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WBC 대회 한국대표팀의 준우승을 축하합니다. 모두가 열심히 뛰어주었기에 아쉬움도 따라 크긴 했습니다. 그들이 형편없었다면 아쉬움은 전혀 없었을 겁니다.
정말 멋진 경기를 봐서 즐거웠어요. 투구, 주루, 수비, 타격 모든 부분에서 수준높은 경기를 보여준 선수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멋진 호흡을 보여준 감독님과 코치님들에게 역시 감사드려요.
베어스의 욜라 뽕따이 이종욱, 고제트 고영민, 타격머신 김현수, 이재우 트윈스의 의사 봉중근, 국민우익수 이진영 히어로즈의 장원삼, 택근브이 이택근 와이번스의 다승왕 김광현, 안방마님 박경완, 소년장사 최정, 정대현, 정근우 이글스의 별명 김태균, 류뚱 류현진, 꽃 이범호 타이거즈의 1번타자 이용규, 윤석민어린이 라이온즈의 국노 정현욱, 돌부처 오승환, 이승호 자이언츠의 에이스 손민한, 4번타자 이대호, 박격 박기혁, 국대희망 강민호 그리고 추신수, 임창용 선수
이렇게 멋진 선수들 얘기는 접어두고 저는 김인식 감독님 얘기를 하려고요. 뇌경색을 앓으셔서 불편한 몸으로 1회 WBC 4강신화를 쓰신 김인식 감독님은 사실상 국가대표 감독직을 은퇴하셨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또 국가대표 감독을 맡으셨습니다. 독이 든 성배로 생각해서인지 누구도 맡지 않으려했기 때문이죠.
평소에도 좋아하는 감독님이었는데, 더 좋아졌어요. 그래서 좀 더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어요. 감독님에 대한 책이 이 책 한 권이더라고요. 이런 책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고진현 기자에게 감사 드려요.
단기전의 신(神) 재활공장 공장장 믿음의 야구 뚝심야구 두산의 전 감독
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김인식 감독님의 수식어들 입니다. 멋지죠?
이 책은 믿음, 경험, 조화, 인재, 대화, 희망 이렇게 여섯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저는 '재활공장 공장장' 부분과 '믿음'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 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여섯가지 원칙을 '믿음' 하나로 통합하고 '재활공장 공장장'은 부연설명 정도 되겠어요.
1. 재활공장 공장장
지은이는 지연규 선수, 김인철 선수, 조원우 선수, 조성민 선수를 언급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책이 출간된 후에 LG에서 방출된 추승우 선수도 "몸 만들고 있어라."는 말로 희망을 주고 한화에 영입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타격이 부족한 편이지만 팬들은 대부분 추승우 선수의 활약을 좋아합니다.
지은이는 이런 김인식 감독의 능력을 두 가지로 분석합니다.
첫째는 자신감 결여라는 불안정한 심리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둘째는 전성기의 높은 기대치가 아닌 합리적인 기대치를 갖는 것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전력이 새롭게 가세함으로 팀 분위기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야구 - 일화
(1) 집밖에선 절대 내치지 않는다
절대로 원정경기에서 선수들을 2군으로 내려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페넌트레이스 끝까지 이를 철저하게 지켰다. 선수들에겐 김인식의 이러한 야구철학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원정경기에서 2군행을 통보받고 처량하게 짐을 꾸려 고속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쫓겨 내려가는 심정이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마치 죄인처럼 쫓겨 내려간 이들이 2군에서 신바람을 내며 운동하기를 바라면 그건 도둑놈 심보다.
<중략>
한화의 한 프런트는 "한 시즌 동안 선수단 교통비가 한푼도 안 든 것은 아마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일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원정경기에서 2군행을 통보받은 선수는 구단으로부터 교통비를 받게 돼 있다. (p. 48)
(2) 선수에게 실수를 고백
김인식 감독은 패인을 선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작전 실패가 있었다면 선수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작전 성공은 결국 세 가지 변수에 의해 좌우된다. 상대편 벤치라는 변수를 따로 떼놓더라도 작전을 내리는 나와 이를 소화하는 선수라는 두 가지 변수가 존재한다. 작전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선 작전권자와 이를 소화하는 선수의 하모니가 가장 중요하다." (p. 61)
지도자의 책임회피는 '테칼코마니 효과'로 나타난다. 감독이 책임지지 않는 팀은 선수도 똑같이 닮아간다. 감독과 선수가 한결같이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팀의 미래는 끝장이다.상황이 이쯤되고 보면 책임을 회피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눈꼴사나운 공방이 벌어지게 된다.
(3) 기다림의 미학
두산 감독시절 2001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야구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다. 8-4로 뒤진 8회말 포스트시즌 첫 경기에 등판한 투수 정진용이 잇따라 난타당하자 김인식은 주심에게 타임을 요청한 뒤 천천히 마운드로 올라갔다. 근엄한 표정의 김인식은 '포커페이스'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그 내용이 더 궁금해졌다. 경기가 끝난 뒤 살짝 물어봤다. 김인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하도 긴장하길래 '너 자꾸 이러면 앞으로 타자 시킨다'고 했지." (p. 68)
1995년 OB감독으로 부임한 김인식은 4번 타자를 좌타자 김종석에게 맡긴다. 시즌 개막 후 김종석은 중압감을 못이기고 슬럼프에 빠졌는데 감독님이 한마디 하신다.
"마음 단단하게 먹어! 못쳐도 시즌 끝날때까지 4번타자 시킬테니까."
이런 예로 지은이는 쌍방울 시절의 김원형 투수와 두산 시절의 박명환 투수의 예를 제시합니다.
뒤에 '작가의 말'에서 지은이는 이 책을 소설이라고 합니다. 소설이라니..... 여지껏 이 책을 평전이겠거니 하고 읽었는데 황당했지요. 가만 생각해보면 많은 대화들, 독백, 생각이나 상황묘사가 너무 생생하긴 했죠. 영화 <트루먼 쇼>처럼 일생을 중계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겠다 싶네요.
그래도 저는 평전이라고 생각할래요. <칼의 노래>나 <불멸의 이순신>으로 이순신 장군을 새로 알아가는 것처럼, 장기려 선생에 대해 이렇게 알아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요. 후에 <장기려, 그 사람> 이라는 평전을 읽은 후에 사실과 크게 다르다면 소설이라고 번복할 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1. 무엇을 할 것인가
[ 할머니는 늘 그를 위해 기도했다.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서 크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할머니의 바람대로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 죄송해요. 기려는 할머니가 생각하는 그런 일꾼이 되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욕심이 많아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 저를 보고 계시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p. 43) ]
한국의 슈바이처로 존경받는 장기려 선생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네요. 당연히 있을 시기를 당연히 없다고 경시하는 이면에는 다른 블로거님의 말대로 '하늘이 내린 인재'로서의 위인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장기려 선생은 서원을 합니다.
[ 그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눈을 감았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또한 수많은 기억들이 먼지처럼 떠돌았다. 그는 포충망을 들고 곤충을 채집하는 아이처럼 그 숱한 생각과 기억들 가운데 지금까지 자신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것들만 거두어들였다. 맨 마지막에 김주필과 그의 어머니가 기려의 내부로 스며들어왔다. 그것들이 기려의 내부에 들어온 대신, 그의 내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가 의사가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때 누군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엇 때문에 의사가 되려고 하느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만약 제가 의사가 된다면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p. 80) ]
조금은 유치하기도 그래서 민망하기도한 서원의 장면들조차 감동인 이유는 장기려 선생의 실천이 있기에 그럴 겁니다. 혈액이 필요해서 스스로 무리하게 헌혈을 하고, 사비를 들여 진료비에 보태고, 무의촌 진료에 열을 쏟고, 자신의 잘못이 있으면 간호사에게 무릎 꿇을 줄 아는 선생의 삶이 서원을 보증해줍니다.
