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에 해당되는 글 3건



젊은 날의 초상 - 이문열

이 책은 세 개의 목차를 안고 있습니다.
고교시절 즈음에 해당되는 어린 날의 방황과 외로움을 다룬 <하구河口> 대학시절의  방황과 추억담들을 다룬 <우리 기쁜 젊은 날> 마지막으로 외로움과 허무의 정체를 알아보고자 떠난 여행을 다룬 <그해 겨울>입니다.

1. 하구

고교 중퇴로 더 일그러진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초조함과 비애의 느낌으로 책은 시작해요.
 

[ 나는 그 편지에서 우선 목적 없는 내 떠돌이 생활의 쓰라림과 서글픔을 은근히 과장하고,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 나이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과는 달리 정말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p. 10) ]



그리고 형에게로 돌아가 검정고시와 대학진학이라는 목표를 정해놓은 후의 삶도
외로움과 방황을 달래주기는 힘들었나 봅니다.


[ 추억하기조차 가슴이 서늘한 강진의 풍경 중의 하나는 그런 불면의 밤 내가 늦도록 배회하던 갯가의 둑길이다. 으스름한 달빛과 안개 자욱한 포구, 끝없이 출렁이는 갈대의 바다와 그 위를 스쳐가는 바람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구성진 울음소리......나는 그러한 것들 사이를 마치 몽유병자처럼 늦도록 거닐었다. 그리고 그때 나를 지배하는 것은 어두운 방안에서의 번민과 고뇌 대신 울고 싶도록 철저한 외로움이었다. (p. 23) ]


덜 익은 첫사랑 이야기와 이념대결의 연좌제 같은 얘기들이 곁가지를 치고 있기는 하지만 주된 내용은 외로움, 허무, 갈구, 방황 이라고 생각합니다. 갖고 있어야할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안한 맘으로 찾기는 하는데, 무얼 잃은 지도 모르는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 불안과 결핍은 대학에 가서는 어찌될까요?

2. 우리 기쁜 젊은 날

다행히 '하가'와 '김형'이라는 맘 맞는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아는 바보' 가 되어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죠. 그들과 독서 술판 토론을 하면서 나름의 재미있는 생활을 합니다.그리고 김형의 추천으로 문학회에서 나름의 인정을 받게 되죠.


[ 시처럼 힘들이지 않아도 나는 곧잘 합평회의 갈채를 받았고, 때로는 동인지나 교지에까지 실려 처음으로 활자화된 내 글을 보는 감격도 맛보았다. 그때껏 과정으로서의 삶만 살아온 내게는 처음 경험하는 존재의 외부적 승인이었으며, 초라하나마 성취의 희열이었다. (p. 86) ]


이런 행복도 꼬아보는 시선과 뒤틀린 성격으로 스스로 내치게 됩니다.
결국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하면서 그것뿐이면 너무 없어 보일 것만 같은 알기 힘든 고고함이 충돌하는 셈이지 싶습니다. 알기 힘든 그 고고함을 채워주는 것이 '앵벌이 소년과의 만남'정도가 될까요?
그리고 그 연장선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생각되네요.

3. 그해 겨울

강원도로 무작정 떠나서 '광부'가 되길 했으나 무너지는 갱도를 보고는 그만 두고, 작은 고깃배의 선원이 되고자 했으나 거절당합니다. 허락받았어도 무서웠을 겁니다. 그렇게 흘러 흘러 작은 요정이자 여관인 곳에서 허드렛일을 해봅니다.
 
고교시절부터 막연히 찾고자 했던 것.
마음 속 비어있는 그 무언가를 그렇게 찾고자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면서 타협하는 걸로 보입니다.


[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었으며 구원이었다. (p. 213) ]



책의 마지막장이 찢겨있어 결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한 장이 아무리 극적이라도 <그해 겨울>의 첫 부분을 보면 주인공 영우는 그냥 그렇게 타협하고 여전히 마음속은 비어있을 거라는 제 생각이 맞을 듯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빈 부분을 복잡한 일상과 감정, 추억들로 메우고 덮으며 살아가겠죠.

첫 부분이 이렇거든요.


