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인근의 상공을 날던 비행기가 악천후 속에서 추락합니다.
48 명의 생존자는 운 좋게도 지상낙원 같은 섬에 안착하게 되고, 이런 익숙한 소재로 이 책은 시작합니다. 그리고 섬에서 생존자들이 겪게 되는 갖가지 일들의 조각조각 제시되죠.

진부할 정도로 익숙한 소재이고, 툭툭 끊어지는 듯 한 얘기들에도 불구하고 책은 재미있습니다. 생존을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도 언어주도권으로 다투거나 종교의례로 다투는 장면도 좋았고요, 성생활이나 가족관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이나, 팀 단위 조직을 운영해 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일부는 자신이 있었던 섬생활을 유토피아 비슷하게 말하며 문명을 거부합니다.


TV나 라디오가 없어도, 술집이나 오락시설이 없어도, 대통령이나 시장이 없어도, 영화나 드라마가 없어도, 회사나 직장이 없어도, 신문이나 잡지가 없어도,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 없어도, 회사나 직장이 없어도, 신문이나 잡지가 없어도, 판사나 변호사가 없어도, 경찰이나 119가 없어도, 전화나 우편배달부가 없어도, 전기나 석유가 없어도,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어도 전혀, 진짜 전혀 불편하지 않았소. 오히려 우리가 저 문명세계로 돌아가면 그거야 말로 진짜 고통과 불행의 시작일 거요. (p. 229)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유토피아는 그다지 환상적이지 못합니다.
아니 믿기 힘듭니다.

그들 역시
생존을 위한 노동을 합니다.
여전히 술과 담배를 즐기고요.
육식을 주로 하는 식문화도 그대로입니다.
젊고 건강한데다, 의료서비스도 확실하고요.
소규모의 직접민주방식이긴 하지만, 리더와 조직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벌써 규칙과 법 그리고 형벌도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유토피아는 젊고 부족함 없는 사람들이 풍성한 자연을 소비하는 즐거움만 부각한 것입니다. 결국 그곳은 완벽한 휴양지에 다름없었죠.

만약에 그곳에 사람이 늘어나면,
조난 동료라는 신뢰는 무뎌지고 이상적이던 직접민주제는 운영하기 힘들 겁니다.
그들의 육식을 섬은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할테고 냉동육을 수입해야 할 겁니다.
태형이 등장한 것처럼, 형벌과 법률은 갈수록 늘어나겠죠.

저는 <스머프>라는 만화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 방식의 소규모공동체가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요.
그래서 이 책에서 지금까지의 욕심(대표적으로 육식)을 내려놓지 않고 유토피아를 얘기하는 모순이 보기 싫습니다.
어쩌면 작가가 노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P. S 그냥 뜬금없이 다음 글이 좋아서 인용해 봅니다.


[ 여러 신문에 수많은 기사를 썼으나 그때만 반짝했을 뿐, 시간이 지나버리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시간에 묶인 글은 눈 속의 오솔길처럼 겨울 한때만 쓸모가 있다. 봄이 오면 녹아버리고 여름이 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필요 없으면 사람들은 잊는 법이다. (p. 12) ]


두고두고 곱씹어볼 좋은 글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공해일 뿐이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겨울 한 철 쓰여도 의미가 있을 테지요.

Posted by 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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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디오스 2009.03.17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낯선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의 차이 같은걸 보여주는 책인가 봅니다.
    서바이벌+갈등이 가득담긴 ^^

    • 로처 2009.03.17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서바이벌 측면이 많이 약해요.
      예를들면 불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전혀 나와있지 않거든요. 그래도 재미는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