나이가 들고 상황이 변하면서 융통성 있게 바뀌게도 마련인 서원. 어린 시절의 그 서원을 바보처럼 계속해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선생의 삶이 있기에 소설이라면 유치할 수도 있는 서원의 장면도 마음을 울립니다.
2. 외식하는 자들
[ 그는 병원을 쉬는 날이면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칠성문 밖 빈민촌과 용산 면의 빈민촌을 찾아갔다. 어떤 목회자들은 그가 주일성수를 지키지 않는다고 힐난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저는 의사입니다. 만약 당신이 위급한 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저와 같은 의사가 주일성수를 이유로 당신에게 오지 않는다면, 그래도 당신은 기꺼이 받아들일 자신이 있으십니까?" (p. 171) ]
불편한 진실이고, 통쾌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시선인지 정말 장기려 선생의 시선인지는 작가가 소설임을 시인하면서 알 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함석헌 선생과 가까이 사귀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작가의 시선만은 아닌 듯 합니다.
자신의 신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교리를 정통이라고 믿는 믿음, 의심이나 비판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남들을 가리키며 이단을 말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막히고 필요이상 분노하게 됩니다.
이제는 화내지 않으려고요. 이 좋은 책을 읽으면서도 그 '화'가 많은 생각을 가렸거든요. 그리고 저도 제 눈에 어떤 들보가 더 들어있을지 감당할 수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후퇴하는 군인처럼 사람보다 '국가'나 '주의'를 우선시하지는 않는지 김주필의 사례처럼 책임져야 함에도 책임을 미루었는지 한국전쟁 당시의 치안처럼 복수에 눈이 멀어 그걸 정의라고 하는지. 남과 북의 고관들처럼 어떻게든 자기 살 자리 마련에 열을 올리는지. 행동하지 않고 너무나 쉬운 비난을 하지는 않는지. 기도해야겠습니다.
3. 장기려 선생에게 환자란
좋은 구절이라 담아두고자 인용해 봅니다.
[ 그리고 그는 힘들 때마다 의학도였던 시절 스승이 들려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견뎠다.
"왜 아픈 사람을 일컬어 환자(患者)라고 하는지 아나? 환患은 꿰맬 관串자와 마음 심心자로 이루어져 있다네. 상처받은 마음을 꿰매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네. 다시 말해 환자란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줄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눈에 보이는 상처는 치유하기 쉽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네. 자네가 진정한 의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환자의 마음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 하네." (p. 406) ]
써놓고 보니, 장기려 선생의 업적이나, 빛과 소금 같았던 일생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네요. 일단 '한국의 슈바이처' 이 말 한 마디로 대신할게요. 그리고 기록이 필요하다 생각되면 <장기려, 그 사람>이라는 평전을 읽고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거칠고, 선생을 조롱하고, 야유하며 신뢰하지 않는 아이들 말입니다. 어찌보면 성급하게 '다룬다'는 시도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을 겁니다. 내가 '다루어진다' 는 느낌일 때 얼마나 끔찍할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관계개선의 시작은 '다루기 방법' 보다는 '진정한 믿음의 회복'에 있는 듯 합니다.
저도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 제가 말을 너무 쉽게 했습니다. 저는 짧은 시간 아이들을 가르쳐 봤는데요. 정말 예뻐할래야 예뻐할 수 없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표현이 완곡해서 그렇지 얼마나 미웠는지 모릅니다. 2달이 지나도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아 절망스러웠죠. 그런 미운 아이들이 잘 따르는 선생님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의 믿음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책에서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님도 거리의 아이들과 믿음을 쌓아 갑니다.
선생이라는 작자들을 싫어하는 미즈타니 선생이 한 선생님을 계기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서워하거나, 멸시하는 거리의 아이들에게 선생님으로 다가섭니다. 그 가운데 손가락 하나를 잘라야 하는 위험도 있었고, 자신의 교만으로 인한 안타까운 경험도 고백합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 그의 글을 짧게 인용해 봅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위험한 아이들(Dangerous minds)> 이란 영화가 떠오릅니다. 이 영화에서 '미셸 파이퍼' 역시 처음엔 고전합니다. 시작 하자마자 그만 두겠다고도 하고,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실수로 싸움을 키우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제자를 죽음의 위협에서 지켜내는데 실패도 하죠. 그러나 꾸준한 관심과 노력으로 종국에는 아이들의 믿음을 얻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선생님은 Captain Oh my caption 이 되었듯, 이 영화에서 루앤 선생님(미셸 파이퍼)은 아이들의 '빛'(Light) 이 되고, 탬버린 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가수 김장훈씨의 어머니로 유명한, 김성애 십대교회 목사님입니다. 십대교회와 <꾸미루미>를 통해 청소년 사역을 하시는데, 가출청소년을 위한 사역에 힘쓰시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 크리스천 투데이 : 가수 김장훈 어머니 검성애 목사 "엄마 마음으로 목회" )
그가 한다는 "괜찮아" 라는 한 마디에 힘이 있는 이유는, 그의 진심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어서 이겠지요. 그리고 아이들이 믿어 주고 맘 문 열어주기 까지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볼 수 있게 한 음식의 대접과, 위험한 순간들을 함께 해준 것, 경청이 뒷받침 되어 있어서일 겁니다.
이런 그도 아래와 같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것 입니다. 교사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어른 다운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 책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이제 책이야기를 하렵니다. 여기에서는 <버드나무 길> 이라는 책에 쓰인 유일한 박사의 발자국을 살펴보려고해요. 유일한 박사를 다룬 다른 책들을 읽지 못해서, 비교나 검증을 하지는 못했음을 이해해주세요.
그가 존경받을 만한 이유를 책을 토대로 정리해 봤습니다.
1. 아홉의 나이에 홀로 미국유학생활을 통한 자수성가
(1) 신문배달을 시작, 그리고 미식축구팀에 가입 (2) 디트로이트 변전소에 근무하면서 대학등록금 저축, 고향에 생활비 송금 (3) 미시건 대학 진학 (4) GE 입사 (5) 숙주나물 판매하는 사업 시작 - 라초이 식품 회사 (6) 서재필, 정한경, 이희경 등과 합작하여 유한 주식회사 설립
2. 독립운동에의 관심과 참여
(1) 박용만이 설립한 헤이팅즈 소년병 학교에서 수학 (2) 미시간 대학의 한.중 학생회 회장 역임 (3) 1914년 4월 14일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 보고
3. 존경받는 기업
(1) 사회적 책임 - 농기계와 염료 수입판매 시 이윤제로 (2) 이승만 정권시절 자유당의 부당한 정치자금 요구 거절 (3) 정직한 납세를 하는 기업철학 - 일제, 이승만. 박정희 정권때의 보복성 세무조사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털어서 먼지하나 나오지 않았다는 일화 (4) 1963년 종업원 주주제 시행 1962년 최초로 기업공개를 하는 등의 선진경영
4. 장학금 사업과 학교설립의 육영사업
이 외에도 많지만, 우선은 이 여섯가지를 말해주는 책의 부분을 인용함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 1 일정시대 미국교민사회에서 교회
일본인들은 출신 현을 중심으로 한 현민회로, 중국인들은 종친회를 중심으로 한 반면에 한국인들은 한인교회를 중심점으로 삼았다. 더군다나 한국인들을 보호하고 대변해 줄 국가마저도 일제의 강점하에 들어가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한인교회는 그들의 울분을 토로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자 또 그들의 권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단체였다. 따라서 한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마다 설립된 한인교회는 한인들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조국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지 역할을 했다.