[ 이제 그 겨울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미 한 가정을 거느렸고, 매일 매일 점잖은 복장과 성실한 표정으로 나가야 할 직장도 있다. 또 나이는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어 감정은 많은 여과를 거쳐야 하며, 과장과 곡필로 이루어진 미문(美文)의 부끄러움도 알게 되었다. (p. 170) ]


열정, 이상, 꿈, 희망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사는 삶을 하찮게 여길 수 없습니다. 외려 존경하는 쪽입니다. 특히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는 삶은 더욱더 존경하지요. 그리고 정답을 찾지 못해도 젊은 날의 치열한 방황과 고민도 역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말에 저까지 허무한 이유는 뭘까요.
아직 그의 고교시절만큼이나 이룬 것이 없는 것도 이유겠지요.
다른 사람의 눈병을 옮아 그 사람의 눈병이 낫는다는 속설처럼. 영우를 정상인으로 낫게 하고자 그의 허무를 떠안은 것만 같아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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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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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이문열

1. 유다의 죄는 무엇입니까?

다니던 교회의 어느 동생이 목회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책에서 '아하스 페르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도 진실로 카인의 죄를 믿으십니까?


두 질문이 유사합니다.
모든 것이 전지전능하신 신의 계획과 예정대로라면 유다와 카인은 신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 죄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자유의지'로 선을 지키고 악을 행하지 말았어야 한다면 '자유의지'로 인해서 신의 예정은 변경될 수도 있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의문은 '그의 부정(否定)은 확신하고 긍정하기 위함(p. 75)' 입니다.
그런데 전 어지러운 논리는 질색함으로 답을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답을 알지 못함으로 아직도 어지럽기도 합니다.

2.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 '아하스 페르츠'는 종교적 교의를 이해하고자 여행을 떠납니다.
이집트의 이시스와 호루스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 고통 받으며 무력하게 죽어가는 신의 모습을. 가나안지방에서 바알신의 농경신적 요소를 흡입했음을, 바빌론에서 천지창조와 아다파왕의 생명의 식물, 지아스투라의 홍수를 봅니다. 아래에 인용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원래 야훼는 엘 사따이산에 은거하던 목양자의 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모세의 광기가 접한 호렙산의 영이 더해져  야훼는 곧 가나안의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군신으로 변질되었다. 그 뒤 엘리야와 호세아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부여했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 페르샤인들의 사탄과 종말론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야훼는 완성되었다.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을 뿐이다. (p. 169) ]


10년에 걸친 종교공부를 위한 여행과 철학의 공부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을 이기지 못한 이유로 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로 '아하스 페르츠'는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믿는 신을 만나게 됩니다.

3. 요즘 드는 의문

그가 믿는 신은 예수를 땅에 보낸 신과는 다르기에 그는 예수와 일곱 차례 논쟁을 합니다.
그 중에서 제가 요즘 가장 의문이었던 물음이 있어서 인용해 봅니다.


[ 그 다음에 당신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셨소, 보복하지 말라 하셨으며,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소.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마저 내놓고 속옷을 달라거든 겉옷까지 주며, 오 리를 가자거든 십 리를 가 주라 하셨소. 진실로 묻거니와, 도대체 당신은 그 모든 가르침의 실천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인간의 창조자 오직 당신 아버지의 선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시오? 그러나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난 자 중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따라 출발할 것이지만 결코 아무도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 나머지 -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 교훈은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오. 비록 당신으로 하여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오. (p. 202) ]


계명들이 지켜져서 지상낙원이 세워지는 것에는 반대할 사람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런 계명들은 '삼청교육대'가 범죄를 일소할 것이라고 믿는 것 만큼이나 요원해 보입니다.

4. 기독교의 변신론

그리고 해설에 보니 기독교의 변신론(辯神論-theodicy)을 얘기하네요.


[ 고통, 죄악, 죽음 등과 같은 현상들은 언제나 기존 질서의 재편성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힘이 된다. 이러한 위협들을 종교적 정당화의 견지에서 해소하여 기존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한 논리를 변신론이라고 한다.

