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며 잡다한 많은 생각과 감정이 차오릅니다.

다른이와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온 후루쿠라씨의 어릴적 일화는 고교 사회 시간에 배우는 "사회화" 개념의 예시로 써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남들의 말투와 의습을 흉내내고, 남들의 의아함을 떨치려 거짓말을 하는 후루쿠라씨를 보면 남들 말투를 쉽게 따라하는 제 자신이 투영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지금은 "안빈낙도"에 대한 잡생각을 써볼까 합니다.

 

안빈낙도, 안분지족

학창시절 문학시간이나 미술 시간에 조선시대 작품들의 주제로 많이 들어보셨을 단어입니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이란 너무도 그럴듯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유가의 가르침만은 아닐 것 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도 소명의식과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하는 것은 덕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연 주제파악을 하고 소임에 성실하면 만족할만한 삶인 것인가?

스스로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만족할만한 삶일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아니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후루쿠라는 18여년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성실히 생활하지만 친구들에겐 걱정과 염려의 대상으로 이물질과 다름 없었고, 점장이나 동료들에게 당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당장 대체 가능한 자원 입니다. 몸 속의 수분과 피가 계속 교체되어도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후루쿠라씨는 점내의 젓가락이나 종이컵과 같이 편의점(사회)를 유지하는 수분인 것 입니다.

 

후루쿠라씨가 근무시간 외에 무보수로 쥐위 배설물 범벅이 되어 버린 반품상품 무더기를 치우면 귀해질까요? 노약자 손님이나 임산부 손님 짐이 많은 손님들의 출입문을 열고 닫아 주며 인사를 하면 귀해질까요? 미취학 아동들이 컵라면을 먹다 데일까 끓여주고 종이컵에 나눠주고 하면 귀해질까요? 개그맨 같이 특별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매출증가를 이끌면 귀해질까요?

 

결국 후루쿠라씨는 시라이씨의 도움을 받아 알아본 일자리를 면접 단계에서 스스로 걷어차고,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편의점으로 돌아갑니다. 편의점에선 금방 대체 되어 버릴지라도 자신은 존재를 의미있게 해주는 관계가 있습니다. 손님과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 점장과의 관계. 그리고 '먹이'를 살 수 있게 해주는 급여의 지급이 있고,  대화도 있습니다. 아마도 결국 후루쿠라씨의 종말은 "겨울에 길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시라이씨 제수의 저주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빈낙도란 그 여유를 자랑할 만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정신 유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명에 충실한 삶이란 '기어 오르지 말고 주제에 맞게 박박 기어라!' 같은 말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이름없이 소명을 다하는 편의점 젓가락, 찌그러져 팔리지 않는 우묵캔 같은 편의점 인간들의 구원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인가. 경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를 뿐인데 말입니다.

 

끝으로 주제와는 무관 하지만, 개인적인 추측으로 말씀드리자면 후루쿠라씨의 동거인으로 묘샤되는 '시라이'씨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의 다른 모습이자 작가의 다른 내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인이 평범한 사회화 과정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평범하지 못하게 18여년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주위의 의문과 염려에도 게속하는 주인공 후루쿠라씨와 남들처럼 살고 싶은 욕망은 있으나 능력과 노력의 부족으로 실패하였고, 구직사이트를 뒤적이는 것조차 본인의 일이라면 힘들어 하며 세상으로부터 숨어 욕조에 웅크린채 사는 시라이씨는 주인공 본인의 분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장만 있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글이 되었지만 삭제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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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김혜나

"가야할 길이야 있겠지. 그런데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어." (p. 47)

"누군가 내 옆에 좀 있어줬으면.......(p. 79 극 중 나의 꿈)


연예인이 되고 싶은데 자꾸 빗나가기만 하는 호빠 선수 '제리'와 유일한 꿈이 누군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나'가 등장 합니다. 그 둘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곤궁한 것도 아닙니다. 당장 내일을 알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병을 앓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도 그 둘의 이야기가 이렇게 절망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둘은 꿈이 없습니다.

어쩌면 꿈이 있는데, 그것으로 가는 길이 막혀있거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꿈만 없을 뿐 아니라 안식도 없습니다. 
집도, 학교도, 술자리도, 여관방도 어디 하나 맘 편히 쉴 수 있는 곳조차 없네요. 현실에서 없을 수도 있는 누군가가 옆에만 있어준다면 그것을 최고의 안식처로 삼으려 하는데, 그게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실없어 보이지만 '시인'이 되고 싶노라고 말하는 '미주'가 낫습니다.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살아보겠노라는 '여령언니'의 꿈도 그 둘에 비하면 행복해 보일 지경이니 말이죠.

스스로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꿈을 찾지 못하는 상황과, 꿈을 명확히 알더라도

가는 길이 꽉 막혀 있다면 개인이나 사회나 건강한 것은 아닐 테죠. '나'를 응원해 봅니다. 조금은 냉소를 버리고, 부정적 시선도 거두고, 손으로 더듬으며 넘어져 무릎이 까져도 좀 걸어가야죠. 앞인 줄 알고 갔는데 그게 뒤나 옆일지라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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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 박범신

읽을 것이 없어서 도서관 서가를 돌아다니다가, 최근에 떠들썩했던 책이기에 집어 왔습니다. 말이 많았던 책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을 심심함이 이겨낸 결과죠. 이 책의 앞에 '작가의 말'에 개인적인 고민과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서 "두고 보자!"는 심산으로 읽었어요.