# 2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유래
한국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인 작년 5월경에 일한은 서재필, 정한경, 이희경 등과 합작하여 한국 및 중국과 러시아의 토산품을 취급하는 유한 주식회사를 설립했었다. 유한 주식회사는 기반이 잡히면 수입뿐만 아니라 질병으로 고생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미국 약품을 한국에 수출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십일 년 만에 돌아간 한국에서 일한은 동포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다급한 것은 질병을 치료하는 약품이었다.
유한 주식회사의 설립에는 많은 재미동포들이 자본금을 투자했으나 최대의 주주는 일한이었다. 그래서 회사명도 일한의 성과 이름을 따서 '유한'이라고 했던 것이다.
<중략>
버들표 마크는 일한의 사업 계획에 찬동한 서재필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서재필은 일한에게 버드나무 조각을 주며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자네의 성 유(柳)자가 버들 유 자가 아닌가? 그래서 자네의 성을 따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마음놓고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되라는 뜻에서 만든 걸세. 한국의 큰 버드나무, 내 뜻풀이가 어떤가? 꿈보다 해몽이 좋은지 모르겠네." 서재필이 일한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자네에게 고맙다는 인사나 듣기 위해 선물한 것은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말게. 내 딸이 손수 나무에다 조각을 한 건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부디 무성한 가지를 뻗고 있는 이 버드나무처럼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말고 뜻하고 있는 큰일을 이루게나."
일한은 그때 받았던 선물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유한 주식회사를 설립할 때 회사의 상징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 3 시말서와 보너스 일화
유한양행에는 사원들이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있었다. 유한 양행에서는 매년 영업실적에 따라 연말이면 월급 이외에 보너스를 더 주었기 때문이었다. 보너스는 사원마다 차이가 났다.
어느 해 연말이었다. 일한은 전사원의 인사기록표를 참고해 가면서 보너스를 지급했다. 일을 잘못 처리해 시말서를 많이 쓴 사원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시말서까지 썼는데 보너스를 많이 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보너스를 받고 나서 봉투를 열어보니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시말서를 많이 쓴 사람일수록 보너스가 더 많았던 것이다. 이유를 모르고 의아해 하는 사원들에게 일한이 설명을 해주었다.
"시말서를 많이 썼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일을 해보려고 했다는 증거입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용기는 결코 시말서 몇 장과 맞바꿀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는 그저 적당히 일하고 월급이나 받아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당장이라도 사직서를 제출하시오."
"그러면 내년에는 나도 시말서를 많이 써야겠는데."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일한이 대답했다.
"내년에도 시말서를 가지고 여러분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다간 정말 이 회사에서 쫓겨나는 수도 있습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일한이 빙긋이 웃었다.
# 4 만년필 일화
"내가 19년 전에 이 만년필과 똑같은 것을 구입할 때 설명서를 보니까 고장이 나면 언제라도 수리해 준다고 쓰여 있더군. 그래 전번에 고장이 나 쉐퍼 회사에 수리를 해달라고 보냈더니, 그 회사에서는 자기네 제품을 19년 동안 사용하다가 수리를 해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면서 고장난 만년필을 기념으로 회사에서 보관하고 대신 만년필을 보내주겠다는 거야. 나야 얼싸 좋다고 했지. 새 만년필로 결재를 하니까 결재도 쉽게 되는구먼."
# 5 장학금 일화
일한은 그것뿐만 아니라 김명선 박사를 통해 유학을 가고 싶으나 여비가 없어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로 일한은 연구기금을 기증한 연세대학교로부터 1965년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김명선 박사는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 있으면 일한에게 들러 마치 맡겨둔 돈을 찾아가듯이 돈을 받아가곤 했다. 일한도 김명선 박사가 불현듯 나타나면 제자들의 여비를 받으러 온줄 알고 선뜻 돈을 내놓았다.
"세상에 강도가 따로 없지. 평소에는 얼굴 한번 내보이지 않다가 돈만 필요하면 나타나는 사람이 바로 자네야."
"이 세상에 나 같은 강도가 많아 보십시오.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강도가 아니라 의적인 셈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좋은 일에 쓰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형님, 내 말이 맞죠?"
"알았어, 그만해. 자네에게 빼앗긴 돈을 벌려면 더 부지런히 일해야 하니까 그만 나가주시지."
시선이 마주치자 둘은 동시에 웃었다.
P.S
1. 역사적 인물들(서재필, 이승만, 박정희)의 평가가 예비독자분들의 정치성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 군대에서 체했다면 배에 발라준다는 빨간약 전설과 쌍벽을 이루는 <안티푸라민> 시골에서는 거의 만병통치약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제가 우습게 여겼던 그 약 이제는 못 웃겠습니다.
"기억이란 흘러가 버린 과거의 재현이나 회상인 것만은 아니다. 현재 우리의 의무이며 다가올 미래의 기획이기도 하다."
- p. 360 저자후기 중에서
믿음도 고만고만하고, 신학은 고사하고 성경도 잘 모르고, 더구나, 민중신학은 관심의 대상일뿐 알지 못하는 이유로.
가슴벅차오르게 책은 읽었지만, 들려드릴 것이 없음에 답답합니다. 얼마 전 <정치교회>를 읽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답답함입니다.
그래도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남미의 민중신학과는 다르다는 그의 민중신학이, -주류 신학자들로 부터 얼마나 비난 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성도들에게, 아니 적어도 저에게만큼은 소금이 되어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짠맛을 내겠느냐? 그러면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리니,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 마태복음 5장 13절~15절 (표준새번역) -
저의 이해가 부족함에도, 그를 기억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고, 저 스스로의 정체성 형성의 밑그림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책의 본문 중에서 몇 구절 인용하고, 맘에 새기고자 합니다.
인용하고자 하는 것들은
1. 안병무 선생이 살아온 시대 설명 부분 2. 안병무 선생의 일화 조각들 3. 안병무 선생의 신학을 엿볼수 있는 부분들 입니다.
조각 조각 인용하는 것이 오해를 부를 수도 있음에 걱정이 되지만, 일단은 저의 기억을 위해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 제목 부분이 인용부분입니다. 소제목은 제가 임의로 붙임을 밝힙니다.
