과 똑같은 반응을 급우들에게서 발견했다. 말하자면 절망할 정도로 크지 않게 위협을 당했기에 내가 페라니에게 반감을 품었던 것이 아닐까. 교수들 중에 온화한 편인 모리스에 대해서만 유독 많은 학생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것도 강의실에서 일어나는 교수와 학생의 반목, 강의실 밖에서 거리두기, 시험을 당하고 점수가 매겨지는 모멸감 등 끊임없이 자행되는 모욕적인 로스쿨 생활의 문제를 모리스 교수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 10 시험에 대한 공포 (p. 353)
그러나 모리스 교수의 발표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나는 올가미에 갇힌 듯 허우적거렸다. 낙제하고 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간절하게 시험을 잘 보고 싶다는 종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작년 11월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또 다시 꽈리를 틀었다. 주말 내내, 나는 다시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가끔은 밤에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나곤 했다.
벌써 10여년 전에 읽은 책이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이문열 작가도 조조를 높게 평하면서 그를 위한 글을 자주 이야기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1권의 절반이 조조를 위한 지면이니 말이죠.
진수의 삼국지나 배송지 주서, 자치통감을 근거로 하면서 미움 받는 조조를 위한 변명을 해줍니다.
2. 그래도 조조보다 유비가 좋은 이유
이중톈이 간웅 조조의 지원사격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조조 보다 유비가 좋습니다.
그 이유는 유년시절의 추억과 고정관념에도 있겠지만,
다음의 말이 제일 중요하게 작용한 듯 합니다.
조조가 여백사 일가족을 죽이고서 한 말 기억나시죠?
“차라리 내가 천하 사람들을 배신할 망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는 않겠다.”
그 다음은,
유비가 신야성에서 백성들을 데리고 도망가면서 남긴 말이라죠
“대체로 큰일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이인위본(以人爲本)’해야 한다. 지금 사람들이 나에게 의지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을 버리겠는가!”
삼국지에는 많은 영웅들이 등장하기에, 사람마다, 좋아하는 인물이나, 좋아하는 이유가다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에 적은 것은 저의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고, 책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으로 전체를 호도할 수도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3. 삼국지가 부럽습니다. ‘삼국지’, ‘수호전’, 등 중국 고전을 읽으면 내심 중국의 고전들이 부럽습니다.
중국이 무서운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그들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가 부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우리도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아하고, 힘이 넘치는 문화를 영위했을 것인데도, 지금의 삼국지처럼 동북아시아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 받는 것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서럽습니다.
많은 전란과 외침으로 인해, 소실되고, 단절된 문화재와 문화들이 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힘차게 다시 쓸 수 있는 마음 속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드라마 한류열풍 처럼 말이죠. 오주석 선생님의 책 ‘한국의 미 특강’을 다시 한 번 봐야겠습니다.
그 분에게 멋진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힘이 제법 날 듯 합니다.
4. 서핑하다가 새기고 싶은 글을 만났습니다.
'삼국지강의' 를 읽으신 다른 분들의 글을 읽기 위해 서핑을 하다가 삼국지 강의와는 무관하게 선무당에 관한 글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아서, 가슴에 새겨 두고자 옮겨적어 봅니다.
출처는 아래에 링크 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인은 혜안과 감동을 주지만 선무당은 사람을 죽입니다. 경험적으로 보니, 선무당에게 결정적으로 모자라는 것은 지식의 한계가 아니라 그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자기 성찰의 부족과 그에 따른 겸양의 부족입니다
그 어떤 슬래셔 무비나 전쟁영화 보다 더 참혹합니다. '참혹하다'는 표현이 진부해 보여 쓰지 않으려 했지만, '참혹함', '참담함' 외에 다른 감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어떤 슬래셔 무비나 전쟁영화 보다 참혹해서, 눈을 제대로 뜨고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종이위에 쓰여진 글자일 뿐인데, 자세히 보기가 힘겨워 빨리 읽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마치 어릴 적 '전설의 고향'을 볼때, 밤 장면만 나오면 눈 감았던 것처럼 말이죠.
아래에는 짧게 떠오르는 단상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1. 네 잘못이 아니야
예수께서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9장 1~5절-표준새번역>
요즘 교회를 다니지 않은지 수 년이 더 되었는데도. 이스마엘 베아의 글을 읽으면서 이 성경구절이 떠오르더라구요. 저는 이스마엘을 도왔던 간호사 에스더 처럼 사랑으로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 점은 네가 잘못했네." , "네가 잘못한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 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사랑도 마음도 노력으로 키워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에스더를 맘에 담아 두어야겠습니다.
2. 권정생 선생님은 뭐라 하실까?
전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이지만, 제 혈관에도 역시 가슴 아픈 내전의 기억이 흐르나 봅니다. 이스마엘 베아의 얘기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 생각에 슬퍼지니 말이죠.
제가 권정생 선생을 좋아 하는데, 베아를 보면서 '몽실언니'에 나오는 소년병이 생각나더라구요. 소설 속 인물이지만, 살아있다면 우리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됐을 소년병
권정생 선생이 이 책을 읽으셨다면, '어떤 글을 쓰실까?' '어떤 행동을 하실까?' 무척이나 궁금해 지고, 생각이 납니다.
3. 이스마엘 베아가 기억하는 아버지 말씀 (인용)
한 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 꿈이나 목표는 고사하고, 5분 앞의 생존도 알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갈 힘이 되어 주는 것중 하나는 '추억'인가 봅니다. 아래에는 이스마엘 베아가 기억하는 아버지 말씀을 인용해 봅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살아 있는 한, 더 나은 날이 오고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희망이 있단다. 더 이상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희망을 잃게 되면, 그 때 죽는 거야." 나는 여행 내내 아버지의 말을 생각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도 그 말을 생각하며 힘을 얻어 계속 나아갔다. 그 말은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