[ 감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현대인에게, 또 자본주의적 안락에 기대어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하는 젊은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숨기고 싶지 않다. 소망대로 잘 완성 됐는지는 물론 단정할 수 없다. 소설이란 독자와 소통의 길을 내는 것이면서 왕왕 독자의 '오해'를 만드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p. 10 중에서> ]

작가가 '감히'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고백한 것처럼 이 정도면 '인생'의 모든 것을 다루었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나처럼 저 역시 깊이 있고 연속적이진 않지만 '꿈'과 '정체성'과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니, 이 책을 읽어봤습니다.

소통

박상민과 정선배는 잡음 섞인 무전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외마디를 나눕니다.
"그 놈 중 되겠다고......"와 "도장 찍었어요." 하영교의 말대로 웃기는 화법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잠자면서 하지 못하는 얘기들을 술기운 빌듯, 무전기 잡음에 섞어서 얘기를 합니다. 일상에서는 이것저것 눈치 볼 것도, 생각해야 할 것도 많지만 그것이 점점 사라지는 상황의 힘을 빌어서 겨우 통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의 절박함과 단순한 상황

복잡한 집안 내력만큼이나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가는 두 형제.
하영교와 박상민 형제는 맘에 담고도 풀어두지 못했던 응어리들을 하나 둘 풀어냅니다. 치고받고, 악을 쓰고 욕도 합니다. 비박의 혹독함을 느끼는 신음소리와 상상,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맺힌 것이 풀립니다.
둘 만 있는 정적의 장소, 살아야 하는 이유 외에는 배제된 곳이기에 막혔던 물길이 다시 흐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에 어울리는 시가 책의 끝부분에 있어서 인용해 봐요.

[ 눈물짓는 슬픔에 찬 세상을 떠나서
  고독한 동굴을 네 아버지로 삼고
  정적을 네 낙원으로 만들라
  사고(思考)를 다스리는 사고가 기운찬 말이고
  네 몸이 신들로 가득 찬 너의 사원이니
  끊임없는 헌신이 너의 최선의 약이 되게 하라
 
                     - 밀라레파 - <p.331 중에서> ]



다시 현실로

책의 구절들 중에 맘에 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상은 모든 길이 시작되는 곳이고, 모든 선이 모여드는 곳.'

그 곳에서 응어리들이 다 풀렸는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촐라체를 넘었고, 다시 또 현실에서 시작입니다. 정선생과 박상민과 하영교는 무전기의 잡음 없이 얘기하기 힘든 일을 또 겪을지도 모르고, 묻고 싶은 것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응어리를 다시 키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소설 속 인물의 삶을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제가 가진 응어리가 있다면 풀고, 가슴 따뜻해지는 사랑도 하며, 존재의 나팔을 불어야죠. 아직 넘어야 할 정상이 무엇인지 푯대도 알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입니다만, 촐라체에 선 두 형제들처럼 정적 안에서 상황을 좀 단순화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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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아간다는 것) - 위화

우리 마을에 처음으로 생긴 공립도서관, 그 곳 강당에서 접이식 간이의자 백여 개를 놓고 한 영화상연을 통해 처음 만났습니다. 영화 제목이 '인생'. 까까머리 코흘리개 중학생이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인생'이란 제목의 영화를 보기위해 거기에 앉아있었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영화를 접하기 어려운 때라, 공짜로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겠죠.

영화 곳곳에 나오는 중국 근현대사를 몰라도(지금도 잘 모릅니다.)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추억은, 불편한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같이 영화를 보던 사람들과 같이 탄식하고, 웃으면서 호흡을 같이 한 기억입니다. 추억은 항상 아름다운 과장으로 범벅이 되는 것일지는 몰라도, 그 때의 추억은 제 머릿속에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을극장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머리가 굵어진 후, 우연히 그 영화의 원작이 책이란 것을 알았어요.
작가는 '위화(여화)' 책 제목은 '인생(살아간다는 것)' 입니다. 영화와 책은 조금씩은 다릅니다. 아마도 그걸 각색이라고 하나 봅니다.

책이건 영화건 본론을 얘기해야죠. 너무 사담이 길었습니다.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제법 있어서, 도련님 소리를 듣는 철부지가 있습니다. 이름은 '푸구'. 결혼도 해서 딸까지 하나 있는 이 녀석은, 가족의 만류에도 도박과 기생에 빠져 삽니다. 결국 도박으로 모든 것을 잃습니다. 집도, 땅도, 도련님이라는 지위도, 곧이어 아버지, 어머니도 말이죠.

그나마 다행인 점은 푸구가 젊다는 것과 그의 아내 '자전'은 착하고 지혜롭다는 것 입니다.
'푸구'와 '자전' 그리고 사랑하는 딸 '펑샤'와 막내아들 '유칭' 이들이 가족이라는 것도 눈물나게 다행입니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풀처럼 사는 사람들. 이들의 행복을 빌어주실래요? 저도 여러분의 행복을 빌어드리겠습니다.