# 1 해방 전의 간도 교회 (p. 55)
당시 간도에는 기독교 이외에도 천주교, 대종교, 천도교 등 각종 종교가 번성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가 안심입명의 역할과 더불어 배일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짙게 띤다. 하다못해 일제가 조종했던 시천교, 청림교, 공교회까지도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북간도에서는 이주 한인들의 종교운동을 독립운동, 교육운동, 사회운동 등과 서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민경배에 따르면, 간도의 기독교는 식민지시대 조선을 장악하고 있던 이른바 서북계 보수주의 기독교와는 큰 차별성을 보인다. 즉,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에는 유난히 중산층 기독교인이 많았고, 그들을 또 미국 동부 출신의 중산층 지식인 선교사들이 맡아 선교했다. 그들은 보수적이고 단일 근본주의 신학과 엄격한 청교도적 윤리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신학생의 외국 유학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인문계 지식이나 세속 학문의 기초적 소개에도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 결과 교역자의 후진성이라는 비극적 요소를 한국 교회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런 그들의 입장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기독교의 보수적 정통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 대부흥운동은 가령 '죄의 고백'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개신교도들의 죄인 정체성 형성에 주요한 제도적 장치로 작용하는데, 이는 가부장적이고 신화적인 성서해석을 통해 강력한 순종 이데올로기를 생산해 내고 특히 여성들을 소극적. 부정적 의미의 순종적 주체로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 호남지역에서는 기독교가 별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데, 워낙 가난한 소작농들이 많아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지주들의 핍박을 넘어서서 기독교에 입문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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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간도 기독교는 처음부터 민족주의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사실, 간도로 초기에 이주한 이들 중에는 분명한 민족의식을 지닌 지사적 인물들이 많다. 그런 목적의식 때문에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한계, 즉 봉건적 유교의식을 뛰어 넘어 "기독교는 곧 신학문이고 신학문은 곧 자주독립과 연결된다"며 기독교를 앞장서서 받아들인다. 문치정, 김약연, 구춘선, 강백규, 마진, 정재면 등이 대표적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우리는 간도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훗날 우리 민족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애쓴 많은 기독교인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용정에서 가까운 명동은 민족운동의 대표적인 근거지일뿐더러 문익환, 문동환 형제를 비롯해 많은 기독교 인물들을 배출해 낸 곳으로 유명하다. 은진에서 안병무는 문동환과 강원룡 등을 만나는데, 일찍이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까지 다녀온 장공 김재준이 그들 모두의 스승이었다. 문익환과 윤동주, 송몽규는 이미 학교를 떠난 선배들이었다. 안병무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큰 교회(동산교회) 새벽기도회를 통해서도 신앙의 동지들을 여럿 만난다. 장하구, 최봉삼, 장덕순, 도기순 등이 그들이다.
# 2 해방, 엑소더스 - 간도 (p. 63)
8월 15일, 용정에 갔다가 온 주민들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독립이 되었다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긴가민가하던 안병무는 용정으로 달려간다. 장하구를 만나 사실을 확인한 그는 모아산으로 돌아와 비로소 '해방'의 뜻을 나름대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해방의 주체는 누구인가. 넌가 난가. 아니다. 주변의 누구도 준비된 주체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해방군이 따로 있었다.
그때 간도에서는 소비에트 군대가 대일 선전포고(8월 9일)를 한 지 며칠 만에 해방군이 된다. 안병무는 지식인답게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지휘해 나간다. 이불 홑청을 뜯어 거기에 "소비에트 군대 만세!"라고 어디선가 주워 익힌 러시아어로 써서 신작로 한복판에 내건다. 과연 그들은 해방군다운 위용으로 진주해 온다.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하얀 한복을 깨끗이 차려 입고 나와 진심으로 그들을 환영한다. 그 기쁨은 해동갑에만 지속된다.
그날 밤, 해방군은 해방을 가져다 준 대가를 요구한다. 달빛 아래 그들은 성에 굶주린 야수로 탈바꿈한다. 총을 들이대며 여자들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중략>
용정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방기념 축제를 열기로 결정한다. 안병무는 연극 대본을 책임진다. 숨어 지내던 학병이 주동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다는 내용인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
용정의 일본 영사관을 접수한 채 스스로 '사령부'를 세운 일단의 세력 - 아직 정체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애국가를 금지하고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상용하는 것으로 보아 공산당 계열이 분명했다 - 안병무를 불러 다그친다.
"해방이 언제 조선인의 힘으로 이루어졌느냐? 해방은 전적으로 붉은 군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안병무는 젊은 혈기로 그 주장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들이 언제 우리를 위해 싸웠느냐. 그러다가 모욕도 당하고 결국 제목을 '분노'에서 '서광'으로 바꾼다. 내용도 완전 달라진다. 이미 해방 공간의 헤게모니는 '그들'의 손으로 넘어가 있는게 분명했다.
그들은 누구일까. 증언을 다시 들어 보자.
조선의용군이 진주하면서 하동 땅에는 전례 없던 사회대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동에는 고려인회가 해산되고 새로운 민주련맹이 건립되었으며 이전에는 고려인회 문 앞에 청천백일기나 태극기를 걸던 것이 붉은 기로 바뀌어졌다.
1946년 여름 이후 소련군은 만주 동북 지역에서 철수하고,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합작한 동북민주연군에 편입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용정의 '그들' 역시 '민주연맹' 정도의 단체 소속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중략>
마침내 해방은 청년 안병무에게 또 다른 족쇄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핬다. "지주나 친일파는 물론이고, 평범한 사람들도 앞문으로 늑대를 쫓으니 뒷문으로 호랑이가 들어오는 경험을 하는 셈" 이었다.
# 3 해방, 서울에서 (p. 70)
서울 역시 이방인의 땅이었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동의어였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에서는 말 그대로 자본이 주인이다. 거기, 헌신하는 이타적 인간은 없었다. 협력과 상생, 공존과 이해의 가치는 다시 찾은 조국의 대지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사람들은 급했다. 급히, 서둘러 조국을 재건해야 했다. 그것이 준비하지 못한 자들의 변명이었다.
일본어가 물러간 자리를 한국어 대신 영어가 차지한다. 해방이 되었어도 모국어는 여전히 식민언어에 불과한 것. 역관이 없으면 신작로 하나 낼 수 없었다. 하위주체들은 미군을 통해 보급된 새로운 상전, 즉 물신(物神)을 모시기에 정신이 없었다.
# 4 한국 전쟁 (6.25) (p. 79)
안병무는 6월 23일부터 서울 자하문 밖 승가사 근처 한 수도원에서 일신회 동지들(장하구, 이영환, 이종완, 한철하, 홍창의)과 더불어 기도회를 하던 중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상황이 다급했다. 그들은 어떤 대책이나 약속도 없이 6월 26일 뿔뿔이 흩어진다. 안병무는 고민한다. 남을 것인가, 일단 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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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신도들을 어린 양인 듯 여겼다. 자신은 그들의 목자.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이 자기동일시가 마침내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 순간에는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다. 죽음은 순교자로서 새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환상이었는지 깨닫는 데에는 단 며칠이면 족했다.
서울은 이미 붉은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 보이나니 온통 붉은 깃발이요, '이승만 괴뢰도당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해방'을 찬양, 고무하는 구호들이다. 개중에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선전물도 있었다. 현실은 전혀 달랐다. 교회의 피아노는 서울 '해방' 이틀 만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예배는 야유와 난동 속에 중단된다. 결국 모든 교인이 지하로 잠적한다.
<중략>
그 피란길에서 안병무는 전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똑똑히 목격한다. 길가 논밭에서는 농민들이 전과 다름없이 일하면서 피란 가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에게 전쟁은 남의 일인 듯 보였다. 훗날 안병무는 사실 그 전쟁이 가진 자들의 전쟁이지 민중의 그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6.25 전쟁은 해방 후 5년간에 한국 안에 형성되어 가던 계급을 폭로한 날이기도 하다. 관변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돈푼이나 가진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고 힘없는 민중들과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서울에 남아 갖은 수난을 다 겪었다."
국가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독점할 때 한국전쟁은 '북괴의 잔악한 양민학살'과 같은 이미지로만 기술된다. 그러나 전쟁은 국가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지 않다. 농민이 물끄러미 바라 본 안병무의 기억 속에, 그리고 안병무가 다소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본 농민들의 기억 속에, 비록 여리지만, 전쟁은 국가가 강요하는 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진실로 살아남게 마련이다. 한국 현대사는 그런 개별적 진실들의 총화로 재구성되어야만 한다.