변신론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인간들의 매저키즘적 속성이다. 인간은 자신의 불안과 욕구를 타인에게 의탁하고자 하는 자기 부정의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자기 부정적인 의탁을 가장 확실하게 받아 주는 타자가 바로 신이다.
신은 인간에 대해서 <전체적인 타자他者-Totaliter aliter)>로 가정된다. 인간은 전체적 타자에게 자기 부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의탁을 함으로서 오히려 심리적 안정과 희열을 얻는다. <나는 하찮은 존재이고 신은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신 안에 나의 궁극적인 지복이 있다> 라는 표현 속에서 매저키즘적 태도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매저키즘적 의탁은 신의 경험 불가능성에 의해 더욱 고양된다. 신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일 때 더욱 완벽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묵시적인 비난은 오히려 그 인간에 대한 명시적 정죄로 전도되고, 신의 정의에 대한 회의는 오히려 그 인간의 죄에 대한 물음으로 전도된다. 기독교에서 강하게 내세우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함,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음 등등은 모두 인간의 매저키즘적 속성을 정교하게 이용하는 변신론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도 인간의 고통을 합리화시키는 중요한 변신론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곧 인간들의 고통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기독교에서 말하는 낙원회복의 약속, 즉 메시아주의나 천년왕국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인간의 죄악과 고통을 구원해 주시지 않는가라는 경험적 반증에 대하여 기독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미래에 그 낙원을 설정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에 찬 불만을 눌러버린다. 이러한 변신론을 통하여 종교는 현실적 위협으로부터 자체의 존립을 보호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신론은 중요한 사회적 기능도 담당한다.
즉 사회에 편재해 있는 온갖 특권과 불평등과 고통을 합리화시켜 주는 것이다. 종교적 교리는 부당한 사회 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끔 강요하는 것이다. (p. 277) ]


이 이론의 완성도는 저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네요.
왜냐하면 제가 꼭 이렇습니다.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의지하고자 하고, 은총보다는 징계를 두려워하는 수준의 믿음이거든요. 극복해야겠지요.

믿기 위해 의심한다고 하면 대부분 교인들은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열 두 사도도 직업별로 믿는 방식이 제각기였다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위에 나열한 의문들과 이론들을 이론으로서 또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믿는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덧붙임 1 : 이문열 작가는 누구나 갖는 의문들(스쳐 지나갈 뿐이더라도)을 참으로 기막히게 포착하고 풀어나가는  능력이 있는 듯 합니다.

덧붙임 2 : 해설자는 "<사람의 아들>은 신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신을 부정해야 할 만큼 악화된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라고는 하지만 책 속의 비중을 생각해 볼 때는 그 이상의 비중이 있는 듯 여겨집니다.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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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지혜 2010.04.11 0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믿음..신앙.. ^^;
    저는 천주교입니다.
    삶 속에서 하늘을 느낄때가 분명 있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그 神...
    문제는 그 존재가 아니라 내가 과연 삶에 치열한가의 진지한 물음으로 치환하여 이해하려고 했습니다만,
    결국 다림쥐 쳇바퀴 뛰는 심정입니다.
    포스트 잘 읽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이문열 작가.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 로처 2010.04.13 1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방문 감사드립니다.
      블로그 주소라도 남겨주시면 인사도 드리고 윤지혜님 글도 읽어보고 할텐데 아쉽네요.

      제가 쓴 글은 치기어린 투정에 가까워서 민망하기도 합니다. 결국엔 저는 믿음을 버리긴 어렵습니다. 조그마하고 내세울 것 없는 믿음이지만요 그래서 투정도 자주 부립니다. 다시 방문 감사드립니다.

  2. 브래드피트 2012.03.01 2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의 영역을 분석하려드는 것 자체가 신이 볼 때는 교만아닐까요?
    용서라는 것은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만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런 분들을 많이 본 것처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놀랐습니다.
졸업 후 지난 세월만큼의 기억들로 덮어 둔 학창시절의 정서를 어쩌면 그리고 정확히 짚어서 끄집어내는지요. 영화가 워낙 좋아서 책을 읽어봤습니다.