아래는 그냥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1. 나만 모르는 것

그가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위가 다 알아도 정작 본인은 모릅니다.
'반만 잃었을 때 알아차렸다면.', '집만이라도 살렸다면.' 싶지만, 푸구는 파산을 할 때까지 알지 못합니다. 매일같이 외상장부에 지장을 찍으면서도, 아내 '자전'이 임신한 몸으로 걸어와서 하소연을 해도 알지 못합니다.
답답합니다. 책속으로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서 멱살을 잡고 한 대 때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책 밖으로 나와 봤는데 저 역시 뭔가를 계속 잃고 있네요. 시간, 금전,......을 말입니다. '푸구'와 같은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잃고 있는 것과 버려야 할 것 그리고 새출발의 기초자산

푸구는 재산과 가족을 잃고 있었고, 도박과 기생을 버려야 했습니다.
책 속의 푸구 인생과 때때로 들려오는 다른 사람의 인생은 훤히 보이는 것 같은데, 막상 자신의 인생은 잘 모르겠습니다. 잃고 있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알 것도 같으면서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끼적여 보면 버려야 할 것은 '같지 않은 학벌'과 '자존심', '주위의 시선이나 평가', '체면' 이런 것이 있네요.

푸구는 그림자극 소품(영화)과 농지(책),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로 다시 살아갑니다. 저는 무엇으로 다시 출발해야 할까요? 이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묵적도, 방향도......

써놓고 보니 일기인지 리뷰인지........
신세한탄을 공개하는 것도 같습니다만, 신세한탄이 아니라 반성하고자 함이니 좋게 봐주세요. 그리고 '무슨 짓을 하던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이 책 머릿말에서 작가가 한 말에 영향을 받아서 제가 한 동안 읊조리고 다녔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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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 김훈

1. 관계, 사연 그리고 사람

문정수는 기자입니다.
많은 사건이나 사고를 경험합니다. 취재를 하며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수록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수록 그들의 사연을 알아갑니다. 사람을 닮은 사연들은 각자의 색을 갖고 명멸합니다. 간척되어 마르는 해망지역 못의 물고기처럼 살아 꿈틀거리고 모두가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그 사연들을 묻어야 합니다. 신문이 브리태니커가 되는 일은 막아야 하니까요. 기사가 되는 것은 사연을 배제한 무채색의 사실들 입니다. 이런 무채색의 사연들은 일기예보 보다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짧은 탄식이나 동정의 대상이 될 뿐이죠.

임금님 귀의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의 심정으로 문정수는 체한 듯 걸려있는 사연들을 노목희에게 이야기하면서 풀어냅니다. 묻어도 자꾸 살아나는 사연들을 노목희에게 방류합니다.
문정수에게 노목희는 대밭이기도 하고, 해망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노목희는 미대를 졸업한 교사였고 출판사 직원입니다.
대나무밭으로서의 일상도 좋아하는 노목희는 문정수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문정수가 그녀의 대밭에서 위안을 얻는 것처럼, 그녀도 문정수의 주절거림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그녀도 변화하는 세상의 빛과 색을 그림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주저함이 있어서인가 봅니다. 만물의 변화를 단정 짓지 못하는 그녀의 주저함은 어쩌면 넘치는 사연을 다 품지 못해 괴로워하는 문정수의 그 어떤 면모와 닮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장철수
그는 불만과 개혁, 운동이라는 색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색을 잃고 맙니다.
어쩌면 색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신문에서 색을 빼버린 사람들 이야기처럼 색이 빠져 보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세 사람 외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금자, 그녀의 아들, 소방관 박옥출, 제3자와 그의 어머니, '남'이나 '오'처럼 성만 나오는 사람, 존속살인범, 익명의 익사자, 방미호와 방천석, 후에, 미군 공보관, 횟집마을 사람들......
관계의 밀접함에 따라 사연과 사람은 색이 있을 겁니다.
사람에 따라, 관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색일 테고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멸하는 색일 테지요.
노목희가 창야의 저수지에서 포착하지 못해 그리지 못하는 그런 빛과 색일 테고요.
문정수가 가슴에 품기에 벅차서 방류해야만 하는 사연과 사람일겁니다.

바람에 날리며 해망의 간척지를 덮는 풀씨처럼 살아도.
다른 사람들이 흑백으로 보는 삶을 살아도.
한 줄짜리 기사거리도 못되는 삶을 살아도.
바다를 그리며 머리가 깨지도록 수조를 들이받는 바다사자처럼 지향점을 갖고 살고 싶네요.
혐오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색깔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색 자주 변하고, 금세 사라질지라도 말이죠.

2. 맑게 소외된 자리

책을 읽고 난 후 감상은 "허무"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지만 허탈합니다.
그 많은 사연들은 숫자로만 기록되는 익명의 사망자들처럼 덤덤하고요, 명멸하는 사람들의 삶은 기사처럼 감흥이 없습니다. 문정수는 데면데면하고, 장철수는 색을 빼버렸습니다. 그나마 노목희가 유학 가는 장면을 희망적이라고 봐야 하나요?

작가의 말에서 김훈 작가는 이렇게 말하네요.

[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 문제다. (p. 325) ]


작가의 심중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맑게 소외된 자리'가 뜻하는 바도 알기 힘들죠.
그러나 작가가 <공무도하>같이 허무로 가득한 책을 연이어 써 낸다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확실히 '소외된 자리'를 체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감상을 '허무'로 받아들인 저의 개인적 잡생각일 뿐입니다.

