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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신경림 에세이
    문학, 소설, 등 2009. 9. 18.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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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신경림 에세이

    제목부터 구수해서 인터넷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읽고 싶었던 책이었죠.
    읽기 시작해서는 재미있는 내용이었지만 한 호흡으로 읽어내기엔 쉼표가 많은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쉼표가 많다는 것은 제가 읽다가 덮어두고 스스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게 하기도 하고, 한 숨도 쉬어가며 읽었다는 것을 말함이에요.
     
    이 책을 보시면 크게 두 부로 나누어져있어요.


    1 부는 신경림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다니던 초등학교시절 이야기 말예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와지마' 순사가 해방 후에 정주임이라는 이름으로 경찰노릇을 했다는 추억, 제일 먼저 맞아 죽을 것 같다던 교장은 해방 후 국수주의 교장이 되었다가 문교부차관에서 국회의원 까지 지내더라는 씁쓸한 추억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기를 못해 맨날 꼴찌만 한다고 '맨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실실 웃게 만드는
    추억들도 있지요.

    작가의 추억담들 가운데 선생님에 대한 기억들도 제법 있는데요.
    그 가운데 인상 깊었던 구절을 아래에 인용해 봅니다.


    [ 이 선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 선거의 뒤치다꺼리를 우리가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거 연설은 대개 면내의 유일한 광장인 학교 운동장에서 했는데, 끝나고 나면 운동장은 버려진 유인물은 둘째로, 먹다 버린 음식물이며 배설물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것을 다 5, 6 학년 아이들이 청소해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선거 뒤에는 우리가 다니며 장터 여기저기 붙여진 벽보들을 떼고 닦았다.
    이에 대해서 담임 앞에서 제일 먼저 불평을 제기한 것은 반장이었다. 담임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고만 대답했다.

    우리는 의논 끝에 교장한테 직접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장터를 돌며 벽보를 떼다 말고 반장과 부반장이 앞장을 서고 교장한테로 몰려갔다.
     얼결에 얘기를 듣고 난 교장은 당황해서 뒤따라 들어온 담임을 향해 버럭 화부터 냈다.
    '아니,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렇게 버릇없이 굴게 하는 거요! 면장과 지서장이 부탁해서 하는 건데 일 좀 한다고 아이들 어디 덧나요?' 담임이 내몰았기 때문에 우리
    는 교실로 돌아왔지만, 이 일로 해서 담임은 지역 사회에서 싸가지 없는 교사로 평판이 돌았고, 선생들 사이에서도 저만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 왕따를 당했다는 후문이었다. (p. 124) ]



    초중등학교에 다닐 적에 선생님의 전령 또는 수금원 역할에 불과했던 형식적인 반장에 비하면 아이들의 당돌함도 놀랍지만, 작가의 추억 속 선생이란 사람도 참 인상 깊었어요.
    당시 사회나 교장의 지시에 대한 반발로 인해서인지, 사람이 순진하고 이상적이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적어도 아이들에게 꾸밈없이 솔직한 점이 좋아 보입니다.
    물론 아이들하고 같은 수준으로 솔직하기만 한 것이 선생으로 모자란 점이 된다고 하시면
    달리 반박하지는 못하겠지만요.


    2 부는 작가가 만났던 작가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소설은 물론이고 시는 더더욱 읽지 않는 저로서는 모르는 이름의 작가도 많이 등장하죠.
    추억 속 그들의 가난이 서글프기도 하고, 그들의 우정이 따뜻하고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가들의 생활담에 제가 느낀 감상은 '부러움'과 '혐오'의 짬뽕입니다.
    고교시절만 하더라도 좋게 봤을지 모르지만 작가들의 경제적 무능에 거울을 보듯 느끼는
    감정은 혐오이고요, 그럼에도 놓치지 않는 작가들의 자긍심이나 지조, 우정에 느끼는 감정은 부러움 입니다.
    아래에 그 일화 중 하나를 짤막하게 인용해 봅니다.


    [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는 취한 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간일도 여러 번 있다. 버스에서는 다리가 불편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그는 앉는 일이 없었다. 

    <중략>

    바로 집 앞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어, 집에 닿으면 그는 큰소리로 아이들을 불러내었다.
    사 들고 들어온 과자 봉지를 내밀며 아이들 들으란 듯이 내게 말했다. '따로 정원이 있을
    필요가 뭐 있어, 여기가 다 우리 정원인데.' 그러고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며 내게 인사를 시켰지만, 늘 술이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가 불만인 듯 아이들은 과자 봉지만 받아들고 들어가 버리고, 우리는 이웃한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오징어를 사다가 그의 정원 벤치에 앉아 마셨다. (p. 180 구자운 시인 편) ]



    그리고 신경림 작가가 만난 작가들과의 일화들 중에서 이문구 작가의 일화를 특히나 기억해 두고 싶네요. 일화를 통해 본다면 이문구 작가는 말만 앞서는 얼치기가 아니기에 본 받고 싶어서 아래에 인용해 봅니다. 그리고 생소한 사투리와 단어때문에 읽기를 그만 둔 '관촌수필'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김지하 시인이 '오적'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을 때였다. 젊은 작가들 몇이 모여 데모를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처음 이문구는 극구 반대했다. 다 잡혀 가고 끌려갈 걸 뻔히 알면서 그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기로 결정이 나자 이문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피켓을 만들고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마침내 거사일이 되었다. 조태일은 막상 겁이 나서 한 삼십 분쯤 늦게 약속장소로 나갔다. 내심 데모가 끝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데 현장에는 이문구 혼자만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싸들고 나와 서 있더라는 것이다.

    결국 그날의 데모는 모두들 한두 시간씩 늦게 나오는 바람에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말로만 진보주의를 내세우는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조태일의 이문구 평이었다.
    이런 사람이었으므로, 70년대 중엽 진보적인 문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자유실천문협회를 만들었을 때 처음에는 글쟁이가 글을 써야지 무슨 단체를 만드느냐고 탐탁해하지 않던 그였지만, 일단 만들어진 뒤에는 조태일, 박태순과 등과 더불어 내내 가장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집회며 시위를 주도했다. (p. 214) ]




     

    [ 1980년대 중엽 그가 한 신문에 전국을 도는 기행문을 연재하고 있을 때다. 벽초 홍명희의 출생지인 충북 괴산을 가게 되었다. 아직 '임꺽정'이 금서에 묶여 있을 때다. 그는 사진기자와 함께 벽초의 생가를 찾았고 벽초의 선영에 성모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낫을 하나 빌려 벌초까지 했다. 이것이 말썽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조차 빨갱이네 집이요, 무덤이라고 해서 피하는 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민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형사한테 그는 눈을 부라리고 호통을 쳤다.
    벽초의 부친 홍범식이 금산 군수로 계시다가 일본의 강제 합병에 항의하여 자결한 사실을 알기나 하냐고, 그런 애국자의 산소가 잡초가 무성하게 그냥 두었으니 너희들이야말로 빨갱이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그의 기에 눌려 형사들도 그냥 물러가고 말았다. 이문구를 제쳐놓고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작가가 없다고 나는 단언했다. 이러니까 그는 북한의 체제를 비판할 자격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침내는 내 이 말까지 시빗거리가 되었고, 그의 선친이나 형의 얘기까지 끄집어내졌다. 그의 부친과 형은 6.25 당시 좌익으로 몰려 희생되었던 것이다. (p. 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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