[ 벌써 30년이 다 돼 가지만, 그해 봄에서 가을까지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때처럼 막막하고 암담해진다. 어쩌면 그런 싸움이야말로 우리 살이가 흔히 빠지게 되는 어떤 상태이고, 그래서 실은 아직도 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p.11) ]


병태가 떠올리는 암담한 추억의 느낌으로 이렇게 소설은 시작합니다.

1. 불편한 질서

'자유당 정권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 해 3월' 서울에서 전학 온 깍쟁이 한병태는 시골학교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크기와 선생님들부터 시작해서 주먹으로 또는 최선생이 위임한 전권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급장 엄석대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엄석대에게 당하면서도 반항 없이 복종하는 아이들의 태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생활은 나름의 '불편한 질서' 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빼앗기거나 먹을 것을 바쳐야 함에도 반항 없이 무조건 복종합니다. 부당함이나 복종의 굴욕은 무서움으로 봉쇄되었고 그렇게 습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나름의 질서가 됩니다. 그 질서는 엄석대를 정점으로 주먹과 공납으로 정해진 서열이 있어 다툼이 없습니다. 청소나 실습에서 엄석대의 무서움으로 늘 1등 반이 됩니다. 모든 것을 엄석대에게 맡기고 그에게만 복종하면 되는 나름 편해 보이는 질서입니다.
마침내 아이들은 그 질서를 편안해하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 "급장이 부르면 다야?"  "급장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서 대령해야 하느냐구?"
그래도 나는 서울내기다운 강단으로 마지막 저항을 해 보았다.
그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말이 떨어지자마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댔다.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듯 (p. 29)]



한병태는 이 불편한 질서에 뻗대며 반항합니다.
'자유'니 '합리'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를 이해하고 지키고자 함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곧 닥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함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2. 질서에 합류

엄석대반의 완벽한 질서에 버둥거리며 반항하지만, 병태의 힘은 약하기만 하고 조력자도
찾을 수 없어 외롭기만 합니다. 결국 오기와 증오로 버티던 병태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질서에 합류한 병태는 학교성적과 주먹의 서열이 다시 올라가 제자리를 찾습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 동무들과도 어울리게 됐고요. 적극적으로 엄석대를 찬양하거나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전학 왔을 때만 해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아이들과 똑같아 졌습니다.

3. 질서의 붕괴

6학년이 되어 새로운 젊은 김선생은 결국 답안지 바꿔치기를 비롯한 엄석대의 비리를 알게 되고, 엄석대의 질서는 끝이 납니다. 회의의 원활한 진행이 이뤄지지 않을 때와 협동 작업에서 내빼는 아이들을 볼 때 석대시대의 질서가 주는 편의와 효용성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작은 석대의 질서는 무너졌지만, 세상의 질서에 무력한 개인의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 나는 급했다. 그때 이미 내 관심은 그런 성공의 마뜩치 못한 과정이나 그걸 가능하게 한 사회구조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과일 쪽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나도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p. 201) ]


4. '조지 오웰'보다는 '위화'에 가까운

그저 아이들의 얘기일 뿐일 수도, 다른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조지오웰이 정치적 의사표현의 도구로 우화를 사용했던 <동물농장>처럼 볼 수도 있겠죠.
특히 6학년 담임인 김선생이 아이들을 혼내는 장면에서는 더 그렇게 보이죠. 아래처럼요.
 

[ 너희들은 당연한 너희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것도 한 학급의 우등생인 녀석들이...... 만약 너희들이 계속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맛보게 될 아픔은 오늘 내게 맞은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런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모두 교단 위에 손들고 꿇어앉아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반성하도록 (p. 160) ]



그러나 이 책이 독재정권이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아이들의 세계에도 어른들의 세계에도 있는 질서 앞에서 무력한 개인의 모습, 그리고
질서의 당부를 따지기보다는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앉고 싶어 하는 개인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난 아니라고 자신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비난하기도 쉽지 않은
그런 모습을 말이죠.

P.S 인용한 페이지는 민음사 출판의 <이문열 포토로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페이지수 입니다. 다림출판의 페이지와는 맞지 않습니다.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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