해망 바다의 풀씨에게 허무는 없습니다.
수조 안에 갇힌 바다사자에게도 없습니다.
오금자, 박옥출, 등 많은 사람들에게 허무는 사치일겁니다.
실망이나 좌절 같은 허무와 유사한 감정은 있겠지만 허무보다 앞서는 것은 배고픔 같은 생존에의 욕구일겁니다.
오금자씨처럼, 그 아이처럼, 박옥출씨처럼일지라도, <남한산성>에서 말 먼지에 피바람이 몰아쳐도 그저 살고 죽는 사람들처럼요. 일단은 살고 봐야죠.

생각해보면 저 같은 단순한 놈의 생존을 위해서 작가는 부러 허무를 내뱉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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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 이문열

이 책은 세 개의 목차를 안고 있습니다.
고교시절 즈음에 해당되는 어린 날의 방황과 외로움을 다룬 <하구河口> 대학시절의  방황과 추억담들을 다룬 <우리 기쁜 젊은 날> 마지막으로 외로움과 허무의 정체를 알아보고자 떠난 여행을 다룬 <그해 겨울>입니다.

1. 하구

고교 중퇴로 더 일그러진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초조함과 비애의 느낌으로 책은 시작해요.
 

[ 나는 그 편지에서 우선 목적 없는 내 떠돌이 생활의 쓰라림과 서글픔을 은근히 과장하고,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 나이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과는 달리 정말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p. 10) ]



그리고 형에게로 돌아가 검정고시와 대학진학이라는 목표를 정해놓은 후의 삶도
외로움과 방황을 달래주기는 힘들었나 봅니다.


[ 추억하기조차 가슴이 서늘한 강진의 풍경 중의 하나는 그런 불면의 밤 내가 늦도록 배회하던 갯가의 둑길이다. 으스름한 달빛과 안개 자욱한 포구, 끝없이 출렁이는 갈대의 바다와 그 위를 스쳐가는 바람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구성진 울음소리......나는 그러한 것들 사이를 마치 몽유병자처럼 늦도록 거닐었다. 그리고 그때 나를 지배하는 것은 어두운 방안에서의 번민과 고뇌 대신 울고 싶도록 철저한 외로움이었다. (p. 23) ]


덜 익은 첫사랑 이야기와 이념대결의 연좌제 같은 얘기들이 곁가지를 치고 있기는 하지만 주된 내용은 외로움, 허무, 갈구, 방황 이라고 생각합니다. 갖고 있어야할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안한 맘으로 찾기는 하는데, 무얼 잃은 지도 모르는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 불안과 결핍은 대학에 가서는 어찌될까요?

2. 우리 기쁜 젊은 날

다행히 '하가'와 '김형'이라는 맘 맞는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아는 바보' 가 되어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죠. 그들과 독서 술판 토론을 하면서 나름의 재미있는 생활을 합니다.그리고 김형의 추천으로 문학회에서 나름의 인정을 받게 되죠.


[ 시처럼 힘들이지 않아도 나는 곧잘 합평회의 갈채를 받았고, 때로는 동인지나 교지에까지 실려 처음으로 활자화된 내 글을 보는 감격도 맛보았다. 그때껏 과정으로서의 삶만 살아온 내게는 처음 경험하는 존재의 외부적 승인이었으며, 초라하나마 성취의 희열이었다. (p. 86) ]


이런 행복도 꼬아보는 시선과 뒤틀린 성격으로 스스로 내치게 됩니다.
결국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하면서 그것뿐이면 너무 없어 보일 것만 같은 알기 힘든 고고함이 충돌하는 셈이지 싶습니다. 알기 힘든 그 고고함을 채워주는 것이 '앵벌이 소년과의 만남'정도가 될까요?
그리고 그 연장선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생각되네요.

3. 그해 겨울

강원도로 무작정 떠나서 '광부'가 되길 했으나 무너지는 갱도를 보고는 그만 두고, 작은 고깃배의 선원이 되고자 했으나 거절당합니다. 허락받았어도 무서웠을 겁니다. 그렇게 흘러 흘러 작은 요정이자 여관인 곳에서 허드렛일을 해봅니다.
 
고교시절부터 막연히 찾고자 했던 것.
마음 속 비어있는 그 무언가를 그렇게 찾고자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면서 타협하는 걸로 보입니다.


[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었으며 구원이었다. (p. 213) ]



책의 마지막장이 찢겨있어 결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한 장이 아무리 극적이라도 <그해 겨울>의 첫 부분을 보면 주인공 영우는 그냥 그렇게 타협하고 여전히 마음속은 비어있을 거라는 제 생각이 맞을 듯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빈 부분을 복잡한 일상과 감정, 추억들로 메우고 덮으며 살아가겠죠.

첫 부분이 이렇거든요.


[ 이제 그 겨울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미 한 가정을 거느렸고, 매일 매일 점잖은 복장과 성실한 표정으로 나가야 할 직장도 있다. 또 나이는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어 감정은 많은 여과를 거쳐야 하며, 과장과 곡필로 이루어진 미문(美文)의 부끄러움도 알게 되었다. (p. 170) ]


열정, 이상, 꿈, 희망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사는 삶을 하찮게 여길 수 없습니다. 외려 존경하는 쪽입니다. 특히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는 삶은 더욱더 존경하지요. 그리고 정답을 찾지 못해도 젊은 날의 치열한 방황과 고민도 역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말에 저까지 허무한 이유는 뭘까요.
아직 그의 고교시절만큼이나 이룬 것이 없는 것도 이유겠지요.
다른 사람의 눈병을 옮아 그 사람의 눈병이 낫는다는 속설처럼. 영우를 정상인으로 낫게 하고자 그의 허무를 떠안은 것만 같아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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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처


사람의 아들 - 이문열

1. 유다의 죄는 무엇입니까?