# 5 거친 들판에서 외치다 - '야성'의 출간 (p. 89)
"이제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대중은 안 따른다. 너무 속은 민중이라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오늘의 교인들은 교회를 냉소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과 함게 살면서 참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들은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동안 쌓아 온 신앙 훈련을 기반으로 새로운 신앙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평신도를 각성시키기 위해 각기 다른 교회에서 봉사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매주 한 차례 신흥교회에서 모임을 갖는다. 이것은 활동을 조율하고 각자의 활동 성과를 확인. 점검하는 자리로, 당연히 동지들만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이 집회가 지역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받아 모이는 숫자가 나날이 늘어 갔다. 전주에 온지 부로가 2개월 만인 1952년 1월에 이미 80여 명이 참석할 정도였다. 몇몇 동지들은 부흥집회에 강사로 초청받기도 했다. 대구 육군병원, 제주 한림과 같이 상당히 먼 지역이나, 남워노가 같이 빨치산 투쟁이 치열하여 누구도 가기를 꺼리는 위험지역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사도 바울처럼 '전도여행'을 다녔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잡지를 낸다. 제목은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을 생각하며 '야성(野聲)'이라고 짓는다.
안병무 개인의 사상 발전 단계에서 '야성'의 시기를 "세계의 악마적 구조로부터 분열된 내적 자아를 선택" 하는 시기로 규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때 "세계의 악마적 구조"를 대표하는 것은 물론 전쟁으로 여실히 그 정체를 드러낸 공산주의였다. 하지만 기독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는 전쟁을 통해 그 야만성이 넉나라하게 드러난 자본주의적 남한이나 공산주의적 북한의 비근대성을 지양할 기독교적 근대성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데 실상 교회는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기는커녕 자본주의의 퇴행성을 답습했고, 심지어 한국 근대국가 형성기의 부패한 국가의 주역의 하나였고, 저들의 그 야만적 폭력의 정치를 선도했다. 따라서 '야성'은 이렇듯 구조화된 악에 대해 거리를 두는 안병무의 '분열된 내적 자아'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6 독일유학중 (p. 131)
"서양은 모순 덩어리다. 철학과 종교를 함께 가짐이 모순이다. 그렇게 이성적인 이들이 법왕의 무오설을 내세우고 그 때문에 발을 핥는 게 모순이다.
신을 찬미하면서 실생활은 날로 유물적으로 흐르는 게 모순이다. 사랑의 종교를 가지고 전쟁을 준비하는 게 모순이다. 결국 제1모순은 저들이 성서를 유일한 경전으로 가진 것이 모순이다.
도대체 저들이 가진 성서가 그 대로 모순인 책인 것이다. (중략) 그 하나님 자체가 모순이다. 선악과를 만들어 세우고 먹지는 말라 하고 유혹의 악마를 보낸 모순의 주체이다."
안병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구를 비판하자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서구문명의, 특히 기독교에 뿌리를 둔 서구 문명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그 모순을 짚어 내지만,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라는 점도 잘 알았다. 왜냐하면 그 글에서 그는 또한 "유럽이란 그 생명이 그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더라. 오히려 모순이 동력이더라"라고 하여, 모순을 끊임없이 극복하고자 하는 변증법적 노력이 오늘의 유럽을 일구었음도 찾아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서구에서도 늘 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의 지도교수 보른캄도 "복음(진리)은 하나이나 역사적 상황은 각 민족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 진리를 자기의 역사적 조건과 대결시켜서 얻는 것이라야 자기를 살릴 수 있는 학문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 7 결혼 (p. 151)
안병무에게도 결혼은 중요한 계기가 된다. 결혼을 통해 사람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결혼 전 사람에 대해 자신이 지녔던 편견과 허영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만혼인데도 결혼 전에는 이성과의 접촉에서 어느 쪽에서 작동하건 어떤 기대 같은 것은 사람을 붕 뜨게 해서 사실을 직시하는 데 방해를 받았다. 그런데 결혼 후에는 그런 것이 깨끗이(?) 가시었다. 체념이라면 체념, 단념이라면 단념 따위가 작용한 그런 상태! 나에 대한 어떤 여자의 시선이나 행위 때문에 괜히 자신을 부풀게 하는 그런 붕 뜨는 것이 없어졌다.
'남자' 로부터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주고받는 것이 흐리게 보이지 않고 제대로 보이더라.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전기였다. 그것은 허영심이 제거되는 중요한 전기였다."
# 8 일화 - 검소, 물질 (p. 153)
물질에 대한 안병무의 인식은 한마디로 '개념이 없다'고 하는 게 옳을 터이다. 독일 유학 시절,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이따금 안병무를불러 설교를 청해 들었다. 그때마다 안병무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 생겼는데, 안병무는 그 돈을 다른 가난한 유학생에게 있는 대로 털어 주기도 했다. 그게 몇 천 마르크이든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은 다 꺼내 놓는 게 안병무였다고.
<중략>
넥타이 하나로 버틴다든지, 누가 준 새 양복을 어떻게 감히 입느냐고 남이 먼저 입다가 주면 좋겠다면서 내준다든지 하는 일화는 부지기수다. 안병무가 무슨 일로 독일에 얼마간 갔다 올 때 일이다. 마침 독일에서 제자 하나가 진주목걸이를 만들어 팔아 부자가 되었는데, 그가 안병무가 이미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진주목걸이를 선물한다. 그러자 이렇게 비싼 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제자도 만만치 않다. 안병무는 할 수 없이 진주목걸이를 꿴 고리만 달랑 떼어 가지고 귀국한다. 안병무는 공항에 마중 나온 박영숙에게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러더니 미아리쯤에서 선물이라고 그 진주목걸이용 고리를 건네준다.
# 9 <현존> 창간 (p. 156)
'현존'을 통해 안병무는 신학의 불모지인 한국 신학계와 교회 목회자들에게 한편으로 세계 신학의 동향을 소개하고 다른 한편으로 역사비평학에 의거한 성서해석 방법론을 소개했다. 이 잡지를 중심으로 성서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기독교 복음이 갖는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며 기독교 계몽운동을 펼쳐 나갔다.
안병무는 집요한 사람이다. '야성'을 내던 때,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분투한 끝에 마침내 결실을 보았듯이, '야성'이 중단된 후에는 언제고 다시 그 뜻을 이어가리라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스스로 개인잡지라 부르는 '현존'을 내기로 하자, 이미 그 의미를 읽어 내고 장준하가 종로 뒷골목 어느 음식집으로 그를 불러 조촐하게 축하연으 베풀어 준다. 그때 장준하는 자신이 그토록 껴안고 몸부림치던 '사상계'가 거의 쓰러져 가는 상태였기에 더더욱 '현존'에 거는 기대가 컸으리라.
'현존'은 '야성'이 그랬듯, 그리고 앞으로 그가 창간할 다른 잡지들과 마찬가지로, 지식인으로서 안병무가 세상과 관계를 맺고 또 책임을 지는 한 중요한 형식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장준하의 '사상계'와 더불어 안병무의 '현존'이 당대의 억압적 정치 상황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 10 1970년 전태일 분신 (p. 159)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가 외친 목소리는, 그 생경한 목소리는 이내 광야를 불사르는 들불처럼 퍼져 나간다. 청계천 다락방 공장 한 구석에서 고작 미싱이나 돌리던 한 청년의 죽음일 뿐인데, 그리고 그의 죽음을 보도하는 것조차 악착같이 통제하는 손길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은 실로 컸다.
특히 지식인들이 받은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일기에서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다면"하고 쓴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대를 비롯해 각 대학이 시위 및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간다. 정부는 즉각 서울대에 무기한 휴교령을 발동했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금식기도회와 추모 예배가 이어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이란 게 우리 사회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1970년에 일어난 노동운동이 165 건인 데 반해, 1971년에는 1656건으로 확산되는 게 단적인 증거다. 아울러 기독교계에서는 1971년 9월에 수도권도시빈민선교회를 창설하고, 이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인권위원회도 두게 된다.
