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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오 바디스(Quo Vadis) - 헨릭 시엔키에비츠
    문학, 소설, 등 2009. 9. 1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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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오 바디스(Quo Vadis) - 헨릭 시엔키에비츠


    10년 전 지금은 유물이 되어가고있는 비디오대여점에서 <쿼바디스>라는 테잎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뜻이라고 하는데 이 한 마디가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계추신자였던 저는 '오래된 영화'와 '뻔 한 내용'일거라는 생각에 보는 것을 미뤄두었습니다. 이제야 민음사의 책으로 읽어보았죠.

    읽어보니 좋았습니다.
    여전히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말은 저에게 울림을 줍니다.
    저에겐 이렇게 들리거든요

    '주여 제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주여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전히 응답은 들리지 않고, 절반 이상 포기한 상태인 저에게도 이 책은 충분히 좋았습니다.

    역자인 최성은 교수는 이 책의 대결구도 중에서 로마의 전통사상과 새로운 신앙인 기독교사상의 대립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품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들을 페트로니우스와 그 외 등장인물들의 말을 인용함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1.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종교인가


    [ 살인을 금하고 있으니 도둑질이나 사기, 위증도 허용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교리를 지키며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군. 그 종교는 스토아학파처럼 올바르게 죽어야 한다는 걸 가르칠 뿐 아니라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도 재산을 모아 이런 저택에서 이정도 숫자의 노예들을 부리고 살 수 있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군. 부자는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으니까. 덕을 쌓고 싶으면 덕도 쌓을 수 있겠지.....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그 종교는 부자들을 위한 것인데, 그렇게도 가난뱅이들이 신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덕이라는 이름으로 두 손을 묶어 놓는 것이 가난뱅이들한테 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1권 p. 306) - 킬로 킬로니데스의 독백 ]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공공연한 진리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비교적 깨끗한 사람들의 죄는 '준법'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법치주의'의 칼날아래 찢어발겨지고 잊지 말아야 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용서와 화합'을 들먹거리며 도닥이는 세상입니다.  부자들에게 면죄부를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세를 파는 꽤나 괜찮은 비즈니스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2. 기독교는 지키지 못할 교리로 사람을 억누르는가


    [ 게다가 악을 선으로 갚고, 적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권고하는 교리는 군인 비니키우스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광기 속에는 여태까지 알고 있던 모든 철학을 능가하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광기가 내포되어 있으니 이 교리를 따를 수 없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권 p. 324)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비니키우스의 생각 ]



     

    [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만약에 너희들의 형제가 너희에게 죄를 범하면 타일러라. 하지만 회개하면 용서하라. 가령 하루에 일곱 번 너희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용서를 빌며 돌아온다 해도 너희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그를 용서해 주어라."
    (1권 p. 384) - 킬로는 글라우쿠스를 죽이려 했고 그의 처와 아이를 팔아넘겼다. 글라우쿠스에게 베드로가 권하는 말 ]



    소설 속에서 또는 성인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 앞에서 무력합니다. 과연 누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할 수 있으며, 왼 뺨을 때리는 자에게 오른 뺨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인지상정이죠.
    소설 속 '크리스푸스'처럼 약한 사람들을 죄인이라 윽박지르며 자신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목회자가 없기를 바랄 뿐 입니다.


    3.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아직 내용을 모르시는 분을 위해 사기꾼 킬로의 부분을 인용하지는 않을게요.

    지키기 힘든 교리, 따르기 어려운 명령은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용서도 자비도 사랑에서 연유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없는 사람, 눌린 사람, 슬픈 사람이 기독교에 끌리는 것도 사랑이 이유일 겁니다.

    사랑하지 못해도 사랑받고 싶고,
    용서하지 못해도 용서받고 싶고,
    평안주지 못해도 평안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주기도문을 해 봅니다.

    그리고 극 중의 네로같이 약함에서 오는 잔인함을 없이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크리스푸스처럼 정죄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베드로처럼 순교의 길을 걷고 싶지도 않으니 어찌합니까.
    Quo Vadis Do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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