다니던 교회의 어느 동생이 목회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책에서 '아하스 페르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도 진실로 카인의 죄를 믿으십니까?


두 질문이 유사합니다.
모든 것이 전지전능하신 신의 계획과 예정대로라면 유다와 카인은 신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 죄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자유의지'로 선을 지키고 악을 행하지 말았어야 한다면 '자유의지'로 인해서 신의 예정은 변경될 수도 있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의문은 '그의 부정(否定)은 확신하고 긍정하기 위함(p. 75)' 입니다.
그런데 전 어지러운 논리는 질색함으로 답을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답을 알지 못함으로 아직도 어지럽기도 합니다.

2.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 '아하스 페르츠'는 종교적 교의를 이해하고자 여행을 떠납니다.
이집트의 이시스와 호루스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 고통 받으며 무력하게 죽어가는 신의 모습을. 가나안지방에서 바알신의 농경신적 요소를 흡입했음을, 바빌론에서 천지창조와 아다파왕의 생명의 식물, 지아스투라의 홍수를 봅니다. 아래에 인용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원래 야훼는 엘 사따이산에 은거하던 목양자의 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모세의 광기가 접한 호렙산의 영이 더해져  야훼는 곧 가나안의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군신으로 변질되었다. 그 뒤 엘리야와 호세아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부여했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 페르샤인들의 사탄과 종말론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야훼는 완성되었다.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을 뿐이다. (p. 169) ]


10년에 걸친 종교공부를 위한 여행과 철학의 공부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을 이기지 못한 이유로 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로 '아하스 페르츠'는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믿는 신을 만나게 됩니다.

3. 요즘 드는 의문

그가 믿는 신은 예수를 땅에 보낸 신과는 다르기에 그는 예수와 일곱 차례 논쟁을 합니다.
그 중에서 제가 요즘 가장 의문이었던 물음이 있어서 인용해 봅니다.


[ 그 다음에 당신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셨소, 보복하지 말라 하셨으며,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소.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마저 내놓고 속옷을 달라거든 겉옷까지 주며, 오 리를 가자거든 십 리를 가 주라 하셨소. 진실로 묻거니와, 도대체 당신은 그 모든 가르침의 실천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인간의 창조자 오직 당신 아버지의 선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시오? 그러나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난 자 중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따라 출발할 것이지만 결코 아무도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 나머지 -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 교훈은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오. 비록 당신으로 하여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오. (p. 202) ]


계명들이 지켜져서 지상낙원이 세워지는 것에는 반대할 사람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런 계명들은 '삼청교육대'가 범죄를 일소할 것이라고 믿는 것 만큼이나 요원해 보입니다.

4. 기독교의 변신론

그리고 해설에 보니 기독교의 변신론(辯神論-theodicy)을 얘기하네요.


[ 고통, 죄악, 죽음 등과 같은 현상들은 언제나 기존 질서의 재편성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힘이 된다. 이러한 위협들을 종교적 정당화의 견지에서 해소하여 기존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한 논리를 변신론이라고 한다.

변신론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인간들의 매저키즘적 속성이다. 인간은 자신의 불안과 욕구를 타인에게 의탁하고자 하는 자기 부정의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자기 부정적인 의탁을 가장 확실하게 받아 주는 타자가 바로 신이다.
신은 인간에 대해서 <전체적인 타자他者-Totaliter aliter)>로 가정된다. 인간은 전체적 타자에게 자기 부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의탁을 함으로서 오히려 심리적 안정과 희열을 얻는다. <나는 하찮은 존재이고 신은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신 안에 나의 궁극적인 지복이 있다> 라는 표현 속에서 매저키즘적 태도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매저키즘적 의탁은 신의 경험 불가능성에 의해 더욱 고양된다. 신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일 때 더욱 완벽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묵시적인 비난은 오히려 그 인간에 대한 명시적 정죄로 전도되고, 신의 정의에 대한 회의는 오히려 그 인간의 죄에 대한 물음으로 전도된다. 기독교에서 강하게 내세우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함,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음 등등은 모두 인간의 매저키즘적 속성을 정교하게 이용하는 변신론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도 인간의 고통을 합리화시키는 중요한 변신론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곧 인간들의 고통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기독교에서 말하는 낙원회복의 약속, 즉 메시아주의나 천년왕국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인간의 죄악과 고통을 구원해 주시지 않는가라는 경험적 반증에 대하여 기독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미래에 그 낙원을 설정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에 찬 불만을 눌러버린다. 이러한 변신론을 통하여 종교는 현실적 위협으로부터 자체의 존립을 보호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신론은 중요한 사회적 기능도 담당한다.
즉 사회에 편재해 있는 온갖 특권과 불평등과 고통을 합리화시켜 주는 것이다. 종교적 교리는 부당한 사회 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끔 강요하는 것이다. (p. 277) ]


이 이론의 완성도는 저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네요.
왜냐하면 제가 꼭 이렇습니다.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의지하고자 하고, 은총보다는 징계를 두려워하는 수준의 믿음이거든요. 극복해야겠지요.

믿기 위해 의심한다고 하면 대부분 교인들은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열 두 사도도 직업별로 믿는 방식이 제각기였다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위에 나열한 의문들과 이론들을 이론으로서 또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믿는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덧붙임 1 : 이문열 작가는 누구나 갖는 의문들(스쳐 지나갈 뿐이더라도)을 참으로 기막히게 포착하고 풀어나가는  능력이 있는 듯 합니다.