박정희 정권이 추구한 경제개발계획은 한마디로 '성장'을 모든 가치에 우선하여 밀어붙이는 정책이다.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자립경제의 기반을 일구는 것보다 중요했다. 그를 위해서는 구걸하다시피 한일청구권조약을 맺고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하여 피의 값으로 원시자본을 축적하고, 또한 농촌을 파괴해서라도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장성 갈재 너머 문경 새재 너머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떠난 노동자들은 '산업역군'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등골이 휘어갔다.
# 11 <역사와 증언> 출간 (p. 167)
이 책은 성서에 대한 신비화를 불식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청년들이 성서를 하나의 '고전'으로 대할 수 있도록 친절한, 그러면서도 독창적인 해석과 매우 깊이 있는 해석을 해 나간다.
안병무는 성서를 인류의 고전 중 하나로 대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고전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일이다. 고전은 그것을 가진 민족에게는 큰 보물이지만 자칫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가령 유대교가 성서를 율법으로 고착시켜 버렸을 때, 성서는 곧 재앙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의 재해석으로 폐쇄성을 뚫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고전으로서의 성서는 그것이 율법화되어 오히려 미래로 향하는 문을 차단해 버리는 망령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한다.
<중략> - 다윗 비행의 예
놀랍게도 안병무는 바로 그런 점에서 성서의 가장 큰 특징을 발견한다. 즉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범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도 저들의 역사가 세계 역사에 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그 비밀을 여는 열쇠라는 것. 왜냐하면 성서 안의 인간상은 완전무결하게 다듬어진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의 잡다한 요소들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안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나를 보고 내 안에서 성서 안의 인간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 안의 인간상과 역사가 수천 년 전에 생겼던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 안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것과 공동운명체임을 경험하게 한다.
# 12 10월 유신 (p. 195)
역사상 전무후무한 '유신'을 단행한다.
메이지유신의 그 유신!
이로써 일본 관동군 출신 박정희의 '근대' 인식이 지닌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최소한 한국어는 그의 거대한 구상을 실현시키는 데 전혀 유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유신헌법은 절대군주시대에나 가능했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것은 물론, 국민들에게는 무진장한 의무를 부과한다.
즉,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간선제를 수용할 의무, 그나마 그렇게 선출되는 대통령의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나고 연임 불가 조항이 폐지되어 한없이 그 대통령 밑에서 살다 죽을 의무, 견제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꼭두각시 국회를 멀거니 바라볼 의무, 사법권 독립을 요원한 희망을 갖고 기다릴 의무, 고문을 통한 자백에 근거한 처벌을 감내할 의무, 노동자 단체행동 금지의 의무, 온갖 침묵과 복종과 동원의 의무 등등. 한마디로 유신체제의 성립은 "곧 노골적인 폭력의 제도화를 의미했다. 이는 사회구조 전반에 걸친 왜곡과 억압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국민 개개인의 일상생활과 의식 구조에까지도 지대한 파급효과를 발휘"한다.
이어 한국신학대학의 학생들은, 전국 대학 최초로 반정부 시위를 전개한다.
<중략>
1973년 늦가을, 수유리 한신 교정에는 차가운 북풍이 몰아친다. 정부는 반정부학생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제적하라고 학교 측을 협박한다. 한신 학생들은 예배실에 모여 노성으로 맞섰다. 하루는 김정준 학장이 예배 설교 중에 면도칼로 강단에 있던 교기를 그어 버린다.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적당한 학생들이 돌아오면 그 인원수대로 한 땀씩 잇겠다."
그 무렵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아침마다 회의실에 모여 성서를 함께 읽고 민주화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다. 예배 후 안병무가 갑자기 "우리 삭발하자!"고 전격 제안하는 일이 벌어진다. 교수들은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싶었지만, 김정준 학장을 필두로 이내 동조한다.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포이어바흐가 맞다. 인간은 감성적 동물이다.
<중략>
마침내 1975년 여름 그는 문동환과 함게 이사회의 결의로 해직당하고 만다. 그해 봄부터 학원가는 반정부 시위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자 정부는 학생운동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이유로 각 대학 '문제교수'들을 강제 해임시키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고은을 위시한 문학인들은 동아일보사 앞에서 기습 시위를 벌이며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한다. 바야흐로 순수문학의 허울 아래 정권의 시녀이기를 자처한 한국문인협회와 정반대 운명을 선택한 자유실천문인협회(후에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창립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것이 이미 1974년 11월 18일, 칼바람 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였다.
거기, 세종로 한복판을 가로막고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던져 왜군이 침략을 막아 낸 장군. 그러나 그 장군조차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오직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된 박정희 정권의 포로였다.
그는 '충'과 '효'라는 수직적 유교 가치를 내세워 국민들의 복종을 강요하는 정권에 의해 원하지 않은 악역을 담당하는 신세가 된다.
예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종로 한복판의 이순신 장군이 '구리'에 갇혔다면 한국에 온 예수는 물 대신 원하지 않은 시멘트로 세례를 받는다.
그 아래, 거지가 있다. 고향도 잃고 주리고 헐벗고 지친 거지가 센사 한탄을 하다가, 문득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본다. 거기, 시멘트로 떡칠이 된 예수가 서 있다. 거지는 예수도 먹고 입고 살아갈 집을 가진 자들에게나 구주가 될지언정 자기 같은 놈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중얼거린다.
# 13 3.1민주구국선언 후 구속 수감
브레히트는 시민들의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한 동독의 독재정권에 대해 자신의 시 '해결방법'에서 이미 이렇게 '해결방법'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 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중략>
그 후, 연말 항소심이 있을 때까지 재판이 장장 16회나 이어진다. 이 사건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따. 김대중처럼 워낙 명망 있는 인사들 때문이겠지만, 기소된 18명 전원이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사실도 주목을 끌었다.
안병무는 재판이 열리는 토요일을 동지들과 만난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고인들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연설회장 같았다. 하다못해 변호사들도 그들의 그런 신념을 구체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젊은 판사가 그런 변호사의 신문에 대해, "도대체 그 신문이 피고를 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중죄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라고 되물어 장내에 폭소를 자아내기도 할 정도였다.
함석헌은 베옷을 입고 출정했다가 판사가 그걸 지적하자, "한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도 상복을 입어 애도를 나타내거늘, 하물며 양심도 법도 그리고 나라마저 죽었는데 어찌 상복을 안 입을 수 있겠냐"며 오히려 호통을 치기도 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그들을 재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정부를 재판하는 셈이었다.
<중략> 먼저 석방된 후
그를 위한 석방기념회에서 김정준이 그의 석방을 가리켜 하느님이 고래에게 요나를 토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라는 비유로 이야기해서 사람들을 감격시킨다. 안병무는 오히려 부끄러웠다.
"하나님의 호령에 놀란 고래가 다 토하지는 않고 겨우 재채기를 했는데 삼키운 이들 중에서 가장 가벼운 두 사람이 밀려 나왔다고 했습니다. 아직 고래는 다 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호령은 계속될 것입니다."
# 14 80년 광주 (p. 236)
광주가 무참히 짓밟혔을 때, 수천 명이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들려왔을 때, 그는 울었다. 통곡했다.