덧붙임 2 : 해설자는 "<사람의 아들>은 신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신을 부정해야 할 만큼 악화된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라고는 하지만 책 속의 비중을 생각해 볼 때는 그 이상의 비중이 있는 듯 여겨집니다.

Posted by 로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놀랐습니다.
졸업 후 지난 세월만큼의 기억들로 덮어 둔 학창시절의 정서를 어쩌면 그리고 정확히 짚어서 끄집어내는지요. 영화가 워낙 좋아서 책을 읽어봤습니다.


[ 벌써 30년이 다 돼 가지만, 그해 봄에서 가을까지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때처럼 막막하고 암담해진다. 어쩌면 그런 싸움이야말로 우리 살이가 흔히 빠지게 되는 어떤 상태이고, 그래서 실은 아직도 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p.11) ]


병태가 떠올리는 암담한 추억의 느낌으로 이렇게 소설은 시작합니다.

1. 불편한 질서

'자유당 정권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 해 3월' 서울에서 전학 온 깍쟁이 한병태는 시골학교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크기와 선생님들부터 시작해서 주먹으로 또는 최선생이 위임한 전권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급장 엄석대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엄석대에게 당하면서도 반항 없이 복종하는 아이들의 태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생활은 나름의 '불편한 질서' 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빼앗기거나 먹을 것을 바쳐야 함에도 반항 없이 무조건 복종합니다. 부당함이나 복종의 굴욕은 무서움으로 봉쇄되었고 그렇게 습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나름의 질서가 됩니다. 그 질서는 엄석대를 정점으로 주먹과 공납으로 정해진 서열이 있어 다툼이 없습니다. 청소나 실습에서 엄석대의 무서움으로 늘 1등 반이 됩니다. 모든 것을 엄석대에게 맡기고 그에게만 복종하면 되는 나름 편해 보이는 질서입니다.
마침내 아이들은 그 질서를 편안해하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 "급장이 부르면 다야?"  "급장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서 대령해야 하느냐구?"
그래도 나는 서울내기다운 강단으로 마지막 저항을 해 보았다.
그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말이 떨어지자마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댔다.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듯 (p. 29)]



한병태는 이 불편한 질서에 뻗대며 반항합니다.
'자유'니 '합리'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를 이해하고 지키고자 함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곧 닥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함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2. 질서에 합류

엄석대반의 완벽한 질서에 버둥거리며 반항하지만, 병태의 힘은 약하기만 하고 조력자도
찾을 수 없어 외롭기만 합니다. 결국 오기와 증오로 버티던 병태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질서에 합류한 병태는 학교성적과 주먹의 서열이 다시 올라가 제자리를 찾습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 동무들과도 어울리게 됐고요. 적극적으로 엄석대를 찬양하거나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전학 왔을 때만 해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아이들과 똑같아 졌습니다.

3. 질서의 붕괴

6학년이 되어 새로운 젊은 김선생은 결국 답안지 바꿔치기를 비롯한 엄석대의 비리를 알게 되고, 엄석대의 질서는 끝이 납니다. 회의의 원활한 진행이 이뤄지지 않을 때와 협동 작업에서 내빼는 아이들을 볼 때 석대시대의 질서가 주는 편의와 효용성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작은 석대의 질서는 무너졌지만, 세상의 질서에 무력한 개인의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 나는 급했다. 그때 이미 내 관심은 그런 성공의 마뜩치 못한 과정이나 그걸 가능하게 한 사회구조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과일 쪽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나도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p. 201) ]


4. '조지 오웰'보다는 '위화'에 가까운

그저 아이들의 얘기일 뿐일 수도, 다른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조지오웰이 정치적 의사표현의 도구로 우화를 사용했던 <동물농장>처럼 볼 수도 있겠죠.
특히 6학년 담임인 김선생이 아이들을 혼내는 장면에서는 더 그렇게 보이죠. 아래처럼요.
 

[ 너희들은 당연한 너희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것도 한 학급의 우등생인 녀석들이...... 만약 너희들이 계속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맛보게 될 아픔은 오늘 내게 맞은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런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모두 교단 위에 손들고 꿇어앉아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반성하도록 (p. 160) ]



그러나 이 책이 독재정권이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아이들의 세계에도 어른들의 세계에도 있는 질서 앞에서 무력한 개인의 모습, 그리고
질서의 당부를 따지기보다는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앉고 싶어 하는 개인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난 아니라고 자신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비난하기도 쉽지 않은
그런 모습을 말이죠.

P.S 인용한 페이지는 민음사 출판의 <이문열 포토로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페이지수 입니다. 다림출판의 페이지와는 맞지 않습니다.

Posted by 로처

슬럼독 밀리어네어(Q&A) - 비카스 스와루프


시크교 대표가 불참했기에 그나마 줄어든 이름 '람 모하마드 토마스' 가 등장합니다.
이런 독특한 이름을 갖게 된 그 날의 이야기부터 웃음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을 즈음에 웃음은 가라앉고 이름만큼 너울거리는 일상을 살았던 사람만
남습니다.

그는 "나 같이만 살아라." 하며 책을 낼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독백대로 '바보 같은 고야 녀석' 일 뿐이고, '학교도 못 다닌 웨이터' 일 뿐 입니다. 그는 화장실에서 냄새보다는 엉덩이 걱정을 해아 하는 지역에 주로 살고요, 배가 고프면 맥도널드의 쓰레기통을 뒤질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연고 없는 결혼식장에서 음식을 먹다가 양쪽의 가족들에게 몰매를 맞는 친구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엉터리 가이드 생활로 돈벌이하는 능글맞음도 있어요. 그리고 나라에서 제일 힘 셀 것만 같은 경찰을 무서워합니다.

이런 그도 가진 것이 있는데요.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그것은 그의 굳은 '심지' 입니다.
그 사람의 '바보 같은 고아 녀석에 불과했으니까.' 라는 독백은 자책하는 듯 하지만
전혀 움츠러들지 않습니다. 테일러 대령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이 지겨운 인도 놈들!"
이란 말을 들어도 작아지지 않습니다. 소년원에서 본 영화의 환상에 스스로 취하지도 않고,
그렇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여유마저 있지요.
그는 '살림'을 친동생처럼 보살피고, '구디야'를 불쌍히 여겨 돕습니다.
영화배우 '닐리마'를 도우려 애썼으며. '니타'를 사랑하고, '샹카르'의 죽음을 진정 슬퍼합니다.

'연꽃' 생각이 나지 않으세요?
저는 연꽃 생각이 나네요.
연꽃의 미덕은 여럿 들 수 있겠지요.
아름다움과 여러 가지의 쓰임새, 그리고 진창에서 꽃을 피운다는 점, 등이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본 연꽃의 미덕은요.
진창임에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컫는 '진창'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진창을 '용이 벗어나야만 하는 개천'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요, '더럽지만 참아준다.' 고 생각하며 고행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경험으로 체험해보자.'는 것도 물론 아니죠. 그냥 살아가는 거겠죠.
아래에 '진창'에 대한 '연꽃'의 생각이라 여겨지는 부분은 인용함으로 글을 마칩니다.


[ 우리는 짐승처럼 살다가 벌레처럼 죽어갔다.
전국에서 몰려든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빈민가에서 한 줌의 하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끊임 없이 다투었다. 한 뼘의 땅, 한 양동이의 물을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싸움이 때로는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비하르, 우타르프라데시, 타밀나두, 구자라트의 낙후지역 사람들이 다라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부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중산층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황금의 도시 뭄바이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 황금은 납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가슴이 멍들고 병들대로 병든 낙오자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나처럼! (p. 195) ]
Posted by 로처



 1984 - 조지 오웰

1.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담배나 초콜릿뿐만 아니라 식량의 배급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 '오세아니아'의 런던에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쌍방향 화상 장치가 곳곳에 - 심지어는 집안 까지- 설치되어 있고, 어린이들을 '스파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의 고발자가 되도록 교육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 조심해야 하고, 성을 내건 웃음을 짓건 주위와 같이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의심받으면 어김없이 사람이 '증발'하기에 끝이 올 때까지는 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적국과 '골드스타인'에 대한 타협 없고 대책 없는 증오를 키워가는 나라이고, 당의 완전무결함을 위해 통계와 역사를 수시로 조작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전체주의사회의 모습이기도, 독재정권아래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도 관제시위를 조장하고, 권력자 비판은 쉬쉬해야 했고, 인혁당사건처럼 사람이 '증발'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 인권상황 운운하기엔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들죠.

아무튼 이 초국가 '오세아니아'에 구호가 있습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 중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구호의 내용을 요약하고 인용해 볼게요.

2. 전쟁은 평화

초국가 세 나라(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고, 자족하기에 충분하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경제적 요인은 노동력에 국한되는 상황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전쟁인 셈이죠. 그리고 전쟁은 국지전 양상으로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합니다.

이런 전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삼국 모두가 전쟁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물질적 이유로 전쟁은 잉여생산물을 소비함으로 '부'가 하급계층에게 돌아감으로 그들에게 생활의 여유가 생기고 그것이 교육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함 입니다. 즉, 계층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전쟁으로 궁핍을 필연화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신적 이유로 긴장과 공포, 증오로 내부결속을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계속되는 전쟁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현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평화는 그들만의 '평안'을 말함이죠.


[ 옛날의 전쟁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전쟁은 한낱 협잡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서로 해칠 수 없도록 뿔이 엉뚱하게 나 있는 반추동물의 싸움과 같다. 그러나 전쟁이 비현실적이라 해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전쟁은 잉여 소비재를 소비시키고 계층적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독특한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뒤에 가서 서술하겠지만 전쟁은 이제 단순한 국내 문제일 뿐이다.

<중략>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지배자들은 서로간의 전쟁은 하지 않는다.
전쟁은 이제 지배 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도 영토의 정복이나 방어가 아니라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있다. (p. 278) ]


3. 무지는 힘


[ 상층계급은 오랜 기간 권력을 안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만간 신뢰나 효율적인 통치 능력 중 한 가지를 잃거나 두 가지를 다 잃어버리는 순간이 그들에게 닥친다. 그러면 중간계급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하층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상층계급을 전복시킨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하층계급을 다시 옛날의 노예 신분으로 전락시키고 스스로 상층계급이 된다. 이때 새로운 중간 계급은 다른 두 계급 중 하나에서 분리되거나 양쪽 계급에서 분리되어 나오는데, 이로 인해 투쟁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이 세 계급 중에서 하층계급만이 단 한 순간도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중략>

하층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변화란 그들의 주인이 바뀌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p. 282) ]



4. 사람만이 희망일까

스파이단의 일원이 된 자녀들이 부모를 고발케하여 가정을 무너뜨리고, 획일화된 증오에서
낙오되면 '증발'할 위험이 커지는 살벌한 사회, 그리고 당의 완전무결함을 위해 과거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사회에서 '윈스턴'은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저는 지금 우리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라며 말하는 '줄리아'와 사랑에 빠집니다.