그렇지만 폭도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간첩이 독침을 품고 스며들었다고 했을 때, 그는 화를 냈다. 폭발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자들의 혀가 뱀의 그것으로 변하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다시 유언비어가 돌아,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시민군에게 황금동 작부아가씨들이 떼로 몰려와 "내 피를 쓰세요. 몸은 이래도 피는 깨끗해요"라고 헌혈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죽은 것은 책상물림 것들이 안라 글뒤주들이 아니라 난놈들이 아니라 날품팔이, 양아치, 구두닦이, 때밀이, 미장이, 신문팔이, 시다, 지게꾼, 공돌이, 공순이, 실업자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울면서 웃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아주 손쉽게 다리를 건너갔다.
그것이다. 민중만이 희망이었다. 민중은 고통 속에서 쓰러지지만, 스스로 일어선다.
# 15 강남향린교회 설립 예배 설교 (1993년 5월)
'우리가 세상에 뭐 할라고 왔나? 얼굴 하나 보러 왔지.' 그게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세상이 무슨 소리 무슨 소리 해도 얼굴 하나 볼라고 왔지. 세상에 나돌아다니는 찌그러진 얼굴, 근심 많은 얼굴,남을 괴롭히는 얼굴, 별의별 얼굴이 다 있는데, 그 중에 참 평화로운 얼굴을 하나 볼 수가 없구나' 하고 한탄한 시가 있습니다. '세상에 왜 왔나? 얼굴 하나 보려고 왔지.' 그 말이 제겐 언제든지 마음에 새겨집니다.
좋게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 뭐하러 왔나?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그려보자 그거죠. 왜 교회가 여기에 하나 섰나? 많은 교회들이 모두 그리고 있는 에수의 얼굴이 틀렸다. 우리 바른 예수의 얼굴을 그려보자. 그거죠. 김 목사, 안 그렇소?
나도 참예수의 얼굴을 그려보자. 지금 구십 퍼센트 이상의 한국 교회가 예수의 얼굴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느 밑에 있는지 알아요? 놀랍게도 이제는 모든 것을 다 거슬러 올라가서 두 가지를 선택했습니다.
율법주의를 그대로 지키고 있고, 그 밑에서 예수를 봅니다. 또 하나는 그레꼬-로마의 밑에서 얻은 그리스도론을 가지고 강제하고 고집합니다. 그것을 떠나면 이단자로 몹니다.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사의 예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Christiianity without Jesus! 예수 없는 기독교, 그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입니다. 예수는 배제했습니다. 왜? 예수는 우리에게 거리끼니까. 그대로 수용했다가는 팬티까지도 다 빼앗길 걸? '겉옷을 빼앗으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더 나가면 팬티까지도 벗어주라는 말이 되니까, 난 그건 죽어도 못한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 그건 난 못한다. 그러니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예수는 좀 배제하자. 그래서 예수는 아니야. Christianity라는 데로 흡수해 버리지.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가 설립된 중요한 목적은 예수를 도로 살펴 보자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지도 않았어요. 의미가 없어요. 안 그린 겁니다. 교리를 얘기하고, 율법을 얘기합니다. 아직도 토라(Torah)가 절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김 목사는 어떤지 몰라. 우리 예수의 얼굴을 정말 그려보자. 예수의얼굴은 신비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고행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개인주의의 예수도 아니고,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유야 어쨌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다. 자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뭔지 미지수는 많지만 그는 남을 위해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은 이다.
김 목사님, 오늘 너무 한계를 지어놔서 운신의 폭이 좁을 줄은 모르나, 예수의 얼굴을 정말 그리시오. 당신이 망해도 예수는 살아야 하니까. 세례 요한의 말대로, '당신은 흥해야겠고, 나는 쇠해야겠다.' 그말을 당신은 지키시오!
<컬처 비즈니스>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큰 기대 없이 보는 책임에도, 1부와 2부는 짧은 칼럼형식의 글의 집합임에도, 저 같이 이해가 느리고 부족한 사람이 보기에도, 꽤나 논리적이고, 통일성이 있는 책 입니다. 제목의 유사함과는 내용이 다르겠지만, 외려 <컬처 코드> 보다 낫겠다 싶습니다.
그 책에서 말하는 6천여 가지나 된다는 문화의 개념 그 문화와 컨텐츠의 중요함을 역설하는 그의 글을 보다가 문득, <백범일지>의 이 부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옮겨 적어 봅니다. [[ ]] 안의 글이 발췌부분 입니다.
[[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
-< 백범일지(돌베게 출판) '나의 소원' 중에서 >p. 426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 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요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위인전기를 거의 읽지 않습니다. 전태일 평전이나 체 게바라, 간디를 띄엄띄엄 읽은 것이 전부죠. 위인전이라면 어릴 적 전집으로 읽은 것이 전부입니다.
지금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제가 어릴 적 한국의 위인들은 비범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채운이 드리우고, 학이 뜰에 노닙니다. 어린시절 그 어렵다는 경서를 줄줄이 외고, 소과에도 덜컥 붙어버립니다. 그들에게도 어려움과 도전은 있지만, 이미 일반인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감탄의 대상 경외의 대상이 될 지언정, 본받을 수는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거죠.
제가 아이들을 위해 위인전이나 평전을 산다면, 이런 책은 사지 않겠습니다. 아마 요즘은 이런 책이 출간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프랭클린 자서전은, 어려운 환경 속의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약간은 잘난 척하기 위해 썼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일지라도 말입니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1부는 어린시절과 사업의 시작을 2부는 스스로의 마음가짐과 수양법을 3부는 공직의 진출과 대학, 공공도서관, 소방대, 방위군 설립등 공적사업의 경력과 경험담을 말해 줍니다.
그가 어떻게 범인에서 위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는지를 이 책을 근거로 생각해 봤습니다.
변화의 힘은,
첫째,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책을 읽고 토론하고 작문한 것을 모임을 통해 나누었다는 점 셋째, 사람들과의 만남과 사귐이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 넷째, 근면, 검소, 절제의 덕목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점 입니다.
아래는 위의 세 가지 '프랭클린의 힘'을 보여주는 장면을 책에서 인용함으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 1 전토(Junto) (p. 104)
나는 그 전해 가을에 내가 아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아 서로의 발전을 꾀하기 위한 클럽을 만들었다. 이름을 전토(Junto, 비밀 결사의 뜻 : 역주)라 하고 금요일 저녁마다 모였다. 내가 작성한 규칙에 따라 회원은 자기 차례가 되면 도덕이나 정치나 자연 철학에 관계된 한두 가지 논제를 찾아 왔다.그러면 우리는 그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 또 석 달에 한 번 씩 어떤 주제로든 에세이를 하나씩 써 와서 발표했다. 토론은 회장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고 논쟁을 위한 논쟁에 빠지거나 상대편을 이기려고 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한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임하기로 했다. 그리고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을 막기 위해 독단적인 의견 표현이나 직접적인 반박 같은 것은 금했고 어길 경우에는 약간의 벌금을 내기로 했다.
# 2 서재에서 공공 도서관으로 (p. 148)
이 작은 서재가 꽤 쓸 만하자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익을 누릴 수 있게 해주자고 제안했다. 즉, 회원제 공공 도서관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내가 필요한 계획과 규칙의 초안을 짰고, 관록있는 공증인 찰스 브록덴이 그 초안을 토대로 회원 가입의 동의 조항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각 회원은 처음 책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일정량의 돈을 내고, 책을 더 살 수 있도록 해마다 회비를 내야 했다.