전에도 사회에 대한 의문과 불만이 있던 그였지만 이제는 기계가 만든 음악을 멋지게 부르는 아주머니를 새롭게 바라보고, 당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한 너무도 인간적인 노동자들을 경멸하지 않게 되고 희망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 DAUM 영화>



영화 <아일랜드>에서 통제되고 남을 위해 죽을 운명에 있는 주인공 남녀는 버그(Bug)가 되어서 그들의 운명과 사랑을 쟁취했습니다. 이 책의 '윈스턴'과 '줄리아'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등불이 될까요?
아니면 그들만이라도 사랑과 생의 쟁취에 성공할까요?

덧 : 왜 평등을 지양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가장 중요하다고하면서 설명이 돼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윈스턴은 '방법은 알지만 이유를 모른다.'고 하는데요 구호들의 설명을 미루어볼 때 계층질서의 유지를 통한 현재체제의 유지가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봅니다.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Posted by 로처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 - 윌리엄 골딩


전쟁이 만연할 때에, 피난가던 비행기에 타고 있던 소년들이 무인도에 고립되면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뿔뿔이 흩어져있는 소년들은 생존을 위해, 기대려고 다시 모였습니다. 그리고 몸에 밴 규율을 정하며 어른의 사회를 흉내 냅니다. 리더의 권부인 '소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선출된 대장 '랠프'를 중심으로 구조를 위한 봉화를 준비하고, 오두막을 짓고, 화장실을
지정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안정을 찾은 듯 보입니다.

그러던 중에 꼬마들의 공상 속에서부터 '짐승'에 대한 공포가 떠돕니다.
'랠프'는 꿈일 뿐이라고 일축하지만 '공포'는 소년들의 주위를 맴 돕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툼이 발생합니다. 서로 기대고 모이는 것이 본성이라면, 다툼 역시 본능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며 안정적인 생활을 지도해왔던 '랠프'와 대장자리를 뺏으려는 '잭'과의 분열이 시작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소라'의 권위가 그렇게 오래 지속된 것이 외려 신기할 지경입니다. 잭은 소라 대신에 사냥의 오락과 고기의 맛으로 소년들을 모아 대장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랠프'와 대립하면서 대장의 힘을 바랐던 '잭'은 사냥을 통해 그 힘에 근접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색칠을 통해 '가면'을 쓴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랠프의 의장 같은 대장이 아닌 살벌한 전쟁 통의 군인 같은 대장으로 변합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괴물'의 실체를 알리려던 '사이먼'과 늘 이성적으로 말하던 '돼지'는 그들의 폭력으로 죽음에 이릅니다. 혼자가 된 '랠프'와 그를 쫓는 소년의 무리들간의 추격전의 긴박함은 '어른 해군'의 등장으로 구원의 빛을 찾으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소년들의 잔인한 폭력에 모든 감상을 뺏겼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생존의 욕구(본능)'이 규율(도덕, 종교, 제도)에 우선한다는 사실이 마음 가까이로 다가오더라고요. 저의 불완전한 이해와 감상으로 끝낼 수가 없기에 해설을 인용함으로 글을 마치렵니다.

<해설>을 보니 앙케이트에서 골딩은 <파리대왕>의 주제를 아래처럼 말했다네요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사회의 형태는 개인의 윤리적 성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외관상 아무리 논리적이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정치체제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모랄이다. 마지막의 구조되는 장면을 제외하고선 전편이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어른의  세계가 의젓하고 능력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섬에서의 어린이들의 상징적 생활과 똑같은 악으로 얽혀 있다. 장교는 사람 사냥을 멈추게 한 후 어린이들을 순양함에 태워 섬에서 데려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 순양함은 이내 똑같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그 적을 사냥질할 것이다. 어른과 어른의 순양함은 누가 구조해 줄 것인가?> (p. 320)



그리고 제가 '생존의 욕구'라고 막연하게 느낀 것을 '엡스타인'은 '이드(Id)라고 말하고 있네요.


[ 골딩의 베엘제버브는 무질서하고 도덕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사납게 휘몰아치는 <이드(Id)>에 해당하는 시쳇말이다. 이 이드의 유일한 기능은 기숙하고 있는 주인의 생명을 보증해 주는 것인데, 이 기능을 <이드>는 무서울 만큼 일편단심으로 집요하게 수행한다. 이 힘을 우리는 여러 가지로 부를 수가 있겠지만 신학자가 그렸건 정신분석학자가 그렸건 현대인이 그려낸 인간의 초상화는 이 힘이랄까 심령구조를 영락없이 <자연인>의 근본 원리로 포함시켜 놓고 있다. 문명의 교리, 도덕률, 사회적 관습, 자아(Ego), 그리고 지성 자체도 이 작렬하고 제어할 수 없는 힘, 즉 <인간성의 사나움과 수렁>을 가리고 있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이 근원적인 숨은 사나움이 나타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p. 321)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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