당시 필라델피아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사람들은 아주 가난했다. 사정이 그러하니 발에 땀이 날 정도로 다녀도 겨우 50명밖에 모을 수 없었다. 대부분이 젊은 상인들이었고 그들은 처음에 40실링을 내고 해마다 10실링씩 내기로 했다. 이 작은 기금으로 우리는 출발했다.책들은 해외에서 사들였다. 도서관은 일주일에 한 번씩 문을 열고 회원에게 책을 빌려 주었다. 회원들은 약정에 따라 기한 내에 책을 반납하지 않으면 책 값의 두 배를 물어야 했다.
# 3 프랭클린의 13 덕목 (P. 156)
나는 명확함을 기하기 위해 더 적은 덕목에 규율을 길게 붙이는 것보다는 덕목을 조금 더 늘어놓고 각각의 덕목에 수반되는 규율을 자세히 붙이기로 했다. 덕목과 거기에 따른 규율은 다음과 같다.
1. 절제 (Temperance) 배부르도록 먹지 말라,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
2. 침묵 (Silence) 자신이나 남에게 유익하지 않은 말은 하지 말라. 쓸데없는 말은 피하라
3. 질서 (Order)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정돈하라. 모든 일은 시간을 정해 놓고 하라.
4. 결단 (Resolution) 해야 할 일은 하기로 결심하라. 결심한 것은 꼭 이행하라.
5. 검약 (Frugality)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일 외에는 돈을 쓰지 말라. 즉, 아무것도 낭비하지 말라.
6. 근면 (Industry)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언제나 유용한 일을 하라. 안 해도 될 행동은 끊어 버려라.
7. 진실함 (Sincerity) 남을 일부러 속이려 하지 말라. 순수하고 정당하게 생각하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하라.
8. 정의 (Justice)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응당 돌아갈 이익을 주지 않거나 하지 말라.
9. 온건함 (Moderation) 극단을 피하라. 상대방이 나쁘다고 생각되더라도 홧김에 상처를 주는 일을 삼가라.
10. 청결함 (Cleaniness) 몸과 의복, 습관 상의 모든 것을 불결하게 하지 말라.
12. 순결 (Chastity) 건강이나 자손 때문이 아니라면 성 관계를 피하라. 감각이 둔해지거나 몸이 약해지거나, 자신과 다른 이의 평화와 평판에 해가 될 정도까지 하지 말라.
13. 겸손함 (Humility)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으라.
# 4 프랭클린의 덕목표 (P. 160)
나는 한 주일에 한 덕목씩 실천하기로 했다. 그래서 첫째 주에는 '절제'에만 신경을 써서 아주 작은 잘못이라도 피하려고 애쓰면서 다른 덕목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매일 저녁 그날의 잘못은 꼭 표시했다. 첫 주에 T라고 표시된 첫째 줄이 까만 점 하나없이 깨끗해지면 나는 그 덕목이 완전히 몸에 익어 그 반대되는 습관은 약화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면 다음 덕목까지 포함해서 첫째, 둘째 줄을 다 깨끗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런 식으로 맨 마지막 덕목까지 끝내는 데 13주가 걸렸고 일 년에 네 번 실행할 수 있었다.
밭의 잡초를 뽑을 때에는 한 번에 몽땅 뽑으려고 덤빌 것이 아니라 자기 능력껏 한 뙈기를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한줄 한줄 깨끗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만큼 덕을 익혔음을 끼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번 거듭한 끝에 마지막 13주째에는 점 하나 찍히지 않은 깨끗한 수첩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 5 프랭클린의 잠언1 (p. 190)
주 의회 서기 후보에 올랐는데 신참내기 의원 하나가 다른 후보를 옹호하고 나를 반대하는 긴 연설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내가 다시 당선되었다. 내게는 썩 기분좋은 일이었다.
<중략>
그러니 당연히 이 신참내기 의원의 방해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이 사람은 재산도 있고 학식도 있고 재능도 있어서 오래지 않아 주 의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사람이었고, 후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아첨하여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얼마 후에 나는 다른 방법으로 그에게 접근해 보았다. 그의 서재에 아주 진귀한 희귀서가 한 권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그 책을 한번 읽어 보고 싶으니 며칠만 빌려 달라고 청했다. 그는 즉시 책을 빌려 주었고, 나는 일주일 뒤에 그 책을 돌려 주면서 아주 감사하다는 메모를 함께 보냈다.
다음 번에 의회에서 만났을 때 그는 아주 정중하게 말을 걸어 왔다. 그 뒤로는 모든 일에서 나를 기꺼이 지지해 주었고 우리들의 우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일은 옛말 중에 틀린 말이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보여준다.
"당신이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보다 당신에게 한 번이라도 친절을 베푼 사람이 당신에게 또다른 친절을 베풀 것이다."
# 6 프랭클린의 잠언2 (p. 224)
길버트 테넨트라는 목사가 나를 찾아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새 예배당을 짓기 위해 모금을 해야 하니 도와 달라고 했다. 원래는 화이트필드 목사의 제자들이었던 장로교인들을 그 목사가 모아 그들을 위한 예배당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시민들에게 너무 빈번하게 기부금을 부탁해서 거부감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목사는 내 경험으로 볼 때 돈을 잘 쓰고 공공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의 이름을 쭈욱 불러 달라고 했다. 내 간청을 친절하게 들어 주었던 사람들이 또 다른 요구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나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도 거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언이라도 해달라고 했다. "그거라면 기꺼이 해드리지요"라고 나는 말했다.
"첫째로 목사님이 생각하시기에 기부를 해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다음에는 줄지 않줄지 확실치 않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먼저 기부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 줄 것 같지 않은 사람들도 빼놓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잘못 보셨을 수도 있으니까요."
목사는 크게 웃더니 고맙다면서 충고를 잊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그렇게 했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기부를 부탁해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를 모았다.
# 7 프랭클린의 종교관 일면(p 152)
나는 장로교 교육을 받았었다. 나는 그 교파의 교리 중에 신의 영원한 의지, 선민 사상, 영벌 같은 것들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의심스러운 것도 많았다. 일요일은 공부하는 날로 정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예배에 빠졌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인 원칙들을 아예 다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한다는 것,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섭리로 주관하고 있다는 것, 신이 가장 기뻐하는 봉사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라는 것,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며 모든 악은 단죄받고야 만다는 것, 덕행은 이 세상에서든 저 세상에서든 꼭 보답을 받는다는 것 등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모든 종교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종교들은 모두 그러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종교들을 존중했다.
하지만 종교마다 그 존중의 정도는 달랐다. 어떤 종교는 그 요소들에 다른 교리들이 뒤섞여서 인간의 도덕성을 고무하고, 촉진시키고, 강화시키기는커녕 우리를 갈라 놓고 서로 악의를 품게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나쁜 종교라도 좋은 점은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종교를 존중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경외심을 건드릴 만한 논쟁을 피하게 되었다. 우리 지방의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고 대부분은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세워졌다. 나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교파를 가리지 않고 적은 금액이라도 기부를 했다.
예배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바르게만 이루어진다면 예배도 유용하고 괜찮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에 있던 유일한 장로 교회의 목사와 그 집회를 후원하는 기부금을 해마다 보냈다.
그 목사는 친구로 가끔 나를 찾아와서 집회에 나오라고 타일렀다. 그의 권고에 마음이 움직여 가끔씩 나갔으며 5주 동안 계속 참석한 적도 있었다. 그 목사의 설교가 마음에 들었다면 일요일에 공부하는 것을 제쳐놓고라도 계속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사의 설교는 주로 신학적인 논쟁이나 우리 교파만의 교리에 대한 설명들뿐이어서 아주 무미건조하고 지루했으며 얻을 것도 없었다. 도덕적인 원칙은 눈곱만큼도 가르치거나 역설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를 좋은 시민보다는 장로교 신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